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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도와 떠도는 사원
김용규.김성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12월
평점 :
품절
SF나 판타지 작가들만큼 욕심이 많은 사람들도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온전히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해내고, 그 세계의 세계관과 구조를 재단한다. 무수한 인간 군상들의 삶을 세심하게 조각하며 때로는 신까지도 창조한다. 삶과 죽음에 대하여, 기쁨과 슬픔에 대하여, 자아와 타아에 대하여, 우연과 필연에 대하여, 있음과 없음에 대하여 광활하게 내달린다. 그러니 이런 장르들이 철학과 어울리지 않기도 어려울 것이다. 철학판타지 라는 단어만큼 제 짝을 잘 찾은 단어도 없겠단 말이다.
그러나 철학은 언제나 우리 삶 곁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불을 밝히고 선 동반자와 같은 것이어서 철학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더구나 이야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게 만드는 것은 삶에서 철학이 든든하게 버티고 있어야 가능한 일이므로 더욱 어려운 일이다. 다른 장르들에 비해 SF나 판타지 소설에서 치기어린 글들이 많이 보이는 것도 다 이런 연유이다.
<알도와 떠도는 사원>이 철학판타지 라는 별명을 가지고 재출간되었다는 것은 철학을 이야기하는 데에 있어 어느 정도 자신감이 있다는 표현일 것이다. 여타의 치기어린 글들에 비해 정제되고 준비된 책이라는 의미도 들어있을 것이다. 기대를 안 할 수가 없다.
꼼꼼한 만듦새에 흡족해 하면서 책장을 넘겼다. 그리고 마지막장까지 덮은 지금, 그 자신감의 표현이 합당한 것이었다고 인정.
이야기의 구조는 단순하다. 장르적 원칙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어 크게 놀라거나 크게 실망할 만한 일은 없다. 이야기적 재미가 떨어진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책장을 한 장더 넘기고 싶다고 생각하게 하는 건, 오히려 사건들이 아니라 사건들을 대하는 알도의 태도이다. 사건과 사람과 자연을 대할 때마다 알도가 떠올리는 것들, 알도의 여자친구 레나가 떠올리는 것들이 궁금해서 책을 계속 읽는다. 때로는 지나치게 친절한 설명이 뒤따르기도 한다. 그러나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았고, 버린 것보다 배운 것이 더 많았다는 걸 생각하면, 때론 지루했던 설명도 크게 문제될 건 없다. 학문적 개념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느냐 보다도 진지하게 사람과 자연과 세계를 대하고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걸, 꼬마 알도로부터 배웠다.
2001년 처음 출간되었을 때 이 책을 읽었다면 지금과 같은 감흥이나 재미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땐 아는 게 정말로 없어서, 무식해서 용감했기 때문에 이 책 보면서 코웃음을 쳤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앎은,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게 많아 부끄러워지는 것이다. 그 당연한 걸 이제야 알았으니, 난 아직도 갈 길이 까마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