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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티드 맨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11-1 ㅣ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11
존 르 카레 지음, 김승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소설 <일년 동안의 과부>의 주인공 루스 콜은 소설가로 나온다. 그녀가 매번 곤란해하는 점은 사람들이 그녀가 소설을 낼 때마다 전부 자전적 이야기로 받아 들인다는 것이다. 추리소설가 애거서 크리스티 역시 주변 사람들의 비슷한 질문에 곤란해 했다. 그녀의 소설 속의 등장인물이 하나같이 모델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자신이 그녀의 소설 속에 등장하게 될까봐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 '실화'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으면 좀 더 신기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경험하지 않은 것을 상상해서 쓰는 것이야 말로 '진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현실에 기반한 소설은 '가짜'에 불과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번 존 르 카레의 신작 <원티드 맨>은 둘 다를 만족시키는 책이다.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라는 책의 저자로 더 익숙한 존 르 카레는 기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냉전 시대에 영국 해외정보국인 MI6에서 일하며 첩보 활동을 했었다는 것이다. 첩보원이었던 저자가 창조해낸 스파이 스릴러라 사실감도 긴장감도 뛰어난 작품이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해도 될 지 주눅이 들 정도로 존 르 카레가 이미 거장의 반열에 올라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독일 함부르크를 배경으로 한 소설의 시작은 단순했다. 아직 혈기가 넘치지만 다정한 성품을 가진 청년 멜릭은 거슬리는 인물을 하나 발견한다. 어머니와 함께 외출하거나 혼자 돌아다닐 때 부랑자 하나가 계속 그의 앞에 나타난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이 야윈 몸에 눈빛만은 형형하게 빛나는 남자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가장이 되었으며 독일 시민권을 따려고 노력중인 멜릭의 눈에는 그저 성가신 대상이었다. 다른 때였다면 남자에게 상냥하게 말을 걸고 도움을 주려 했을지도 모르지만 웬지 남자의 눈빛이 묘하게 거슬려 멜릭은 그를 무시한다.
그런데 그 남자, 이사가 멜릭의 집 대문을 두드린다. 잠시 머무르게 해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멜릭은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아 그를 쫓아내려 들지만 남편이 죽은지 얼마 되지 않아 감정적인 그의 어머니 레일라는 이사를 손님으로 받아 들인다. 이제 불편한 손님을 맡게 된 멜릭의 눈에는 이사의 행동 하나하나가 거슬린다. 지나치게 멋을 부리는 말투, 앙상한 몸을 채울 것처럼 무섭게 먹어대는 식욕, 그러면서도 우월감을 느끼는 그의 눈이 짜증스러웠던 것이다. 피가 머리에 쏠린 멜릭은 이사를 몰아붙이고 그의 질문에 대답하던 이사는 앓아 눕고 만다.
손님을 홀대했다는 생각에 죄책감을 느낀 멜릭이 그가 머무는 다락방에 올라가자 이사의 앙상한 몸에 남겨진 상흔을 발견하게 된다. 비밀스런 사연을 품고 있는 이사는 고문을 당해서 '망가진 아이'였던 것이다. 결코 어른이 될 것 같지 않은 채 시간을 보낸 이사에게 멜릭은 이제 동정심을 느낀다. 그러나 멜릭과 레일라 모자가 감당하기에 이사는 너무 버거웠으며 그들은 한 단체에 도움을 요청한다. 단체에서는 러시아 어가 유창한 변호사 아나벨 리히터를 보내오고 아나벨은 이사가 자신이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의뢰인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자신도 바라지 않았던 상황에 태어나 수많은 알력에 휘둘려 온 한 남자가 함부르크에 나타난다. 그에 따라 독일, 영국, 미국 첩보부가 촉각을 곤두세운다. 그를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남자를 구하려 하는 사람은 힘없는 터키인 모자, 패배감에 시달렸던 독일인 변호사, 무료한 생을 살고 있던 영국인 은행가 뿐이다. 이야기는 걷잡을 수 없는 물살을 타고 이사는 보기에도 불안한 줄에 매달려 이리저리 흔들린다. 이야기의 끝이 나왔을 때는 잠시 멍해질 정도였다. 소설가 스티븐 킹은 소설을 쓰는 것은 집을 짓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렇게 치면 이 책 <원티드 맨>은 차곡차곡 집을 쌓아 올리고 마지막 순간 그 집 안에 들어갔을 때 그 집 안에 있던 어둠에 삼켜지는 기분이었다. 정의를 위한 정의가 구현되고 누군가는 울게 되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