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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근 돌의 도시 - 생각이 금지된 구역
마누엘 F. 라모스 지음, 변선희 옮김 / 살림 / 2009년 6월
평점 :
텔레비전은 그것이 가진 정보 전달력에도 불구하고 바보상자라는 비난을 들어왔다. 그도 그럴 것이 뿌려주는 정보의 양에 비해 흡수되는 양이 적고 비판적 상상력을 키워줄 여지가 적기 때문이다. 반면 책이나 음악은 상상의 여지가 있어 자유롭다. 읽거나 들을 때조차 다른 생각들이 끼어든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금지된 곳이 있다면 어떨까. 비주얼 비전이라는 텔레비전에서 방송하는 모든 것이 그대로 사실이 되어버리는 세계 말이다. 책이나 음악 같은 것은 모두 금지되어 있으며 생각은 극소수를 위한 세계, 이 책 <둥근 돌의 도시>는 그런 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묘사된 분위기가 밝은 것도 있지만 언뜻 보기에 그리 나쁜 느낌은 아니었다. 책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 책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생지옥이지만 전쟁도 범죄도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생각은 비주얼 비전 프로그램 제작자나 세계 대통령에 한한 것으로 보였다. 그들도 그리 사려 깊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멍청한 양 떼가 몰려다니는 평화로운 세계였다. 거리는 잘 정비되어 있었고 비주얼 비전에 보도되면 즉시 유행이 되었으며 대부분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거리를 한 남자가 달려간다. 정확하게는 내리막길이었다. 남자는 달리면서 환희에 차 있었다.
그 남자가 바로 이 책 <둥근 돌의 도시>의 주인공 카르멜로였다. 남자는 몇 가지 점을 제외하면 평범한 말단 공무원이었다. 하나는 내리막길을 보면 전속력으로 달리지 않고는 못 배긴다는 점이었다. 덕분에 몇 번이나 차에 치여서 병원 신세를 진 터였다. 그럼에도 내리막길을 보면 달리지 않고는 못 배겼고 달리는 동안은 행복의 절정을 느꼈다. 그런 그가 정신병원에 가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아버지가 '행성 간 업무부' 장관이라는 점이었다. 그래서 카르멜로는 평범하게 직장을 다니고 결혼을 고민 중인 연인도 있었으며 내리막길을 볼 때 마다 요리조리 장애물을 피해가며 달릴 수 있었다.
사거리마다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차를 능숙히 피해가며 카르멜로는 내리막길을 달려간다. 그런데 하나 서글픈 점은 내리막은 끝나는 곳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 점이 늘 아쉽다는 생각을 하며 카르멜로는 어떤 여자를 지나친다. 낯이 익은 여자였다. 그에게 말을 걸려는 것처럼 입을 벌리고 있었지만 그는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었으므로 곧 멀어졌다. 이제 그의 시야에 한 사람이 들어온다. 자신의 앞을 달리고 있는 사람이었다. 누군가 자신보다 먼저 내리막길의 끝에 도달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카르멜로는 달리는 속력에 박차를 가한다. 그러자 경쟁자를 따라잡을 수 있었는데 치졸하게도 앞서 가던 남자는 들고 있던 핸드백으로 그를 밀치려 들었다.
남자가 왜 핸드백을 들고 있을까에 대한 의문을 뒤로 하고 카르멜로는 남자의 공격에 방어한다. 그러다 우연히 핸드백을 빼앗은 후 차에 치이고 만다. 주의가 흐트러져 미처 피하지 못한 것이다. 평소에도 몇 번씩 치었던 차종으로 궁합이 안 맞기도 했다. 카르멜로는 익숙하게 병원에서 깨어나는데 이때부터 그를 둘러싼 세상이 변해 있었다. 말을 걸었던 것 같은 여자는 세계 대통령이었고 카르멜로가 되찾은 핸드백의 주인도 그녀였다. 앞서가던 남자가 멸종된 줄 알았던 범죄자였던 것이다. 이 일로 카르멜로는 영웅이 된다.
비주얼 비전에서는 그에 대한 것이 쏟아져 나오고 사람들은 무분별하게 그가 얼마나 잘생기고 매력적이며 뛰어난 영웅인지를 생각 없이 받아들인다. 심지어 세계 대통령조차 그랬다. 이 일은 파장을 더해가고 대통령 자리를 노리는 자들은 이를 기회로 이용한다. 세계 대통령만이 가지고 있는 둥근 돌 안에는 금지된 책이 있었고 이것을 둔 쟁탈전은 점차 열기를 더해간다.
책과 음악이 금지된 세계에서 둥근 돌을 둔기로 쓴 살인사건이 벌어진다. 음악은 고문의 수단이 되기도 하고 나오는 사람들은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다. 본인들이 진지해서 더 우스운 코미디 영화를 보는 기분이었다. 모두가 노리는 둥근 돌이 살인무기로 사용된다는 점, 카르멜로를 비롯해서 우스운 인물들과 헛웃음을 불러일으키는 반전이 즐거웠다. 더구나 이야기가 끝나는 줄 알았는데 에필로그, 에필로그 후의 이야기, Fin이라고 계속 이야기를 덧붙여 끝없이 이야기를 늘이는 작가의 재치에 한층 유쾌했다. 가장 우스웠던 점은 과장되긴 했지만 지금의 현실과 별반 차이가 없다는 점이었다. 오히려 현실에는 전쟁과 범죄가 버젓이 자리하고 있으니 현실이 더 나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