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를 볼 때마다 너무 상투적이어서 웃음이 나오는 말이 있다. 바로 누군가 답다는 말이다. 보통 화내는 여주인공에게 '너답지 않다'고 다른 사람이 말하면 그녀는 '나다운 것이 뭐냐'며 더 크게 화를 낸다. 그런데 누군가 답다는 말은 그 사람이 평소 하는 행동을 바탕으로 나온 말일 것이다. 당연했던 것이 당연하지 않게 된 순간 많은 것은 놀라워진다. 드라마에서는 상투적인 한 마디로 표현되었지만 말이다. 사람은 대개 익숙함에 안주하려 한다. 그것이 안전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자극도 즐거움도 없지만 상처받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래서야 숨만 쉬고 있을 뿐이다. 여기에 한 소년이 있다. 소년의 이름은 숀 시몬스, 십대 소년이다. 흔히 생각하기로는 십대의 몸에는 반항심만 끓고 있을 것 같은데 소년은 자신이 우연히 얻게 된 당연함에 안주하여 껍질 속에 숨어 버린다. 가족에게는 공격적인 태도를, 밖에서는 더 나은 것을 바람에도 튀지 않기 위해서 투명인간 같은 태도를 취한다. 그런데 이런 소년을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 지옥에서 사람들이 마음을 바꿀 때까지 그저 지켜봐야 하는 타락천사다. 타락천사 키리엘은 자신의 일에 염증을 느낀다. 잠깐의 반란으로 지옥에 떨어졌고 무수히 많은 시간을 그 곳에서 보내야 했다.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시스템의 톱니바퀴 노릇뿐이었다. 자신이 품은 죄책감에 의해 몸부림치고 스스로에게 벌을 주는 영혼들을 지켜보는 일인 것이다. 그는 그것이 지겨웠고 타락천사다운 반항심을 드러낸다. 자신에게 아무도 관심이 없고 지겨우니 지상에 올라가 놀아보겠다 생각한 것이다. 타락천사지만 어쩐지 가출 청소년 같은 태도였다. 키리엘의 본래 모습은 형체가 없으므로 어딘가에 들어갈 필요가 있었다. 인간의 삶을 누려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오랫동안 관찰해 온 게으름뱅이 소년의 몸을 노린다. 그렇다고 무작정 빼앗는 것은 아니고 소년의 명이 끝나는 순간을 기다린다. 그것은 그리 길지 않았다. 소년이 집에 돌아가는 길에 트럭에 치여 죽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평범하고 인기도 없으며 자신의 삶을 바꿀 의지도 없는 그런 소년이었다. 소년의 몸이 부서지기 직전 키리엘은 그 몸을 구하고 그 안에 들어간다. 그 순간 숀의 영혼은 죽음을 향해 가버린다. 이제 소년의 몸을 얻은 타락천사는 인간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그런데 그게 아주 신선했다. 인간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모든 감각에 감탄하는 키리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눈에는 세상은 현란한 색깔이 가득하며 다리를 움직일 때의 감각, 말을 하고 숨을 쉴 때 혀의 움직임 같은 사소한 것들이 그를 매혹시킨다. 그에게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키리엘은 숀 시몬스라는 소년의 삶 속에 들어가 온갖 것을 전부 느껴보려고 한다. 하지만 그 범주가 살인, 테러 같은 죄악이 아니라 첫 키스부터 친구들을 괴롭히는 녀석에게 맞서는 것처럼 십대 소년의 욕망이 표현된 일이다. 숀이 아닌 타락천사 키리엘은 동생과 엄마에게 다정하게 대하기도 하고 약자를 위해 분노하기도 한다. 인간이 아닌 자가 인간으로 살면서 한 사람의 삶의 공간이 어떻게 연결되었는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단 3일 간의 일이지만 타락천사 키리엘의 모습은 악마라기보다 십대 소년의 숨은 용기와 욕망으로 보였다. 그렇게 치면 가끔은 자신의 몸속에 숨어 있는 타락천사가 숨을 쉬게 해줘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