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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다 1
미우라 시온 지음, 윤성원 옮김 / 북폴리오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수영이 한창 주목을 끌게 되었을 때 들었던 생각은 저처럼 힘찬 동작으로 물살을 가르는데도 정작 달리는 것보다 속도가 느리다는 것이었다. 인간탄환이라고 불리는 육상선수조차 평범한 동물보다 빠르기 힘들다. 빠른 것만 생각한다면 인간의 몸은 동물을 이기지도 기술의 진보를 따라가지 못했다. 아무리 빨리 달려도 자동차나 비행기보다 빠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빠른 사람에게 잠깐의 감탄은 던져도 감동하지도 관심을 갖지도 못했다. 어른이 될 수록 달린다는 행위에서 멀어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힘껏 단거리를 달려도 발 빠른 아이를 따라 잡지 못했고 심장이 아프도록 달리는 행위에도 관심이 없었다. 아이도 어른도 아닌 어중간한 상황이 된 지금에 와서도 정신은 정신없이 달릴지언정 육체적 달리기에는 관심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두 권의 책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다'를 읽고 나니 문득 달려보고 싶어졌다. 책을 읽어나갈 수록 심장은 빠르게 뛰기 시작하고 잊었던 감각이 돌아오는 것 같은 기분을 맛보게 되었다.
이 책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다'는 독특한 청춘소설이다. 하코네 역전경주라는 생소한 소재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여태까지 만화, 게임, 드라마, 영화를 통해 일본을 꽤 익숙하게 생각했는데도 처음 들어본 말에 머리가 갸웃해졌다. 하코네 역전경주는 일본에서 신년에 하는 장거리 경기라고 한다. 참가자는 대학 육상선수들이며 참가에는 기록도 필요하다. 거기에 참가횟수의 제한도 있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 20킬로미터를 넘게 달리며 열 사람이 달린다고 한다. 장거리 계주인 셈이다. 그런데 심지어 이 경기가 열리는 장소는 산을 끼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치면 엄청난 고난을 휘감고 있는 경기라고 할 수 있었다. 일반인이 감히 엄두도 낼 수 없을 정도였던 것이다. 경기는 신년에 생중계되고 관심도 꽤 높다고 했다.
이야기의 주요인물인 가케루는 기요세라는 기묘한 인물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하코네 역전경주에 나가게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둘이 만나게 된 것은 배고픈 가케루가 편의점에서 빵을 훔쳤기 때문이었다. 마침 목욕탕에서 나온 기요세는 자신을 지나쳐 달리는 청년을 멍하니 바라본다. 달리는 모습이 그를 매료시켰기 때문이다. 기요세는 자전거를 타고 청년을 쫓아간다. 가케루는 가케루대로 지친 상태였다. 폭력 사태를 일으켜서 육상부를 그만두게 되었지만 그는 달리는 것 말고는 잘하는 것이 없었다. 하고 싶은 일도 없었다. 달리는 일은 그에게 호흡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도망치듯 들어오게 된 대학까지는 좋았지만 이곳에 온 첫날 마작으로 가지고 있던 돈을 다 날렸고 노숙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 와중에도 훈련을 그만두지는 못했는데 익숙하게 달리다보니 배가 고파졌고 그래서 빵을 낚아채 도망쳤던 것이다. 이래서야 짐승이나 마찬가지라고 자신을 한탄하던 와중에 누군가 쫓아오는 기척을 느꼈다. 그런데 상대의 태도가 이상해서 잠시 페이스를 늦추자니 낯모를 청년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달리는 걸 좋아하냐고 말이다. 가케루가 놀라서 멈추자 기요세는 갑자기 달리는 것은 좋지 않다면서 그를 다시 달리게 한다. 천천히 속도를 늦추고 호흡을 가다듬자 기요세는 가케루에게 다시 말을 건다. 그리고 사정을 듣더니 파격적인 가격의 아파트 지쿠세이소를 소개해주겠다고 한다. 어쩌다보니 가케루는 그에게 이끌려 가고 낡아서 언제 무너질지 알 수 없는 지쿠세이소에서 살게 된다.
기요세가 무슨 생각으로 자신을 도와주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노숙과 배고픔에 지쳐 일단 따라갔던 것이다. 하지만 분위기는 의외로 자유로웠고 점차 지쿠세이소 사람들에게 익숙해져 간다. 가케루가 지쿠세이소에 익숙해지자 기요세는 지쿠세이소의 주민을 모아놓고 공개선언을 한다. 지쿠세이소의 주민 10명과 함께 하코네 역전경주에 출전하겠다는 것이었다. 그 소리를 듣고 육상선수 출신이지만 지금은 그만둔 애연가 니코짱, 운동이라고는 모르는 만화수집가 왕자, 축구를 한 적이 있을 뿐인 쌍둥이, 퀴즈를 좋아하는 소심남 킹, 이공계 유학생 무사, 산골소년 신동, 검도 경험만 있는 유키까지 전원이 반대한다.
하코네 역전경주는 신년에 텔레비전으로만 보는 것으로 만족했던 일동이었던 것이다. '한 명만 더'라는 소리를 입에 달고 살면서 지쿠세이소가 가득 차길 기요세가 기대하고 있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런 대책 없는 말을 내뱉을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가케루도 초심자를 모아서 하코네 역전경주에 나가겠다고 하는 기요세의 말에 아연해진다. 그런 이유로 자신을 끌어 들였나 싶은 생각도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화가 나지는 않았다. 기요세에게서 자신이 바랐던 무언가를 보았기 때문이다.
모두는 육상에 지식이 있는 가케루가 기요세를 말려주길 바랐지만 지쿠세이소의 실질적 지배자인 기요세를 막는 것은 무리였다. 그도 그럴 것이 지쿠세이소의 주민 중에서 기요세의 덕을 보지 않은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지쿠세이소가 값싼 방세를 자랑하기도 했고 분위기도 자유로워 그 곳을 떠나기 싫다는 생각도 컸지만 매일 아침과 저녁을 해주는 기요세의 말을 거부하는 것은 어려웠다. 결국 지쿠세이소의 주민들은 기요세의 강권에 밀려 훈련에 나선다. 초심자 8명과 달리고 싶었지만 달리지 못하게 되었던 기요세, 달리는 것만이 전부인 가케루의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이야기 자체는 딱히 누가 주인공이랄 것 없이 전개되지만 실질적 주인공은 가케루와 기요세였다. 오직 달리는 것밖에 모르고 다른 사람들과 어울릴 줄 몰랐던 불안정한 가케루는 기요세를 만나 점차 변해간다. 반면 달리는 삶 밖에 몰랐지만 달리지 못하게 되었던 기요세는 자신의 상처를 딛고 일어섰기에 가케루를 지탱할 힘을 가지고 있었다. 기요세는 가케루에게서 자신의 꿈을 본다. 달리는 것 밖에 모르는 가케루와 달리지 못하는 고통을 아는 기요세는 서로를 지탱하고 두 사람의 만남은 서로를 변화시킨다. 그리고 그와 함께 지쿠세이소의 주민들도 그 바람에 휩쓸린다.
불안정한 주인공이 점차 성장해나가고 불가능할 줄 알았던 도전을 하게 된다는 전개 자체는 도식적이었다. 하지만 책을 읽어나갈 수록, 지쿠세이소의 주민들이 온 힘을 다해 달릴수록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손과 발이 땀으로 흥건해지고 흥분으로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계속 달린다. 이야기가 끝에 도달할 때까지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결말이 궁금해서 좀 더 빨리 읽지 못하는 자신이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덕분에 두 권 합해서 700페이지가 넘는 책을 4시간 만에 읽어 내렸다. 그리고 다 읽은 이후에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어린 시절 이후 잊고 있었던 달리는 즐거움을 되새기게 해주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빠른 것이 아니라 '강인함'을 품고 있는 그들의 모습에 감동했기 때문이다. 오랜 만에 심장을 뒤흔드는 소설을 읽게 되었다. 달린다는 단순한 행위가 이토록 아름답고 강인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만으로도 기뻤다.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은 그 덤인 셈이었다. 책을 덮은 지금은 다시 어린 시절처럼 달려보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