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빙하기
오기와라 히로시 지음, 양억관 옮김 / 좋은생각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아이에게 집은 세계의 전부고 부모는 신과도 같다. 점차 성장해가면서 그 세계가 넓어지고 부모는 어느 순간 넘어서야 할 존재로 변해간다. 그렇게 성장해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넘어서야 할 존재가 없다면 어떨까. 어디까지 성장해야 할지 멈춰야 할지를 가늠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은 무리를 지으며 살아간다. 그 안에서는 규율이 있고 살아가기 위해 형성해야 하는 인간관계가 있다. 그것은 때로는 성가시지만 어떤 것을 배워야 할 때 편리하기도 하다. 자신이 처음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아이의 첫 스승이며 역할 모델인 부모는 그런 면에서 아주 중요한 편이다. 물론 편부, 편모 가정에서도 전혀 문제가 없을 수 있다. 양쪽 다 있다고 해서 더 잘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한 쪽만 있다고 해서 부족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편모 가정이라는 이유로 동네 사람들이 전부 적대시하고 비웃음의 대상이 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일종의 폭력에 시달리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지극히 불합리하고 편협한 것 말이다. 이 책 <네 번째 빙하기>에서는 미혼모인 엄마에게서 태어난 혼혈 소년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사실 아이는 아이일 뿐 혼혈이든 아니든 미혼모의 아이든 아니든 전혀 관계없다. 그런데도 동네에서 시달림을 받는 것은 이방인에 대한 폐쇄적 태도에다가 지극히 보수적인 편견 때문이었다. 그래서 와타루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서 출발선에서부터 불리했다. 논리적이면서도 사려 깊은 엄마에게 잘 교육받은 아이임에도 비난의 대상이 된 것이다. 어려서 같이 잘 놀던 친구들조차도 부모님의 영향으로 점점 멀어져만 갔다. 게다가 와타루는 아버지를 알 수 없었다. 엄마가 유학을 갔다가 돌아왔을 때는 임신을 한 상태였고 와타루의 엄마는 나중에 말해주겠다는 말만 하고 와타루에게 아버지가 누군지 알려주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 엷은 색의 눈동자와 머리카락, 다른 얼굴형은 시골에서는 확실히 튀는 모습이었다. 다르다는 것을 나쁘게 받아들이는 동네 사람들은 와타루 모자를 철저히 배제한다. 학교에서도 괴롭힘의 대상이 되었지만 와타루는 또래보다 성장이 빠른 편이라 신체적인 힘 면에서는 우월했다. 맞지는 않지만 외로운 시간을 보내야 했던 것이다. 겉으로는 괜찮다고 했지만 엄마 말고는 믿을 사람도 친한 사람도 없던 아이는 점점 자신의 아버지를 궁금해 하고 독특한 결론을 내린다.

자신의 아버지는 크로마뇽인이라는 것이다. 뿌리를 더듬어 올라간 시도는 좋았지만 너무 많이 올라간 셈이었다. 그것에 대한 나름의 논리도 있었는데 와타루의 엄마가 유전학과 관련된 연구를 하고 있다는 점이 컸다. 와타루는 엄마가 러시아에 갔을 때 크로마뇽인을 부활시키는 프로젝트에 참여해서 실험체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다른 아이들과 다른 외모도 그로 인한 것이고 빙하기가 체로 걸러내듯 다른 생명체를 남겨 두었듯이 자신도 다음 빙하기가 오기를 기대한다.

그때부터 와타루는 자신만의 기지를 만들고 석기를 만든다. 아버지의 흔적을 느끼고 사냥을 익히기 위해서였다. 자신 안의 가득한 힘을 방출하기 위한 일이기도 했고 외로움을 달래는 그만의 놀이였다. 비웃음의 대상이 될 때도 자신은 크로마뇽인의 자식이라서 다른 것이라며 의연하게 받아들인다. 와타루는 그렇게 한 발자국씩 성장해간다. 그 성장은 때로는 가슴 아프고 때로는 웃음이 난다. 소년의 내면을 섬세하게 그리고 있다는 점도 장점이지만 그 당사자의 독특한 발상이 인상적인 책이었다. 와타루가 긴긴 성장을 끝마친 순간에는 깊은 감동까지 느낄 수 있었다. 크로마뇽인과 현대인의 잃어버린 고리라는 간극을 성장이라는 줄로 채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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