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슴남자 - The fantastic Deer-Man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22
마키메 마나부 지음, 권일영 옮김 / 작가정신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소설 '광골의 꿈'에서는 사람의 얼굴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여자가 등장한다. 눈도 코도 입도 각각은 볼 수 있지만 조합해서 하나의 얼굴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자는 사회생활을 거의 하지 않고 은둔생활을 하는 편이라 초반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여자에게 원한을 가진 자가 나타나자 상황은 급변했다. 그리고 그녀가 얼굴을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은 치명적인 약점이 되었다. 사람에게 얼굴은 단순한 신체 기관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영화 '다크나이트'의 하비 덴트를 광기에 사로잡히게 한 것은 자신의 얼굴이 망가진 것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물론 자신의 약혼자가 죽게 된 데에 대한 분노도 있지만 자신의 얼굴이 무너져 내리지 않았다면 자아를 잃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사람의 얼굴이 타인과의 교류에 크게 작용하기도 하지만 자신에게도 하나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 '사슴남자'에서는 말 그대로 얼굴이 사슴으로 변해가는 남자가 등장한다. 결코 자신이 바란 바가 아니었으며 사슴이 남자에게 표시를 했기 때문이다. 결국 자아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얼굴을 되찾기 위해서는 사슴이 해달라는 데로 해줘야 했다.

'사슴남자'는 동명 드라마의 원작이기도 하지만 2대 교토작가로 불리는 '마키메 마나부'의 소설이다. 소심한 한 남자가 사슴에게 선택되어 신의 보물을 찾아야 하고 그 과정에서 사슴처럼 얼굴이 변해간다는 특이한 소재를 쓰고 있다. 판타지와 코믹 로맨스의 경계를 적절히 넘나들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나라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향토색과 코믹함이 잘 버무려져 있다는 느낌이었다. 진하지 않고 은은한 먹을거리를 씹는 기분이 들었다.

이야기는 주인공 '나'가 여학교에 임시부임을 받으면서 시작된다. 원래는 대학연구실에서 연구를 하는 입장이었지만 동료의 자료를 날려 중요한 승진 기회를 날리면서 심각한 문제를 겪게 된다. 조교와의 불화로 인해서 신경질적이 되던 그는 자신의 실험에서조차 실패하고 갈등은 극에 달한다. 이에 지도교수님은 그가 신경쇠약이라고 판단하고 환경을 바꿔보라고 권한다. 정확하게는 지난 번 조교수 승급에 실패한 조교가 새로운 기회를 얻게 되었는데 '나'가 쓰던 기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연구실에 한 대뿐인 기자재가 필요하니 그가 밀린 것이다.

칙칙한 연구실을 벗어나 활기찬 여고생들의 틈새에 있다 보면 좋은 영향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핑계였지만 그건 여고생의 심술 맞음을 모를 때 이야기였다. 여자 고등학교의 실태를 알았다면 신경쇠약으로 의심되는 청년을 요양차 밀어 넣는 짓은 하지 않았으리라. 그는 별 수 없이 교수님의 친구가 교장으로 있는 여고에 임시교사로 부임한다. 그런데 첫 날 부터 쉽지가 않았다. 지각한 여학생이 도리어 그에게 대들었고 다음 날 부터는 급우들을 선동해서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의 가냘픈 신경은 쉴 날이 없었고 점차 짜증을 낸다. 거기에 자신이 정말 미친 것이 아닌가 의심할 만한 상황이 발생한다. 그의 앞에 말하는 사슴이 등장한 것이다. 그는 당연히 미친 듯이 도망친다. 자신을 적대시하는 여학생과 말하는 사슴, 약한 신경이 그를 압박하는 와중에 더 끔찍한 재난이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말하는 사슴을 도와 재난을 막아야 하고 그로 인해 사슴의 얼굴이 되어가는 남자의 이야기라니 신선한 느낌이었다.

소심한 것으로는 나라 최고인 남자가 세상을 구하고 그 와중에 자신도 구하는 상황에 빠진다는 설정이 마음에 들었다. 사슴 센베이를 맛있다며 사슴과 나눠먹는 주인공에 실소를 터뜨리기도 하면서 읽은 터라 그가 빠진 지경이 그리 위험해보이지는 않았다. 알아서 잘 흘러가리라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강렬한 맛이 남는 소설은 아니었지만 은은하게 입에 맞는 책이라 더욱 좋았다. 나라에도 언젠가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슴에게 센베이를 주면서 혹시 말 못하냐고 물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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