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경사 바틀비 - 미국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허먼 멜빌 외 지음, 한기욱 엮고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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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명탐정 홈즈걸의 책장>에서 표절의혹을 받는 만화가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의 팬은 작품에는 세계관과 그림이 전부가 아니라고 그가 만든 이야기, 대사에 작가의 생각이 들어 있다고 말한다. 작가의 생각 즉 작가 자체는 비슷할래야 비슷할 수 없는 진품이라는 말이었다. 글에는 알게 모르게 쓴 사람의 생각이 담기게 마련이다. 사람을 특정 짓는 것은 이름이지만 그 사람을 그 사람답게 나누는 것은 그 안에 담긴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의 생각 역시 그 사람이 자란 환경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결국 지우려 해도 그가 속한 문화의 느낌이 배어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이 책 <창비세계문학 미국편 - 필경사 바틀비>에 담긴 것은 11개의 단편이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은 작가 자신이고 동시에 그가 속해있던 나라였다. 영국을 떠올렸을 때 생각나는 것이 안개였다면 미국의 경우에는 흙먼지였다. 누군가 황야를 질주하면서 남긴 것 말이다.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새로운 나라를 일군 역동성이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다.

물론 너새니얼 호손의 <젊은 굿맨 브라운>, 에드거 앨런 포우의 <검은 고양이>,  샬롯 퍼킨스의 <누런 벽지>, 윌리엄 포크너의 <에밀리에게 장미를>은 역동성 이전에 기괴한 느낌이 남기는 했다. <젊은 굿맨 브라운>의 경우에는 한 청년이 금지된 숲속으로 접어든다. 그는 지극히 신실한 남자로 그가 왜 그런 곳에 발을 들이기로 결정했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페이스라는 이름의 아내를 두고 길을 나선 것으로 보아 그가 신앙에서 발을 돌리기 시작한 것에 대한 은유로 보였다. 청년은 기묘한 남자와 동행을 하는데 남자의 말하는 투를 보아하니 남자는 악마인 것 같았다. 청년은 목적지까지 가는 길에 숱하게 자신의 믿음을 증명하려 하지만 그 믿음은 번번이 깨어진다. 하기야 그렇게 믿는 바가 탄탄하다면 당장 발을 돌려야 할 텐데 청년은 악마와의 동행 길에서 발을 돌리지 않는다.

여러 번 읽어서 익숙한 <검은 고양이>의 경우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그 섬뜩한 느낌이 잘 살아 있었고 <누럭 벽지>의 경우 페미니즘을 생각하기에 앞서 믿을 수 없는 화자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점차 비틀린 집에 혼자 남는 것 같은 기분을 맛봤다. 마지막 단편인 <에밀리에게 장미를>은 시대의 흐름에서 낙오되어 혼자 남고만 미스 에밀리에 대한 동정을 품다가 마지막 철회색 머리카락을 발견한 순간의 오싹함이 더해지면서 그녀를 동정해야 할 지 두려워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어졌다.

다행히 이 네 편의 이야기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유쾌한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마크 트웨인의 <캘레바래스 군의 명물, 뜀뛰는 개구리>는 들려주는 노인의 입담에 허풍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재미있게 들었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찰스 W. 체스넛의 <그래디썬의 위장>이었다. 혼혈로 흑인의 감성을 품고 있던 저자가 남부 노예주와 노예 간의 이야기를 풍자하는 것이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특히 그래디썬의 철저한 위장과 마지막 부분에 노예주가 종주먹을 들게 하는 부분이 좋았다.

그 외에도 청교도 국가에서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모습과 특유의 떠들썩한 허풍이 잘 녹아들어 있는 것 같아서 부담스럽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단편 하나하나는 거장의 솜씨지만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저 흥미로웠을 뿐이었던 것이다. 진짜가 오히려 가짜에 밀리는 상황을 독특한 감성으로 그려낸 <진품>도 그런 느낌이었다. 개인적으로는 단편 소설을 좋아한다. 그 휘황한 상상력에 짧은 꿈을 꾸었다가 깨고 난 이후에 남는 여운이 좋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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