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국왕의 일생 규장각 교양총서 1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엮음 / 글항아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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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에서는 위에도 또 위가 있었다. 신분제 사회에서는 누구도 자유롭지 못했다. 자신을 유지하는 바탕이 튼튼한 듯 보여도 위에서 무차별적으로 행해지는 폭력에 의해서 순식간에 부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정승의 집안이라해도 역적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게 되면 모든 기반이 송두리채 무너져 내렸다. 그런 마당이니 모두가 왕이 되길 원할 수밖에 없었다. 야심이 큰 자는 체제를 전복시키고 왕이 될 야심을 키웠고 야심은 없되 살아남고 싶었던 자는 충성심을 가장해 왕의 앞에 엎드렸다.

그렇다고 정점에 있는 왕이 자유로웠나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모두가 왕이 되길 원한다는 것은 왕의 자리에 앉은 순간 만인의 표적이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들이 체제에 순응해서 충성하는 것으로 만족하게 하느냐, 전복의 야심을 키우게 하느냐는 왕에게 달린 부분도 많았다. 결국 신분제 사회에서는 모두가 피해자였고 왕 조차도 그랬다. 이 책 <조선 국왕의 일생>에서는 그런 왕의 일생을 들여다본다. 왕의 탄생, 쌓아야 했을 소양, 왕의 곁에서 살아간 자들의 이야기, 왕의 죽음과 그 대체까지를 다루면서 조선의 왕이라는 자리가 어떤 것이었는지 퍼즐조각을 하나하나 맞춰간다.

왕은 잉태되는 순간부터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 왕은 흔히 용을 상징하는데 그래서 왕비가 머무는 곳에는 용마루가 없었다고 한다. 용이 잉태되어야 할 곳이 다른 용의 기운에 눌릴까봐 그랬다는 것이다. 또한 영조의 정비였던 정성왕후는 죽을 당시 왕이 잉태될 곳에서 죽을 수 없다며 거처를 바꿨다고 한다. 거기에 왕비가 회임한 사실이 알려지고 아이가 태어나기 한 달에서 세 달 전이 되면 산실청이라는 기관이 생겨났다고 한다. 그리고 이후 왕비가 출산을 할 때까지 형벌의 집행은 중지되었다는 것이다. 그만큼 왕은 특별한 존재로 태어났다.

태어난 이후에는 유모가 붙여졌는데 그 유모는 천인이어도 괜찮았다고 한다. 유모는 민간인 중에서 견실한 성품을 가진 이로 선택되고 유모가 키운 아이가 국왕이 되면 종1품에 해당하는 관직을 받았다는 것이다. 유모는 왕이 태어나 자랄 때까지 함께 하니 각별한 관계가 유지될 수밖에 없고 이후 그만한 대우를 받게 되는 자였다. 거기에 왕의 최측근에 있는 내관은 물론이고 궁녀의 경우 재상의 집에 놀이를 나가는 경우까지 있었다고 하니 왕의 권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그만한 권력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이었고 왕은 태어나면서부터 온갖 교육을 받아야 했다. 조선은 문치의 국가였으므로 유교 경전을 계속하여 공부하는 것은 물론이고 각종 교양도 쌓아야 했다. 특히 시를 짓는 일은 여흥으로만이 아니라 후에 신하들과 감성적인 소통의 수단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들으면 모든 왕은 태어나면서부터 왕이었고 계속하여 왕으로 자랐을 것 같지만 정작 궁궐에서 태어난 왕은 몇 명되지 않는다는 것이 묘했다. 하기야 모든 사람이 왕의 자리를 탐내니 왕이 되기 전까지는 왕이 될 수 없을까 겁을 내야하고 왕이 된 이후에는 그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피를 말리는 긴장을 이겼어야 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부자의 괴로움과 가난한 자의 괴로움은 다르다. 체제의 희생양이라고 해도 왕은 왕으로 살다가 죽어가지만 그가 잘못 행한 정치의 폐해가 나비효과처럼 번져가 벌레처럼 죽어간 일반 백성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듯 했으나 실상은 언제나 원활하게 대체되어야 할 톱니바퀴에 불가했던 왕의 일생은 신분제 사회에서 누구도 승리자가 될 수 없음을 떠올리게 한다. 왕은 누구나 탐내듯 화려한 자리였지만 동시에 다시는 궁에서 살고 싶지 않다는 궁궐 여인들의 한탄처럼 가시밭길이기도 했던 것이다.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도 짙어지는 법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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