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이유 미래인 청소년 걸작선 5
멕 로소프 지음, 김희정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09년 2월
평점 :
품절


한때 미국 드라마 '제리코'가 테러와 관련해서 화제가 되었다. 하지만 정작 그 드라마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정체불명의 위협으로 인해서 사람들은 고립된다. 그런 경우 가장 위험한 것은 무엇일까. 사람들을 죽이려는 알 수 없는 적일수도 있지만 식량문제였다. 전쟁이 터지면 생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전쟁터로 내몰린다. 그리고 예전이라면 모를까 도시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급자족으로 먹고 살지 않는다. 자신의 시간과 노동력을 팔아서 그 대가를 얻고 화폐단위로 지급된 대가를 써서 먹을 것을 사는 것이다.

하지만 전쟁이 터진다면 그 흐름은 단절된다. 당장 먹을 것이 없는 것이다. 스티븐 킹의 소설 '스탠드'에서도 흐름은 단절되었지만 전염병이 돌면서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었고 도처에 널린 가게에서 물건을 꺼내 올 수 있었으니 주인공들이 먹을 것으로 고통 받는 장면은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기존의 인구수는 그다지 줄어들지 않은 상황에서 흐름이 끊기면 사람들은 식량난에 시달리게 된다. 이 책 '내가 사는 이유'에서도 주인공은 그런 일에 휘말린다. 전쟁이 터지고 식량난에 시달리는 것이다. 그런데 묘한 것이 그런 고통을 겪는 주인공이 거식증을 앓고 있는 15세 소녀란 점이다. 먹는 것을 거부한 소녀가 먹을 것을 찾기 어려운 세계에 떨어지다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야기의 처음은 안온하게 시작되었다. 새어머니와의 불화로 갑작스레 이모와 살게 된 데이지는 공항에서 사촌 에드먼드를 만난다. 에드먼드는 차를 몰고 데이지를 데리러 왔다고 했다. 엄마가 바빠서 자신이 대신 왔다는 것이다. 익숙한 태도로 담배를 입에 무는 에드먼드를 보며 데이지는 아연해한다. 그도 그럴 것이 에드먼드는 14살이었던 것이다. 미국에서 영국으로 온 터라 자신이 모르는 문화차이가 있을 지도 몰라서 데이지는 더 이상의 언급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팬 이모의 집에 도착하자 고즈넉한 집이 있었다. 온갖 동물들이 널려 있는 농장에 가까운 집이 말이다.

그렇게 데이지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에드먼드를 포함한 그 집 식구들은 좀 특이한 데가 있었다. 자유방임으로 아이들을 키우는 팬 이모나 맏이인 오스버트는 그렇다고 해도 막내딸인 파이퍼는 숲 속의 요정 같았고 에드먼드와 쌍둥이인 아이작은 동물과의 소통에 더 능했으며 에드먼드는 사람의 마음을 그대로 읽는 것 같았다. 뉴욕에서 살던 신경질적인 소녀가 이상한 나라에 떨어진 것이다. 그 곳에서는 아무도 데이지가 먹지 않는다는 것을 비난하지 않았고 그저 지켜봐주었다. 굳이 말하면 막내인 파이퍼를 포함해서 데이지를 애지중지하는 분위기였지만 말이다.

사촌인 에드먼드와의 기묘한 교감이 이루어지지만 전반적으로 데이지의 삶은 평온하게 흘러간다. 허나 팬 이모가 중요한 회의차 외국으로 잠시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영국에 전쟁이 터진다. 돈이 있어서 식료품 가게에 가서 음식은 일단 사올 수 있었지만 아이들뿐인 집의 생활은 불안정한 것이었다. 갇혀버린 세계에서 아이들은 자신들만의 평화를 지켜나간다. 즐겁지만 불안한 공기가 흥분을 타고 흐르는 세계였다. 그 세계가 깨어진 것은 어느 의사가 그들의 집에 방문한 이후부터였다. 아이들만 사는 집이란 이유로 군인들이 머무를 장소로 선택된 것이다.

이제 아이들은 서로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막내 파이퍼와 행동을 같이 하게 된 데이지는 연인이 되어버린 에드먼드와 기약 없는 이별에 빠지게 된다.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한 얼음판 위의 삶을 살게 된 아이들은 자신들만의 평화를 찾기 위해 먼 길을 걷게 된다. 나라가 고립되고 정체불명의 적군이 침입한 세계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라 숨을 죽이고 읽었다. 처음 주인공이 거식증에 걸린 소녀가 그 소녀가 사촌과 사랑에 빠진다는 시점까지는 그저 평범한 연애소설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전쟁이 끼어들면서 이야기는 전혀 다른 국면을 맞는다.

거식증에 걸린 소녀가 누군가의 보호나 치료의 대상이 아니라 신비한 힘을 품은 사촌들은 돕기 위해 성장해 나가는 것이 오히려 인상적이었다. 먹을 것이 부족한 세계에서 먹지 않는 소녀가 진행시키는 이야기라는 점도 독특했다. 소녀는 살아남기 위해서 경계를 넘고 점차 성장해나간다. 그렇게 안정을 찾는 것만 같았던 이야기가 또 한 번의 뒤집힘을 보이는 것은 기대 이상이었다. 읽으면서 말 그대로 시간 가는 줄을 몰랐고 읽은 후에 여운이 굉장히 길어서 몇 번이고 다시 책을 뒤적거렸다. 다시 읽고 싶은 마음이 계속 생겼던 것이다. 독특한 설정, 매혹적인 필치가 인상적인 '내가 사는 이유' 정말 마음에 들었다. 이야기를 끌어가는 솜씨도 매듭을 짓는 솜씨도 뛰어나서 당분간 이 이야기를 머릿속에서 내려놓기 어려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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