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쥐
박찬욱 외 지음 / 그책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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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드라마 '멘탈리스트'를 좋아하지만 들을 때마다 가슴이 서늘해지는 대사가 있다. 사후세계 같은 다른 세계는 없으며 죽은 후에는 경기 종료가 선언된 것과 마찬가지로 그냥 끝이라는 것이다. 생명의 유한성은 사람을 멈칫거리게 한다. 그 생각만 하면 몸 안의 생체시계가 똑딱거리면서 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한 시도 낭비할 시간이 없고 그로 인한 번뇌로 다시 고민을 하게 되는 무한 반복의 궤도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일까. 많은 사람들은 귀신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한다. 살아 있을 때의 기억은 점차 잊혀지겠지만 살아있을 때와의 연장을 계속 맛볼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뱀파이어'는 매혹적인 소재다. 그들은 늙지도 죽지도 않으며 귀신처럼 실체가 불분명하지도 않다. 자신의 정체성을 그대로 가진 채 변화한 존재인 것이다. 덕분에 여기저기서 뱀파이어를 인류보다 진화된 존재로 묘사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을 죽이는 것이 두려운 것은 그로 인한 벌보다 손에 피를 묻힌 후의 자신은 이미 지금 그것을 상상하는 자신과는 상이한 존재가 된다는 점에 있다. 피를 마셔야만 살 수 있는 흡혈귀가 과연 예전의 자신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인간이었으나 인간이 아니게 되었고 그들 속을 걷지만 그들의 피를 마셔야만 할 수 있는 자. 같은 것은 늙지도 죽지도 않는 육체뿐이지만 그 육체도 이미 죽은 자의 것이며 그것을 구성하는 것은 이질적인 존재다.

그렇기에 많은 뱀파이어는 고뇌하는 것으로 나온다. 주로 선한 뱀파이어에 한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 책 '박쥐'에서도 뱀파이어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그 주인공인 뱀파이어의 직업이 신부다. 뱀파이어를 악으로 한정한다면 그 악을 멸하는 자가 흡혈귀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의 처음 의도는 선한 것이었다. 아픈 자를 돕고 싶어 금지된 인체실험에 지원했고 병에 걸렸다. 그는 죽음을 맞았지만 다시 살아나고 오직 그만이 죽음에서 돌아왔기에 신도들은 그를 성자라고 불렀다.

하지만 당사자인 상현은 달갑지 않았다. 자신의 무엇인가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를 성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조차 내심 상현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두려움을 경외감으로 포장했을 뿐이었다. 팽팽한 긴장감이 누르는 가운데 상현은 자신이 흡혈귀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자신을 감싸고 있었던 이질감은 피에 대한 갈증이었다. 더구나 그는 이미 한 번 전염병으로 죽었던 자였고 피를 마시지 않는다면 육체가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게 되어 있었다. 예전의 그였다면 사람의 피를 마시느니 죽는 쪽을 선택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상현은 그리고 그의 억눌렸던 욕망은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여태껏 억눌렀던 만큼 새어 나오는 것인지 자신이 짐승이 되었음을 빙자해 욕망을 제어하지 않으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분명 경계에 있었다. 자신이 구하려던 자의 피를 마시기 시작했을 때 그는 경계를 넘었다. 그리고 어린 시절부터 마음에 품고 있던 여자 태주를 만나고 난 이후 그는 나락으로 떨어져 내린다. 평생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욕망을 억눌러왔던 남자와 여자가 만나고 모든 경계가 무너져 내린다. 그 이야기는 뱀파이어란 소재를 빌려서 나왔지만 그것은 단지 단초가 되었을 뿐이었다.

그들은 이미 한계에 있었던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억눌린 채 자라 다른 방식으로 사는 것을 알지 못했던 그들이었다. 만약 흡혈귀가 되는 것이 아닌 다른 방식에 눈을 떴어도 그들의 욕망은 새어 나왔으리라. 그리고 욕망을 누르는 것만 배워왔지 적절히 충족시키는 것을 배워본 적이 없는 상현과 태주는 욕망을 마구 충족시킬 수 있는 위치에 오자 멈출 수가 없어진다. 눈덩이가 구르기 시작한 이상 끝에 도달할 때까지 갈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그렇듯 갈증은 결코 채워질 줄 모르고 제어할 수 없는 욕망은 파멸의 전주곡이 된다. 생각해보면 '박쥐'는 기묘한 소설이다. 읽을 때는 잔혹한 묘사가 많아서 진저리를 치게 되면서도 다 읽고 난 이후에는 온 세계가 눈으로 덮인 것을 보는 기분이 된다. 그 안에는 수많은 욕망이 부서져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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