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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색의 수수께끼 -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 작가 18인의 특별 추리 단편선 ㅣ 밀리언셀러 클럽 90
나루미 쇼 외 지음, 유찬희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10월
평점 :
절판
한 소녀가 실종됐다. 아름다운 외모를 빛나게 하는 다정한 성품을 가진 소녀였다. 규칙적 생활을 하는 편인 소녀였기에 그 실종은 금새 알려졌고 FBI가 수사에 나섰다. 신앙심이 깊은 가족들은 소녀가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빌고 있었다. 그 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자신은 그 소녀와 사랑하는 사이며 그녀를 무사히 보호하고 있다는 남자로부터 였다. 가족들은 소녀에게는 남자친구가 없다고 말했다. 남자는 소녀와 얼마 전에 만났지만 서로 깊게 연결되었다고 말했다. 수사관들은 남자가 소녀를 납치했을 것이며 아마도 소녀는 죽었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불운한 예측 속에 남자는 계속 전화를 걸어왔다. 그것도 납치된 소녀의 동생에게 계속 걸어왔다. 가족들은 혹시 모를 기대 속에 전화를 받았고 자신의 딸을, 언니를 돌려달라고 남자에게 재차 부탁했다. 남자는 매번 그녀를 돌려주겠다고 했지만 그 약속을 번번이 어겼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소녀는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전화벨은 울렸다. 자신과 소녀는 신의 뜻으로 하나가 되었으며 소녀의 동생도 그 영화로운 자리에 함께 해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소녀의 동생에 대한 집착이 실마리가 되어 그 남자는 검거되었다.
그런데 소녀의 가족이 남자를 만나러 왔다. FBI 수사관들은 면회를 허락했지만 그들의 몸수색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다행히 소녀의 가족들은 신실한 사람들이라 수사관들이 없는 면회실에서 남자를 죽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들은 용서를 하러 왔다고 했다. 미국의 형사재판은 배심원제라서 아마도 소녀의 가족들이 그 파렴치한 살인범을 죽였다 해도 무죄로 풀려날 확률이 높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용서를 선택했다. 자신들의 딸을, 언니를 죽이고 또 다른 딸을 죽이려 한 살인마를 말이다.
용서는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도 말한다. 하지만 죄가 무거운 만큼 고통은 크고 용서는 힘겹다. 다른 사람의 일이 아닌 자신의 일이 되었을 때 용서를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어린 시절 자신을 성추행한 범인을 다시 만났을 때 단편 '저벅저벅'의 주인공 역시 선택을 주저했다. 처음 그녀가 원한 것은 복수였다. 10살의 여름 가즈코는 끔찍한 경험을 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한 중학생을 만난 것이다. 소년은 그녀의 앞을 막아섰는데 가즈코는 불안한 마음에 도망치려고 한다. 그러자 소년은 요요로 그녀를 현혹시킨다. 아직 어린 아이였던 그녀는 쉽게 현혹되었고 소년에게 다가갔다.
그 때 소년은 한 손에 칼을 쥐고 그녀를 오두막으로 끌고 간다. 하의를 전부 벗기고 여성의 성기를 직접 보고 만져 보고 싶다는 추악한 발상 때문이었다. 구역질나는 경험이었다. 가즈코는 울면서 살려달라고 말하지만 소년은 이렇게 말한다. 어른에게 알리면 반드시 찾아와 '죽여버리겠다'고 말이다. 지켜보고 있다가 죽여 버리겠다는 폭언이었다. 가즈코는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 일은 그녀의 인생을 뒤틀어 놓았다. 누군가에게 그 일을 말하지도 못했고 다른 사람을 사귀는 것도 연애를 하는 것도 힘에 겨웠다. 결혼을 하고 이제 서른아홉인 그녀는 아직도 그 일에 휘둘린다. 결코 잊지 못한 것이다. 그런 그녀의 앞에 그 때 그 소년의 모습이 보인다. 그녀는 무작정 소년을 쫓아가고 진실을 찾아내고 복수를 하겠다고 마음먹는다.
이 책 '흑색의 수수께끼'는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 작가의 추리 단편 4개를 묶어 놓은 책이다. 하지만 딱히 추리 단편이라고 할 수 없는 것들이라서 사실 읽으면서 좀 실망을 했다. 무덤덤한 일상을 살아가는 남자의 이야기 '화남', 어린 시절 자신을 성추행한 소년을 찾는 이야기 '저벅저벅', 아버지의 추억에 대한 이야기 '목소리', 사라진 바이올린 찾기 '가을날 바이올린의 한숨'까지 본격 추리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모자란 부분이 있는 단편들이었다. 하지만 읽기 자체는 술술 읽어질 뿐만 아니라 인상이 강렬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 자신을 성추행한 소년을 찾아 나선다는 소재라든지 사라진 바이올린의 주인이 아인슈타인으로 설정되어 있는 부분이 그랬다.
'저벅저벅' 같은 경우에는 인상이 강렬해서 읽은 후에 가장 여운이 길게 남은 단편이었다.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말이다. 반면 '가을날 바이올린의 한숨'의 경우에는 경쾌한 추리소설이라고 할 정도로 가볍게 흘러갈 뿐만이 아니라 군데군데에 나오는 음식 묘사에 한층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사실 전부 읽고 난 다음 가장 수수께끼인 것은 이 책의 제목 쪽이었다. 흑색의 수수께끼라지만 네 개의 단편을 관통하는 분위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제목과 동명의 단편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읽는 다면 좋을 '흑색의 수수께끼' 나쁘지는 않았다. 역시 가장 기억에 남는 단편은 '저벅저벅'이었는데 복수와 용서의 무게를 실감하게 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용서야 말로 아름답다지만 복수의 칼을 들게 한 것도 용서의 손을 내밀게 하는 것도, 시작은 전부 죄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떠올리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