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인공들
아일린 페이버릿 지음, 송은주 옮김 / 민음사 / 2009년 6월
평점 :
절판


소설 책을 읽다보면 자신이 그 소설의 주인공인 것처럼 이입하게 될 때가 있다. 자신이라면 다른 방향으로 움직여 결말을 바꿔 놓았을 거라고 분개하기도 하고 주인공과 같은 심정을 맛보면서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책을 덮으면 모험은 거기에서 끝이 난다. 책을 읽는다는 것의 즐거움은 그런 곳에서 나온다. 평생 바뀔 일 없는 자기의 시각이 아니라 타인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 그래서 소설가 닉 혼비가 <닉 혼비의 런던스타일 책읽기>에서 번역서를 읽으면 '주파수가 맞지 않는 라디오를 듣는 것' 같다고 불평했는지도 모른다. 이입이 이루어지려면 작가의 호흡이 가깝게 다가와야 하는데 번역서로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입의 대상이었던 소설 속의 주인공들을 실제로 만난다면 어떨까. 어린 시절의 수다쟁이 앤이 튀어나와 같이 놀 수 있다면 즐거울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여주인공들은 지극히도 자기중심적이다. 더구나 비극의 여주인공들이 가장 어려운 시기에 튀어나와 잠시 쉬고 간다면 그리 기분 좋을 것 같지는 않다. 대부분의 소설이 그렇듯 그들은 너무나 아름답고, 소설 속의 인물을 실제로 만난다는 것은 흥분되는 일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끊임없이 자신의 고난만을 떠드는 인물과 같이 있는 시간을 진심으로 즐길 수 있을까.

바로 이런 일이 이 책 <여주인공들>의 주인공인 페니에게 일어난 일이었다. 아름다운 숲이 뒤편에 펼쳐진 민박집 프레리 홈스테드에서 살고 있는 페니의 일상은 대체로 평화로운 편이었다. 요리사인 그레타 아줌마의 솜씨는 뛰어났으며 엄마가 강압적인 성격인 것도 아니었다. 단 하나 문제되는 것이 있었다면 홈스테드에는 수시로 '여주인공들'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스칼렛 오하라나 보바리 부인 같은 소설 속의 여주인공들이 홈스테드에 가끔 출몰했다. 그들은 갑자기 나타났으며 얼마간 쉬다가 갑자기 사라졌다. 현대의 복장으로 나타났기에 그 책을 읽지 않았다면 잘 알 수 없기는 했다. 하지만 여주인공들은 지독히도 자기중심적이었고 끊임없이 자신의 이야기만을 쏟아냈다.

그런 여주인공들이 나타날 때마다 엄마는 모르는 척하고 적당히 맞장구를 쳐줄 뿐이었다. 엄마는 대단한 독서광이었으므로 여주인공들이 어떤 책에서 어떤 부분에서 나왔는지 대화의 내용으로 대강 짐작이 가능했다. 그러나 결코 그들의 운명을 바꾸려 들지는 않았다. 달래주고 위로하고 비위를 맞춰줄 뿐이었다. 엄마의 여주인공들에 대한 애정은 대단한 것이어서 페니는 가끔 자신보다 그들이 우선시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느낌이 절정에 달한 것은 페니가 13살이 되어 사춘기를 겪고 있기도 했지만 어느 책에서 튀어나왔는지 알 수도 없는 데어드르가 그녀의 방을 빼앗아 갔기 때문이다.

데어드르는 계속하여 울고 신세한탄을 하는 등 시끄럽게 굴어서 다른 손님들이 불평을 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엄마는 데어드르를 손님방에서 먼 곳으로 옮겨 주었는데 그 곳이 페니의 방이었던 것이다. 페니의 엄마는 심지어 페니에게 의견을 묻지도 않았다. 페니는 분노에 차서 밤에 숲으로 산책을 나간다. 밤의 숲은 위험하다는 엄마의 경고를 일부러 무시한 것이다. 페니는 머릿속으로 온갖 분노의 말을 내뱉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말이 달려오는 것 같은 소리였다. 주변을 둘러보자 웬 말에 탄 남자가 페니를 쫓고 있었다. 남자의 용건은 간단했는데 데어드르를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데어드르조차도 어느 이야기에서 나온 지 알 수 없으니 남자가 악당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페니의 모험이 이제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페니가 사는 곳 프레리 홈스테드는 상당히 신기한 공간이다. 책 속의 인물들, 주로 여주인공이 나타난다는 것만 해도 그렇다. 거기에 그런 인물들과 아무런 위화감 없이 지내는 페니, 페니의 엄마 앤마리, 요리사 그레타 아줌마도 대단하다. 페니의 일상은 여주인공들이 들락날락 하면서 점점 꼬여 간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세 사람만의 비밀이 데어드르와 그녀를 쫓는 코노르의 등장으로 사건으로 발전해간다. 여주인공들에게서 엄마의 사랑과 자신의 위치를 되찾고 싶은 소녀의 질투, 여주인공을 쫓아온 남자 주인공에 대한 동경 등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인 터라 읽으면서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지나치게 이입했기 때문이다. 페니의 앞날이 어떻게 될 지 궁금해서 책을 내려놓을 수도 없었고 안절부절 못하면서 읽어나갔다. <잉크스펠>처럼 책 속에 들어가 보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여주인공들>처럼 일상 속에 여주인공들이 튀어나오는 것은 사양하고 싶다. 그들의 강렬한 개성에 밀려서 자신이 밋밋하다는 것을 실감하게 될 것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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