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선덕여왕
정진영 지음 / 징검다리 / 2007년 7월
평점 :
철학 수업을 진행하던 강사님이 유난히 들떠 보여서 이유를 묻자 박사 과정을 끝냈기 때문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제 더 이상 시험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하니 너무 좋다는 것이다. 제한이 없어진다는 것은 사람을 기쁘게 한다. 그렇다면 왕정 사회에서는 어떨까. 신분제의 사회가 앞을 가로막고 어디나 보이지 않는 벽에 닿고 만다. 공공연히 사람 위에 사람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왕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누구나 왕좌를 탐낸다. 야심과 그만한 세력이 있어 직접적으로 왕좌를 노리는 자도 있고 그저 고개 숙인 채 그 자리를 부러워하는 자가 있을 뿐이다.
물론 세계의 왕이 아닌 이상 국가 간의 알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지만 한 번 사는 인생인 이상 한 번쯤 권력의 최정점에 서보고 싶다는 욕심을 나무랄 수만은 없다. 그런데 왕이 된다는 것은 과연 좋기만 할까. 누구도 나에게 명령하지 못한다는 것은 한순간은 좋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풍요를 누리면서 좋아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른 사람 위에 선다는 것은 그만큼의 책임을 요구한다. 왕에게 특권이 있는 것은 그만큼의 무게를 짊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나라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것을 구성하는 것은 피와 살로 이루어져 있는 국민이다. 왕은 그 사람들의 기대와 희망을 품고 간다.
겉으로 드러난 화려함 만에 눈이 멀어 수많은 자들이 달려들지만 그 자리는 피로 뒤덮여 있다. 지키려는 자의 피, 빼앗으려는 자의 피, 국민들이 원하는 나라를 만들고 유지하기 위해 흘려야 하는 피로 말이다. 그래서 왕의 자리는 어렵기만 하다. 왕이 여성이든 남성이든 그 어깨가 무겁기는 마찬가지다. 이 책 <선덕여왕>은 그런 왕좌에 가까이 서서 왕의 딸로, 왕좌를 짊어진 채 왕으로, 자신이 짊어져야 할 것을 알기에 연인의 손을 놓고 쓸쓸히 죽어간 여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사실 백성의 입장에서 왕이 여자든 남자든 관계없다. 누가 자리에 앉든 상황은 그게 그것이므로 편안히 잘 살게 해주는 왕이 제일이다. 그런 왕이 되려면 좋은 사람들을 끌어 들일 줄 알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자여야 한다. 후에 선덕여왕이 된 덕만은 그런 자질을 품고 있었다. 앞일을 미리 예견하는 초인적 능력이 아니라도 상대의 마음에 공감할 줄 아는 능력, 영민한 머리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진평왕의 장녀로 태어나 일찍부터 후계자로 낙점 받고 제왕학을 배워간다. 그 가운데도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을 버리지 않는다.
다만 왕의 딸로 그리고 왕으로만 살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진지왕의 아들로 알려진 비형과 사랑에 빠져버린다. 진지왕의 아들이란 이야기도 왕이 죽은 뒤 귀신이 되어 만든 아이란 소문이 있을 뿐이었다. 일단 진평왕에 의해 벼슬이 내려져 있었지만 사위자리를 넘볼 수 있는 입장은 아니었다. 자신의 연인이 신분상 이뤄질 수 없는 자였기에 덕만은 선택을 해야 했다. 모든 기대를 저버리고 그와 떠날지 남아서 왕이 될지였다. 그러나 선택의 이전에 결말은 정해져 있었다. 그녀는 평생을 왕의 딸로 살아왔으며 왕좌의 무거움을 아는 자였기 때문이다.
책 <왕이 못 된 세자들>에서는 왕정 사회에서는 왕조차도 피해자일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렇게 치면 권력의 최정점에 선다는 것 역시 좋기만 할 수는 없는 것 같다. 사료가 적어 허구로 그 간극을 메우는 소설이지만 묘하게도 설화의 느낌이 강했던 책이다. 하지만 선덕여왕, 김유신, 알천처럼 역사 속 인물의 이야기를 읽는 기분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단지 성장하는 영웅, 좀 더 인간적인 왕을 만날 수 없었던 것은 조금 아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