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가을 우리 시대의 고전 1
요한 호이징가 지음, 최홍숙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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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읽기 텍스트로서 재미가 쏠쏠하다. 풍부하고 유려한 글쓰기는 역사서라기 보다는 박식한 에세이에서 찾을 수 있는 즐거움을 발견케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중세란? 극히 한정적일 것이다. 대중은 가난하고 금욕적이고, 교회는 번창해서 타락하고..이런 일련의 조합이 떠오를 것이다. 호이징가는 이런 조합을 문학적 아름다움이 깃든 문장들로 풀어간다. 그리고 그 박식함이란!

호이징가가 주장했듯이, 르네상스의 뿌리는 중세에 있으며 모든 세기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독립적 세기란 하나도 없다. 단지 동시대에는 유기적 관련성을 알 수 없을 뿐이다. 난 이런 점에서 움베르토 에코가 포스트모던한 현대 사회에서 중세를 보앗듯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중세의 그림자를 본다.

중세는 무엇보다도 이원론의 세계였다. 순수한 하나님의 왕국과 관능적이서 억압된 죄악의 세상이 그것이다. 아름다움 역시 신의 왕국에만 있는 것으로 중세인들이 실재하는 세상에는 형식만이 만개할 뿐이었다. 종교는 지극히 일상적이어서 종교적 사고를 과도하게 드러내고 물질 속에 고정시키는 부작용을 초래한다. 즉 아름다운 신의 세계에 이르는 모든 의식이 세속적 진부함과 물질주의로 타락한다.

현대는 이런 중세와 닮은 꼴이다. 물질이 신의 자리를 대신하고 숭배의식을 받는다. 황금이 거주하는 예배당은 도시 곳곳에 있다. 차가 드문 새벽이나 밤에 양재동 사거리를 지나는 길에 남부순환로에 서있는 거대한 콘크리트 건물들은 차갑고 육중하게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사람들은 그 건물들 중 한 칸을 소유하기 위해 하루하루의 삶을 버리고 있다. 더 나은 미래라는 미명하에 구원의 길이 아닌 타락 길을 걸으며 하루하루의 삶을 소진해가고 있다.

나는 이런 현대적 삶이 중세보다 덜 비참하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호이징가가 중세를 더 혹독한 시기들로 묘사했음에도 불구하고 풍요로운 물질 속에 마음은 더 혹독한 가난을 겪고 있는 것을 안다면 그도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추측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이런 내 염세적 생각은 호이징가의 말대로라면, 곧 낙관주의의 뿌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중세가 르네상스와 더불어 계몽주의에 이르러 세계를 의식 있게 개선하려는 열망, 삶에 대한 두려움이 용기와 희망으로 끌어오리려는 근간을 이루었듯이 말이다.

"매 시대마다 행복한 기억보다는 불행과 고통의 흔적을 더 많이 남긴다. 주로 불행한 일이 역사로 남는다."는 말처럼 아찔하고 혼돈스러운 현재에 스며든 행복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기를...

*호이징가의 플랑드르 화파에 대한 접근은 흥미롭다. 플랑드르 화파의 목적은 사물의 외면을 실제처럼 재현하는 것이었다. 실제와 혼동할 정도로 비싯한 그림을 보고 감동하는 것은 인간의 감수성 때문이라고 하고 있다. 그 시대에 열렬한 신앙심을 불러일으키는 주제를 그림으로써 예민한 감수성을 자극한 것으로 기법도 이성도 균형도 비례도 가치선택도 웅장함도 없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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