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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
온다 리쿠 지음, 권남희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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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곳곳에..)

이 책을 읽기 전에 <삼월은 붉은 구렁을>의 4장을 다시 읽었다. 다시 읽는데도 한 문장 한 문장이 새록새록하여 열심히 곱씹으며 보다가 하루가 다 가버렸다. 밤늦게 집어든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 서장을 읽다가 어질어질하여 그만 잠이 들었다. 그러니까 이 책은 그 다음날에야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한 셈인데, 리세가 기차에서 눈을 뜬 순간부터 몽롱해지는 느낌이었다. 같은 장소, 같은 인물, 같은 감상, 같은 대사가 되풀이되고 있다. 과연 예전에 읽었던 부분인지조차 헷갈려지기 시작했다. <삼월은 붉은 구렁을>에서 봤던 똑같은 대사다, 라고 생각했다가 순간 아닌가? 하는 생각이 뒤따른다. 과연 내가 봤던 건 뭐지?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나 넘쳐나는 기시감. 어디서 봤더라, <삼월은 붉은 구렁을>에 나왔던 걸까, 서장에 나왔던 걸까, 아니면 읽다가 잠들었을 때 꾸었던 꿈에서...?
그것은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나온 조금씩 다른 같은 이야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녀의 잃어버린 기억 때문일 수도 있고, 교장이 나에게 먹인 검은 홍차 때문일 수도 있다. 모든 것이 음습하게 뭉뚱그려진 채로 미로를 헤매는 듯한 느낌으로 내내 책을 읽게 되었다. 미스터리 소설의 독자라면 응당 가지고 있어야 할 명확한 상황 판단력이나 논리적인 추리력 따위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도개교를 지나 삼월의 학원제국에 들어가는 순간, 무언가에 취해 버렸다. 조금은 다른 결말을 가진 <삼월은 붉은 구렁을>의 4장 이야기처럼 이 학원 지하에 아편의 재료인 양귀비를 키우는 정원이 넓게 있어서 조금씩 조금씩 중독이 되고 있었던 걸지도. 아니, 부모와 친지로부터 버려진 채 세상과 단절된 채 묘지같은 이곳에서 하루하루를 견뎌내고 있는 아이들의 우울한 감정들이 공기를 통해 조금씩 나를 감염시키고 있었던 걸지도.

그래서 느닷없던 결말이 조금 당황스러웠다. 멍청~하게 책을 읽고 있던 내 두 뺨을 찰싹 내리쳤다. 교장이 리세에게 그랬던 것처럼. 정신을 차리고 났을 땐 모든 정리가 끝나버린 후였다. 레이코도 레이지도, 요한도, 유리도. 모든 상황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정신없이 쫓겨 다니던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리세는 야무진 표정으로 새침을 떨고 있다.
결국 고등학생이 되어 떠나가는 리세를 뒤로 한 삼월의 제국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누구에겐 요람이고 누구에겐 양성소이고 누구에겐 묘지인 이곳. 누군가에게 검은 홍차를 먹이고, 누군가를 첨탑에서 떨어뜨려 죽이는 이곳. 밀실인 장미정원에서 누군가 사라지는 이곳. 그러나 아름다운 곳.

<삼월은 붉은 구렁을>의 4장을 보면 온다 리쿠가 글을 쓰는 방식을 엿볼 수 있는 글이 있다.

그녀가 소설을 쓰는 방법은 엉성하기 짝이 없다. ‘분위기는 이러이러하고, 읽히면 이러이러한 기분이 되는 것은 쓰고 싶다’는 아이디어가 맨 앞에 있고, 그 다음으로 ‘이러이러한 장면을 쓰고 싶다’는 식으로, 쓰고 싶은 장면들이 몇 가지 있다. 그래서 그런 장면들을 이어붙이는 것이 작업의 핵심이다. 흩어져 있는 장면들에서 전체 이미지를 발굴해 가는 작업은 즐거우면서도 고생스러운 일이다.

이 말은 소설 속의 한 장면이지만,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에 한해서는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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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ebs공감에서 보고 오랫동안 기다렸던 뭄바트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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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도와 떠도는 사원
김용규.김성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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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나 판타지 작가들만큼 욕심이 많은 사람들도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온전히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해내고, 그 세계의 세계관과 구조를 재단한다. 무수한 인간 군상들의 삶을 세심하게 조각하며 때로는 신까지도 창조한다. 삶과 죽음에 대하여, 기쁨과 슬픔에 대하여, 자아와 타아에 대하여, 우연과 필연에 대하여, 있음과 없음에 대하여 광활하게 내달린다. 그러니 이런 장르들이 철학과 어울리지 않기도 어려울 것이다. 철학판타지 라는 단어만큼 제 짝을 잘 찾은 단어도 없겠단 말이다.
그러나 철학은 언제나 우리 삶 곁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불을 밝히고 선 동반자와 같은 것이어서 철학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더구나 이야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게 만드는 것은 삶에서 철학이 든든하게 버티고 있어야 가능한 일이므로 더욱 어려운 일이다. 다른 장르들에 비해 SF나 판타지 소설에서 치기어린 글들이 많이 보이는 것도 다 이런 연유이다.

<알도와 떠도는 사원>이 철학판타지 라는 별명을 가지고 재출간되었다는 것은 철학을 이야기하는 데에 있어 어느 정도 자신감이 있다는 표현일 것이다. 여타의 치기어린 글들에 비해 정제되고 준비된 책이라는 의미도 들어있을 것이다. 기대를 안 할 수가 없다.
꼼꼼한 만듦새에 흡족해 하면서 책장을 넘겼다. 그리고 마지막장까지 덮은 지금, 그 자신감의 표현이 합당한 것이었다고 인정.
이야기의 구조는 단순하다. 장르적 원칙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어 크게 놀라거나 크게 실망할 만한 일은 없다. 이야기적 재미가 떨어진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책장을 한 장더 넘기고 싶다고 생각하게 하는 건, 오히려 사건들이 아니라 사건들을 대하는 알도의 태도이다. 사건과 사람과 자연을 대할 때마다 알도가 떠올리는 것들, 알도의 여자친구 레나가 떠올리는 것들이 궁금해서 책을 계속 읽는다. 때로는 지나치게 친절한 설명이 뒤따르기도 한다. 그러나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았고, 버린 것보다 배운 것이 더 많았다는 걸 생각하면, 때론 지루했던 설명도 크게 문제될 건 없다. 학문적 개념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느냐 보다도 진지하게 사람과 자연과 세계를 대하고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걸, 꼬마 알도로부터 배웠다.

2001년 처음 출간되었을 때 이 책을 읽었다면 지금과 같은 감흥이나 재미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땐 아는 게 정말로 없어서, 무식해서 용감했기 때문에 이 책 보면서 코웃음을 쳤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앎은,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게 많아 부끄러워지는 것이다. 그 당연한 걸 이제야 알았으니, 난 아직도 갈 길이 까마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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