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삶
쥘 미슐레 지음, 정진국 옮김 / 글항아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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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음양사>에서 가장 짧은 주는 이름이라고 하는 장면이 있다. 그저 살아 있는 동물이었던 것이 '개'라는 이름으로 묶여서 그 특징을 나타내고 '상구'라는 이름을 달고 친숙한 애완동물로 변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름을 갖느냐에 따라 존재는 그 이름에 묶인다. 한 예로 노파라고 지칭하면 마귀할멈까지는 아니라도 다소 추레한 늙은 여인이 떠오르지만 노부인이라고 하면 자태도 단정하고 우아한 부인이 떠오른다.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 특히 여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이름에 묶이는 일의 연속이다. 아기일 때는 자유로우나 소녀일 때는 얌전하고 수줍은 이미지를, 처녀가 되면 신선한 아름다움을, 숙녀는 우아하고 단정한 마음을, 부인은 넉넉하고 환한 다정함을, 과부는 쓸쓸하지만 초연한 아름다움을, 노파는 시간을 넘어선 강인함을 강요받는다. 실제로 얼마만큼 그럴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대체적인 시각은 그렇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변신을 거듭하거나 혹은 강요받으니 여자로 산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일본의 소설가 히가시노 게이고는 '여성이야 말로 미스터리'라고 했다고 한다. 여성이 휘감고 있는 본성도 있지만 사회와의 관계에 따라 변해가야 하기 때문에 그런 말이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듯 알 수 없는 여성에 대한 의문을 전작 <여자의 사랑>에서 소박한 여자와의 이상적인 사랑에 대한 말들을 쏟아낸 쥘 미슐레가 여성의 일생을 따라가며 풀어낸다. 그가 바라보는 여성은 전작과 마찬가지로 이상적인 여성이지만 사회와의 연관 관계 속에서 풀어내자 지난번과 달리 단순한 찬사라기보다 당시 시대 속에서 그가 최대한 여성을 존중하고 배려하려 한다는 것이 드러난다.

초반에는 그는 여성에 대해 말하고 결혼을 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여성의 노동에 대해 말을 꺼낸다. 산업 혁명 시기에 대부분의 노동자는 어려운 상황에 처했지만 자신의 손으로 벌어서 먹고 살게 된 여성 노동자의 경우에는 더했다. 남성 노동자는 40수를 받아 거칠지만 고기도 사먹고 술도 마시며 유흥도 즐길 수 있었지만 여성 노동자는 같은 일을 해도 10수를 받고 겨우 끼니를 때우는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도시에서는 굶주림에 시달렸고 시골에서는 노예처럼 일하면서 여성이 죽어갔다는 것이다.

그는 그런 상황을 안타까워하면서 여성의 일생을 따라간다. 정확히는 빈곤한 일생을 살고 있는 여성의 일생이 아니라 각 시기의 여성에 대한 찬사와 그녀가 살아갔으면 하는 이상적 일생에 대해 기술한다. 어린 소녀의 삶에 대해서 말하면서 그녀의 소중한 동무인 인형에 대해 말을 꺼낸다. 소녀가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인형이 세 번 부서지자 실의에 빠져 죽음을 맞았다는 이야기는 다소 우스꽝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각 시기에 사회가 여성에게 원하는 것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을 '보호'해야 한다고 '존중'해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는 것을 듣는 기분은 그리 나쁘지 않다.

더구나 그것을 말하는 글의 전체적 분위기는 아름다운 여성에 대한 반복적 찬사를 늘어놓는 것 같아서 술술 읽어나갈 수 있었다. 지금과 다르지만 같은 상황에 빠져 비탄에 빠지기도 하고 굳은 의지를 가지고 헤쳐 나가기도 하는 여성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시대에 따른 거리감을 느끼면서도 공감도 하게 되었다. 그가 말하는 여성은 이상적인 여성, 소박하지만 교양 있는 여자지만 그가 늘어놓는 말들이 거슬리기보다 달콤하게 느껴지는 것은 바탕에 사람에 대한 그리고 여성에 대한 애정이 깔려 있기 때문이었다. 남자로 사는 것도 마찬가지겠지만 여자로 사는 것은 정말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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