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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못 된 세자들 ㅣ 표정있는 역사 9
함규진 지음 / 김영사 / 2009년 3월
평점 :
품절
사람은 평생 많은 역할들을 수행하면서 살아간다. 보통 그 역할들은 어린 시절보다 나이 든 이후에 많으며 한 역할이 끝나야 다른 역할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태어난 순간부터 자신이 맡은 역할에서 자유롭기는 어렵다. 태어난 순간 누군가의 자식이며 누군가의 형제이고 자라면서 학생이나 직업인, 누군가의 배우자 같은 역할들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한 개인은 수많은 역할을 동시에 가지고 있고 그 역할들이 서로 부딪힐 때 그것을 역할 갈등이라고 부른다.
개인 속에 숨어 있는 수많은 역할들은 각각의 가치를 부여받고 있기 때문에 종종 부딪히고 그것은 문제가 된다. 하지만 그로 인해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경우는 좀처럼 없다. 단지 조금 더 피곤해질 뿐이다. 그런 상황이 조선 시대 세자에 한해서는 통용되지 않았다. 그들은 한 사람의 아들이기에 앞서 권력의 제2인자였고 권력을 얻지 못한다면 목숨조차 부지하기 어려웠다. 그 모든 일들은 왕에게 권력이 집중된 구조에 의한 것이었다. 간신을 다룬 어떤 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 간신도 충신도 왕에게 권력이 집중된 상황에서 나온 것뿐이며 전부 희생자라는 것이다. 권력의 정점에 선 왕도 그 예외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왕의 후계자로 지정된 세자도 왕에게 집중된 권력구조의 희생양일 것이다. 이기지 못하면 목숨을 잃는 절박한 게임에 휘말린 사람이기 때문이다. 물론 권력이 집중된 상황이니 무더기처럼 많은 민초보다 그들은 혜택을 받는 입장이었다. 후에 청에 끌려간 소현세자가 탄식을 하는 말을 들어보면 예전에 먹었던 진수성찬을 그리워하는 것이 드러난다. 권력의 최상층이 아니고서야 그런 음식을 감히 맛보지도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구나 부러워하는 자리에 있지만 실상은 쓸쓸할 수밖에 없던 세자들의 이야기는 분명 흥미로운 것이었다. 이 책 '왕이 못 된 세자들'에서는 조선시대의 세자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초반에 왕의 아들이기에 앞서 권력의 제2인자로서의 역할을 해야 했고 그로 인해서 왕의 의심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던 구조상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비운의 세자들에 대해서 하나하나 짚어주고 있다. 세자제도는 왕의 아들 중에 왕이 될 만한 자질을 가진 자를 후계자로 선택하는 제도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막내아들이 되어도 큰 문제가 없겠다 싶지만 호랑이 같이 버티고 있는 장자를 제외하고 젖먹이 아이에게 세자 지위를 준다면 그 아들에게 사형선고를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어지간히 눈 밖에 난 아들이 아니고서야 장자가 받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세자제도의 초기부터 이미 문제가 드러난다. 제일 처음 세자가 된 의안대군 이방석은 형의 손에 죽음을 맞는다. 역사는 항상 승자의 것이니 후에 그 치부가 덮어지기는 했으나 이방원이 배다른 동생을 죽인 것은 지워지지 않는 사실이었다. 태조 이성계는 건국에 가장 공이 있는 아들이 아니라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세자로 세움으로써 불화의 씨앗을 공공연히 퍼뜨린 셈이었다. 그 결과는 조선시대 최초 세자의 죽음으로 돌아왔고 태생부터 문제가 있었던 세자제도는 마지막 세자조차 왕이 되지 못하고 쓸쓸한 죽음을 맞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권력은 십년을 못 간다고 하지만 어느 정도 힘이 있는 자는 대부분 권력을 탐한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바라던 권력을 잡았을 때 그들이 가지고 있던 곧은 이상 따위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그런데 조선시대 세자제도는 그런 왕에게 위협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아들로만 본다면 그 아이가 귀여울 것이다. 또한 자신이 죽은 이후에 분란이 일어나지 않고 아들이 자신의 뒤를 잘 이어 나라를 다스리길 바랄 것이다. 허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죽은 다음이지 자신이 버젓이 살아 있는 동안에 세자에게 자신의 권력이 나눠지는 것을 달가워할 왕은 없다. 그런 왕이었다면 이미 폐위되었거나 권력의 정점에 서는 자리 자체를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반면 세자는 태어나서 왕이 되도록 고된 공부를 해왔고 아버지이기 이전에 권력의 제1인자의 역할로 눈을 빛내는 왕의 눈치를 보려니 미칠 노릇이었다. 세종처럼 학문에 관심이 있는 세자라면 괜찮겠지만 무인 기질이 있는 세자는 더한 시련을 맞았다. 양녕대군은 아버지로서의 이방원에게 사랑을 받았지만 태종 이방원에게는 눈의 가시였던 것이다. 무인 기질을 누르지 못하고 문제를 일으킨 데다가 왕인 자신이 꾸짖으니 대드는 아들을 가만히 바라볼 태종이 아니었던 것이다.
권력을 탐하는 입장에 선 부자관계는 평탄할 수 없었다. 세자의 경우 권력을 잡지 못하면 죽음을 맞을 확률이 크니 권력을 추구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부왕과 부딪히니 또 문제가 생겼던 것이다. 책에서는 이처럼 조선시대 왕이 되지 못한 세자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부왕과 다툼에 의해 내쳐진 세자부터 시대의 소용돌이 휘말린 세자, 병으로 요절한 세자들까지 말이다. 누구나 고민은 가지고 있는 법이다. 허나 태생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세자들의 고민은 역사 속에 묻혀 갔고 그들은 속절없이 죽어갔다. 승자의 역사가 아니라 그늘 속에서 죽어갈 수밖에 없었던 세자들의 입장에서 다룬 조선역사라는 점이 특색 있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권력의 그늘에서 태어나지 않은 것이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권력이 집중된 사회구조 안에서는 상류층이든 하류층이든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