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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카페의 노래 ㅣ 열림원 이삭줍기 12
카슨 매컬러스 지음, 장영희 옮김 / 열림원 / 2005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어떤 점이 이 카페를 슬픈 카페라고 부르게 하는 걸까. 왜 이 이야기는 슬픈 카페의 노래가 되는 걸까. 궁금했었다. 현실과는 좀 동떨어진, 이국 어딘가 먼지가 뽀얗게 날리던 땅에서 살짝 떠있는 공간 같던 곳. 그곳에 거인과도 같던 한 억센 여인과, 그녀와는 기분 나쁠 만큼 대비되는 한 간악한 꼽추와, 흉포하기 이를 데 없는 한 사나이가 있다. 흡사 에밀 쿠스트리차의 영화의 한 장면은 옮겨 놓은 듯한 카페와 사람들이 있다. 슬프다기보다는 오히려 희극적인.
그들의 사랑은 어이가 없을 만큼 제멋대로이다. 어린 애가 신기한 장난감을 만난 듯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저 줄줄 쫓아다니며 헤벌쭉 웃는 모양이나 다름없다. 슬프긴커녕 웃음이 나고, 노래는 무슨 노래, 뻣뻣한 몸을 굴려 어기적거리는 춤이라면 또 모를까.
그런데, 짧은 이 책의 책장을 탁, 하고 덮는 순간,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와 버렸다. 언제 다가왔는지도 모르게 슬며시 다가와 모든 것을 적시고 갔다. 세 사람이 모두 사랑을 했으나, 그들은 모두 사랑을 주는 사람이었을 뿐이라는 것. 그것이 바로 내 슬픔의 요체였다. 작가는 사랑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사랑이란 두 사람의 공동 경험이다. 그러나 여기서 공동 경험이라 함은 두 사람이 같은 경험을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랑을 주는 사람과 사랑을 받는 사람이 있지만, 두 사람은 완전히 별개의 세계에 속한다. (49)
사랑을 주는 사람과 사랑을 받는 사람의 간극이 얼마나 클 수 있는가, 그들이 과연 같은 지점에서 마주칠 수 있는 것인가.
왜 작가는 이렇게 슬픈 사랑의 규정을 내릴 수 밖에 없었을까.
사랑의 본연의 모습이 이렇다 라고 정의해 버린 사람이 있어서 슬프다. 그러나 나 역시 그러한 사랑의 본질을 알고 있노라고, 나 역시 자신의 사랑이 고독한 것임을 영혼 깊숙이 느끼고 있노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어서 더욱 슬프다.
그러나 나는 슬픈 카페에 갇히고 싶지는 않다. 사랑이 고독한 것임을 알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 고독은 이제 끌어안을 수 있다. 나의 사랑이 그의 사랑과 꼭 같은 모습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 그것은 그들로부터 배웠기 때문에.
덧붙임.
위에서도 살짝 언급했지만, 책을 읽는 내내 에밀 쿠스트리차 감독의 <집시의 시간>이 떠올랐다. 비현실의 현실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