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미셀러니 - 와인에 관한 비범하고 기발한 이야기
그레이엄 하딩 지음, 차재호 옮김 / 보누스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교양 있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는 소망은 비슷하겠지만 시대마다 그리고 나라마다 사회에서 바라는 교양은 다르다. 가령 르네상스 시대의 교양 있는 사람이라면 온갖 학문에 어느 정도 수준의 잡다한 지식을 갖춰야 한다. 반면 현대의 교양이 있다는 수준은 르네상스 수준의 만능인에는 훨씬 못 미치는 정도이지만 어느 정도의 상식 수준을 필요로 한다. 시사적인 이야기나 전문적 경제 용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올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적어도 대화를 주도 하지 않아도 알아들을 수 있는 정도는 되어야 한다. 그런데 최근 여기에 한 항목이 추가되었다.

바로 '와인'이다. 술도 '주도'라는 것이 있어서 마시는 데에도 법도가 있다지만 여태까지는 그저 쉽게 즐기면 되는 문화였다.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경우이고 연장자와 마실 때 지켜야 할 몇 가지 규칙이 있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와인을 잘 마시고 즐길 줄 알고 와인 라벨을 아무렇지 않게 읽으면서 그에 대한 이야기를 마구 해댈 수 있지 않으면 교양 없는 사람으로 보이는 수준이 되고 말았다. 와인도 그저 술의 하나고 다른 술이라고 역사가 없는 것도 아닌데 유난스럽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만화 '식객'에 나오는 와인에 관한 이야기에도 이런 부분이 있었다. 와인도 술이니 그저 즐겁게 마시면 될 것을 전문가도 아닌 많은 사람들이 와인에 대한 서정적 묘사를 하려 들고 마실 때 꼭 휘파람을 부는 것 같은 입모양을 한다든지 잔을 들고 색이나 향기를 억지로 느껴보려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만화 '신의 물방울'에 나오는 것처럼 와인을 즐길 수 있다면 좋겠지만 와인을 마셔보았자 햇빛 찬란한 포도밭이 그려지지 않는 사람의 입장에서 그런 모습은 우스꽝스러워 보이기만 했다. '신의 물방울'에 나오는 와인에 대한 묘사는 인상적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만화고 술은 좋은 사람들과 즐겁게 마시면 좋은 정도의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인상이 더욱 강했다. 더구나 술을 즐기지 않는 입장에서는 와인이 하나의 열풍처럼 번지는 모습은 묘하기까지 하다. 와인을 즐기지 않는지라 십 만원이 넘는 와인을 받아도 전혀 즐겁지 않은데 그 사실을 대놓고 말하면 교양 없는 사람으로 몰리는 시대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 '와인 미셀러니'는 사람의 마음을 안심시켜 주는 책이다. 와인에 대한 주제가 나왔을 때 입에 올릴 이야기를 풍성하게 해주는 책이기 때문이다. 그런 방어용 주제 생성에도 풍부하지만 와인에 대한 다채로운 이야기가 모여 있기 때문에 읽는 즐거움도 있다. 한 페이지 남짓한 짧은 이야기가 조밀하게 모여 있는데 첫 번째 등장하는 와인이야기부터 '마리화나 와인'이라고 한다. 거기에 친절하게도 그 마리화나 와인의 조제법까지 적혀 있다. 꿀을 첨가한 달콤한 와인인데 문제는 마리화나도 넣는다는 점이다. 여기서 한 마디가 추가되어 있다. 마시거나 만들면 실정법 위반이라는 것이다.

충격의 마리화나 와인으로 시작된 책은 와인을 주제로 게임을 하는 와인 게임에 대한 이야기로 막을 내린다. 책의 표지에 쓰여 있듯이 와인에 관한 비범하고 기발한 이야기가 모여 있어서 읽는 내내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일반 상식을 추가하는 부분도 많았는데 옛날 사람들은 다른 과일을 가지고 와인을 만들기도 했는데 주로 포도로 만드는 와인이 발달하게 된 것은 포도가 다른 과일이나 야채에 비해서 발효가 쉬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와 더불어 다양한 와인을 소개하고 있는데 중국의 경우 쌀로 빚는 와인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와인은 포도주라고 단순히 생각했던 터라 곡주가 와인으로 나와 있는 점이 신선했다.

그리고 최근 드라마 제목으로 등장한 '떼루아'가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단순히 단어적 의미는 땅이라는 것이지만 와인의 원료인 포도가 성장한 토양이나 기후 등 환경적 요인을 전부 합쳐서 떼루아라고 지칭한다는 부분을 읽고 그게 왜 제목이 될 수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실제로는 와인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소설에 와인을 여러 번 등장시키고 나름대로 중요한 소재로 활용한 이안 플레밍에 대한 것이나 포도원 토지 가격에 대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최근 형성된 지나치게 아는 척하면서 마시는 와인 문화가 거북스러웠는데 역으로 와인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읽다보니 와인에 대해 조금은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그저 즐겁게 마시는 편이 좋은 술이라고 생각하는 점은 변함없지만 말이다. 술은 결국 술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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