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트맨 이어 원 세미콜론 배트맨 시리즈
데이비드 마주켈리.프랭크 밀러 지음, 곽경신 옮김, 리치먼드 루이스 그림 / 세미콜론 / 2008년 12월
평점 :
절판


가끔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한 일로 인해서 스트레스가 더 쌓이는 경우가 있다. 별 생각 없이 시작한 게임의 난이도가 생각보다 높아서 끊임없는 게임오버 소리를 듣거나 애착을 느끼기 시작한 소설 주인공의 허망한 사망 등이 그렇다. 그 중에 제일 싫은 것은 마음 놓고 영화를 보러 갔다가 실컷 나쁜 짓을 한 악당이 싱글거리면서 사라지는 뒷모습을 볼 때 그렇다. 더구나 그 이후도 없이 영화가 끝났을 때는 울화가 부글부글 치밀어 오른다. 현실이 더 영화 같다지만 현실 속에서는 불합리한 일이 너무 많다. 정의가 승리한다는 것은 이야기 속에서나 가능한 이야기고 이긴 사람이 정의가 되고 만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영웅을 꿈꾼다. 자신이 하지 못한 일을 누군가 대신 해주길 바라는 것이다. 현실이 아니라면 만화에서 영화에서 그리고 이야기 속에서나마 말이다. 사실 진짜 영웅이 존재한다면 그 영웅이 있게 만들 정도의 끔찍한 현실 상황을 한탄해야 하거나 영화 '핸콕'의 주인공처럼 범인 하나를 잡자고 수많은 기물을 부숴 꽤 많은 손해를 안겨 주는 걸 걱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중 매체 속의 악인들이 보였을 때 사람들은 무의식중에 불안해한다. 만에 하나라도 자신이나 가족이 저런 사람의 희생자가 되면 어쩌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영웅을 바랄 수밖에 없다. 위급한 순간에 나타나 구해주는 사람을 싫어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이 실재하는 인물이 아니라고 해도 말이다.

덕분에 이야기 속에서는 온갖 맨들이 등장한다. 특이한 거미에 물려 초인적 능력을 가진 스파이더맨부터 태생부터가 이미 인간이 아닌 슈퍼맨까지가 그렇다. 허나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영웅은 배트맨이 아닐까 싶다. 사실 박쥐를 형상화한 갑옷을 입고 싸우는 영웅이라니 냉정하게 생각하면 이상하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초인적인 능력 없이 악당들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계속 고뇌하는 영웅이라니 매혹적인 면이 더 크다. 능력으로 치면야 이미 인간이 아니라는 쪽이 더 크겠지만 어린 시절에 받은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사는 평범한 사람이 악과 싸운다는 쪽에 더 호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물론 브루스 웨인은 거대기업 총수이고 상당한 지능, 운동신경을 가진 인물이니 어디까지나 다른 히어로물의 주인공에 비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정작 접하기는 영화로 봐서 몰랐지만 팀 버튼의 배트맨 1만해도 20년 전 영화라 하니 배트맨의 탄생은 이미 오래 된 것이었다. 하지만 인기 캐릭터의 부활을 꿈꾼 회사 측에서 다시 배트맨의 처음을 심도 있게 그리기로 하고 낸 작품이 바로 '배트맨 이어 원'이다. 그런데 좀 허심한 부분이 있는데 배트맨의 탄생을 다시 그리겠다고 자원한 프랭크 밀러가 그림 쪽에서는 손을 떼고 글만 썼다는 부분이었다. 이 사실을 미처 몰랐기에 조금 실망해버렸지만 그래도 소재는 배트맨이고 프랭크 밀러의 깊이 있는 내용은 그대로라 꽤 재미있게 읽었다. 그림도 눈에 익으니 점차 마음에 드는 편이었다.

이 책 '배트맨 이어 원'은 다시 태어난 배트맨의 이야기라서 그런지 기본은 같지만 세부 사항은 다르다는 느낌이 조금 있다. 이야기는 두 사람이 고담 시에 도착하면서 시작된다. 18년 동안의 준비를 끝내고 돌아온 브루스 웨인과 무언가 문제를 일으켜서 다른 도시로 전근을 온 제임스 고든이다. 브루스 웨인은 겉으로야 고담시에서 가장 부유한 미혼 남성이라 그런지 언론에서 그가 돌아왔음을 대대적으로 보도한다. 반면 경찰인 제임스 고든은 비행기가 아니라 기차를 통해 고담시에 들어오는데 그 도시는 혼란 그 자체라는 느낌이 들었다. 기차역으로 마중을 온 형사는 전근을 왔지만 직책이 부서장인 고든에게 지나치게 허물없이 대한다. 형사의 이름은 플래스였고 건방진 태도도 태도였지만 약간 불량한 소년들에게 지나친 폭력을 행사하는 모습이 고든이 눈에 들어온다.

혼란스러운 죄의 도시에 들어 온 두 사람은 저마다 준비를 시작한다. 브루스 웨인은 자신의 부모님이 살해당한 순간을 잊지 못하고 있었고 그 이후 18년 동안 단련을 해왔다. 언젠가 세상에 나아가 악과 싸울 그날을 위해서 말이다. 고든은 무슨 문제를 일으켰는지는 나오지 않았지만 강직한 형사인 그는 쓸데없는 문제에 휘말린 것으로 보였다. 부패한 경찰 조직은 그를 반기지 않았고 경찰청장도 그를 눈의 가시로 여긴다. 부서장이 된 그가 자신들과 같지 않다는 것을 알자 플래스는 고든을 없앨 계획을 세운다.

상황은 점점 불리하게 돌아가는데 두 사람 다 문제에 휘말렸기 때문이다. 아직 배트맨이 되지 못한 브루스는 변장을 하고 거리에 나갔다가 시비에 휘말리고 그 와중에 창녀인 셀리나와 싸우고 만다. 그 일로 인해서 그는 경찰차에 태워진다. 고든 쪽도 상황이 그리 나은 편은 아니었다. 고든이 퇴근하던 것을 기다려 여러 명의 남자들이 그를 습격해온다. 고든은 반격하지만 예전만한 솜씨를 발휘하지 못했고 엉망으로 맞고 만다. 쓰러진 고든의 위로 그들은 이것은 경고에 불과하고 임신한 아내를 생각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이어 고든의 귀에 익숙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이 고담 시로 들어오는 처음에서 배트맨이 탄생하기까지 그리고 탄생한 이후의 이야기가 나오는 터라 꽤 흥미로웠다. 팀 버튼의 배트맨 2에서는 악덕 대기업 총수의 비서였지만 살해당해서 캣 우먼이 되는 셀리나가 이 책에서는 원래 창녀였다가 배트맨이 언론의 주목을 받자 창녀에서 도둑으로 직업을 바꾼 여자로 나오는 점이 특이했다. 그러나 가장 특이했던 점은 배트맨의 조력자로 등장한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특히 경찰 부서장인 고든의 경우에는 그와 대등한 느낌이 없지 않았고 하비 덴트 역시 꽤 비중 있게 나오는 점이 신선했다. 고든의 고뇌와 배트맨의 고뇌가 서로 맞물리는 이야기 '배트맨 이어 원' 정말 재밌게 읽었다. 검은 가면으로 정체성을 감춘 고뇌하는 영웅이란 소재는 앞으로도 질릴 일이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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