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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지 파트너
한정희 지음 / 민음사 / 2009년 1월
평점 :
그 사람이 가진 성향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사람의 인생 속의 시간은 각기 다른 속도로 흘러간다. 유년기는 성장에 정신이 팔려서 나비를 쫓아가는 어린 아이처럼 그저 흘러가버린다. 청소년기만 해도 어른이 되서 몸살이 날 정도이든, 어린 시절을 좀 더 누리고 싶든 지겹지만 잘도 넘어간다. 반면 어른이 된 이후의 시간은 손에서 모래가 흘러나가는 것과 같다. 그것과 함께 하나의 거대한 충격이 온다. 자신이 유한한 시간을 살아가고 자신이 살아온 만큼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애써 외면하게 되는 이 사실은 나이를 먹을수록 무게를 더해간다. 한 해의 마지막은 대개 후련하기보다 씁쓸한 기분이 들 때가 많다. 이번 한 해만은 알차게 보내겠다고 생각했는데 지난해와 같은 기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암담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사실 시간을 충실하게 보낸다는 것은 무리한 일이고 현재를 살라지만 인생의 절반이 지날 무렵에 우울함이 생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외면을 하든 체념을 하든 그것은 자신의 선택이지만 이도저도 하지 못한 사람들은 극단적인 선택의 상황에 빠져들기도 한다.
우울한 회색지대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하얀 종이위에 재현한 것이 이 책 '브리지 파트너'다. 책은 일곱 편의 단편소설로 이루어져 있는데 첫번째 이야기부터 심상치가 않다. 주인공은 자신이 목을 맬 튼튼한 벨트를 찾은 이후 그 벨트를 목에 건 상태로 어디에서 목을 매야 할까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집 안에 자신의 무게를 지탱할만한 튼튼한 장소가 없다고 생각한다. 지난 번에 살던 집의 상들리에라면 자신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텐데 이사해서 아쉽다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자신의 모습이 우습다는 것을 알고서도 자살을 하려는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는 그녀에게 전화가 한 통 걸려온다. 오래 전에 미국으로 이민을 간 친구였다. 친구는 그녀가 미국으로 여행을 왔을 때 자신을 만나러 오지 않은 것이 섭섭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루게릭 병에 걸린 다른 친구의 소식을 물어온다. 그 때 주인공의 머릿속에 세 명이 마지막으로 모였던 것이 떠오른다. 세 명은 미국으로 이민간다는 윤희때문에 모였었다. 그 장소에서 현임은 자신이 루게릭 병에 걸렸다고 고백했다.
그 때 그녀는 '죽어버리라고, 너에게 시련을 준 절대자 앞에서 오만한 모습으로 그냥 죽어버리라고' 말했다. 잔인한 말이었지만 항상 침착하고 냉정한 모습을 보였던 현임이었기에 그녀는 그렇게 반응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녀는 자신이 자살하기 전에 현임을 찾아가보기로 결심한다. 이 단편을 읽었을 때 첫머리부터 자살을 하려는 주인공의 모습에 충격을 받고 불치병에 걸린 친구에게 딱 잘라 죽으라고 말하는 그녀의 과거 모습에 경악했다. 원래 가진 성격 탓인지도 모르지만 그녀의 삶이나 생각의 방식이 극단적이었던 것이다.
이 책에서는 첫 번째 단편 '웃으면서 죽는 법'부터 마지막 단편 '브리지 클럽'에 이르기까지 우울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자신이 지금 보내고 있는 시간과 과거에 흘러간 시간, 미래에 다가올 시간을 견뎌낸다. 다만 그것은 비정상적인 자살에 대한 집착일 수도 있고 브리지에 몰두하는 일일수도 있다. '브리지 파트너'와 '브리지 클럽'에서는 애거서 크리스티 소설 속에나 등장한 다소는 낯선 느낌의 브리지를 하나의 매개체로 사용하고 있다. 다른 인생, 다른 시간을 걸어가는 타인들이 브리지라는 게임을 통해 서로의 인생을 교차하는 것이다.
단편이니 만큼 그들의 인생은 한 단면만이 부각이 된다. 그리고 인상적인 순간에서 끊긴 이야기의 다음은 알 도리가 없다. 그들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전반적으로 우울한 색채가 짙은 터라 읽으면서 웃을 일은 없었다. 그들이 받아들이는 시간은 무채색이라 읽는 입장에서도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절반의 시간을 보내고 앞으로 살아갈 절반과 흘러간 절반에 고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브리지 파트너' 인상 깊게 읽었다. 앞으로 다가오게 될 시간을 두렵게 하기도 하는 책이었지만 이후를 궁금하게 하는 단편이라는 점은 마음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