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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합
타지마 토시유키 지음, 김미령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백합은 흔히 순결의 상징으로 불린다. 하지만 머리가 떨어지는 꽃이라 병문안에 가져가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한다. 사소한 것, 마지막 한 조각이 그 사람의 평가를 바꿀 수 있다. 추리소설은 크게 두 종류의 추리소설이 있다. 이른바 정통파라 불리는 것은 책의 시작에서 사건이 벌어지고 그 사건을 탐정역할을 맡은 사람이 조사를 해 나간다. 반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일상을 던져놓고 군데군데 복선을 심은 다음 마지막에 전체 그림을 바꾸는 한 조각을 던져두는 종류의 것이 있다.
이 책 <흑백합>은 후자라고 할 수 있다. 순결의 상징으로 불리지만 일견 머리가 떨어지는 재수 없는 꽃으로 여겨지기도 하는데다가 검은 색 백합이라니 그 이미지가 묘하게 일그러진다. 책은 마지막 장을 읽을 때까지 청춘소설로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1935년과 1952년을 오가면서 전개되는 이야기는 전후를 배경으로 한 소년 소녀의 깨끗한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하지만 어디나 그렇듯이 주인공 뒤에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고 흘러가는 이야기들이 있다.
그 모든 이야기는 어두운 그림자의 조각들이다. 청명한 바람에 휩쓸려 느끼지 못했던 것뿐이랄까.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도 짙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1952년 롯코 산에 있는 아는 사람의 별장에 놀러오게 된 소년 스스무는 별장집 아들인 카즈히코와 여름을 보내게 된다. 스스무는 그 곳에서 카오루라는 당돌하면서도 묘한 구석이 있는 소녀에게 빠져든다. 세 명의 소년 소녀 각각의 여름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소년들은 소녀에게 열을 올리고 그 와중에 소년들의 아버지들의 인연부터 숨은 사건이 곁가지처럼 흘러간다. 처음에는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지만 그 그늘의 고리는 너무 깊어서 미처 눈치 채지 못했을 뿐이었다. 카오루에게 연심을 품고 만 소년들은 그 해 여름 그녀를 따라서 이리저리 다닌다. 그 와중에 아버지들이 1935년에 수행했던 대기업의 회장님을 만나기도 하고 도도한 자세로 '롯코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여성을 만나게 되기도 한다.
소년들은 카오루를 만날 수 없는 날이 너무 지루하기만 했다. 그들은 우물 안에서 하늘을 보는 개구리였고 편향된 시선으로 상황을 읽어나간다. 그 와중에 사건이 일어나고 그 사건은 독기를 뿜어내지만 어린 아이들의 시선으로 알아낼 도리가 없었다. 그들의 관심사는 오직 자신과 상대에 대한 것뿐이었던 것이다. 반면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마지막 조각이 들어오자 전체 그림이 바뀌는 느낌이라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 들었다.
단 한 조각으로 모든 것이 바뀌었던 것이다. 숨은 의미와 곁가지처럼만 느껴졌던 어른들의 추억담, 이해할 수 없었던 묘한 행동들이 전부 맞아 들어가 버렸다. 사람의 인생이 그런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자신의 입장에서만 하늘을 보기 때문에 결코 읽을 수 없었던 것을 추리소설로 바꿔놓은 기분이었다. 자신들의 순수한 시절에 집착하느라 미처 읽지 못했던 타인의 독기랄까. 죄는 긴 그림자를 드리운다더니 이번 것은 좀 지나치게 깊었던 것 같다. 있는 줄도 몰랐을 정도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