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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탑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수첩 리틀북 / 2008년 12월
평점 :
절판
별 일이 아님에도 분개하게 되는 일이 하나 있다. 어떤 드라마건 간에 주인공의 고난은 진저리나게 길지만 주인공의 행복을 다룬 결말은 보통 10분을 넘지 않는다. 사극이야 그렇다 해도 남녀 주인공의 사랑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운 드라마에서 두 사람이 사랑을 이룬 이후의 이야기가 짧은 건 짜증스럽다. 사랑은 이루기도 어렵지만 이룬 후에 잘 유지해나가기가 더 어렵다. 그런데 두 사람의 사랑에 미남 미녀이지만 더없이 사악한 연적이 마구 끼어들어서 범죄 수준의 책략을 난무한 것만 잔뜩 흩뿌려 놓고 모든 방해가 사라지자 '두 사람은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로 마무리가 되는 것이다. 사실 두 사람의 고난은 그 때부터가 시작인데도 말이다. 물론 그 쯤 되면 환상의 충족이 되지 않으니 다루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그런 생각을 하면 연애를 다룬 드라마는 잘 보지 않게 된다.
그런데 이 책 '태양의 탑'은 사실 연애를 다룬 책이다. 그것도 연애의 처참한 이후를 다루고 있다. 실제 있다는 태양의 탑을 그린 기괴한 표지하며 비슷한 제목의 판타지 소설이 있었던 것을 기억하게 하는 제목까지 연애와는 거리가 먼 것 같은 느낌임에도 연애를 다루고 있다. 더구나 '일본 판타지 노벨대상' 수상작이라고 쓰인 띠지가 책을 휘감고 있는데도 연애를 다룬 책이다. 그래서 연애가 인생 속의 가장 큰 환상이라서 그런가 하고 책을 펼치면 몇 장 넘어가지 않아서 얼추 이해가 가기 시작한다. 먼저 이 책의 주인공은 기괴한 인물이다. 딱 잘라서 말하건대 기괴하다. 반쯤 양보한데도 특이한 사람이다. 주변에 더 특이한 기운을 풀풀 풍기는 사람들이 많아서 다소 정상인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위장 전략이고 그는 굳이 분류하자면 괴짜에 들어간다.
그런 주인공의 직업은 일단은 학생이다. 휴학 중이고 간간이 아르바이트를 해서 먹고 살지만 성실하지 않은 교토대학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요새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하나의 거대한 연구였다. 연구를 오래 해 와서 꽤 많은 논문을 써내기도 했지만 계속된 관찰을 해나가고 있었다. 대상은 헤어진 여자 친구 미즈오 씨였다. 어디까지나 감정을 전부 배제한 순수한 연구이며 요새 세상을 흉흉하게 하는 스토커라는 종류와 다르다고 이 책의 화자인 '나'는 딱 잘라 말하고 있다. 보는 입장에서는 그리 다르지도 않은 것 같다는 찜찜한 생각을 지울 수가 없지만 아직은 미즈오 씨에게 특별한 피해를 주지도 범죄라는 생각이 들만큼 번지지도 않은 터라 그저 기괴한 짓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학교도 제대로 나가지 않으면서 미즈오 씨에 대한 연구의욕을 불태우던 어느 날 주인공은 뜻하지 않은 상황에 부딪힌다. 여태까지 관찰을 해오면서 미즈오 씨가 그것을 눈치 챈 것 같지도 않았고 전화를 했다가 끊는다던가 하는 몰상식한 행위를 한 적도 없는데 어떤 짜증나는 녀석이 다가와서 자신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미즈오 씨가 싫어하니까 그런 범죄 행위는 그만두고 썩 물러가라는 위협을 들은 주인공은 상대의 얼굴 사진을 찍고 그 자리에서 벗어난다. 문제는 자전거를 두고 왔다는 것이었지만 다음 날 찾으러 가면 될 것이었고 감히 자신에게 거대한 모욕을 안긴 파렴치한 녀석을 파악해 둘 필요가 있었다. 상대는 예상대로 미즈오 씨와 같은 나이의 법대생으로 얼굴만 번지르르한 기분 나쁜 녀석이었다. 꼴사나운 수염을 기르고 있었으며 감정을 배제한 중요한 연구를 하고 있는 자신을 스토커 따위로 치부하고 위협을 한 못된 녀석이었던 것이다. 어디까지나 주인공의 입장에서 말이다.
이 쯤 되면 실은 주인공이 정말 스토커이고 피해여성인 가련한 미즈오 씨가 공포에 질려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떠오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감정을 배제한 관찰자라는 '나'는 일생 일대 처음 있었던 일이었던 미즈오 씨와의 사랑을 잊지 못한 남자였고 그를 위협했던 상대역시 현재 미즈오 씨를 짝사랑하는 사람이었을 뿐이었다. 당사자는 모르는 새에 스토커의 위험 수위에 닿을 듯 말듯 한 두 사람이 서로를 적대시하며 물어뜯기 시작한다. 처음 시작은 '나'의 스토커 행위는 범죄이며 더 이상의 괴롭힘을 계속한다면 경찰에 고발하겠다는 편지를 보내온 엔도 아키라였다. 주인공은 이 편지를 받고 위축되기는 커녕 장문의 답장을 보낸다. 평소 편지를 보내는 걸 좋아해서 미즈오 씨와 사귈 때에도 쓸데없는 편지를 계속 남발해서 미즈오 씨의 집을 편지로 뒤덮은 남자답게 쓸데없는 내용을 잔뜩 담은 편지를 보낸 것이다. 그 내용인즉슨 미행이 범죄라고 하면서도 자신을 미행한 귀하의 행위야 말로 범죄에 가깝고 그런 행위를 하는 것으로 보아서 엔도야 말로 자신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자신은 추호도 그럴 생각이 없으니 포기해달라는 것이었다.
이런 편지가 답장으로 왔으니 기가 막히기야 했겠지만 엔도는 어처구니없는 방식으로 보복에 나선다. 주인공의 집의 현관문을 테이프로 붙여서 안에서 못 열게 한 것이다. 이에 주인공은 바퀴벌레큐브라고 불리는 바퀴벌레 수백 마리를 선물로 보내는 것으로 응수한다. 헤어진 애인을 잊지 못해서 당최 목적을 알 수 없는 연구일지를 작성하던 주인공이 연적과 밑도 끝도 없는 보복전에 나서기도 하고 아무리 봐도 어딘가 아픈 것 같은 후배를 달래는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그야말로 괴짜란 말 외에는 지칭할 말이 없는 것 같은 주인공의 일상 같지 않은 일상을 읽는 것이 꽤나 유쾌했다.
헤어진 애인을 연구한다는 시작이 유쾌한 소재는 아니지만 그것을 묘사한 것이 경쾌한데다가 얼굴 밖에 모르는 아르바이트생에 대한 망상을 불태우는 괴짜들의 이야기가 나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아르바이트생은 어느새 끔찍한 괴롭힘을 하는 새아버지와 잔혹한 남자친구가 있는 여자가 되어버리지만 실제로는 새아버지도 남자친구도 없는 터라 그 사실을 알게 된 순간 괴짜들의 상상력에 기가 막힐 뿐이었다. 자신들의 일상의 90퍼센트는 머릿속에서 일어난다는 단언을 하는 그들이라 그 생각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 자체가 환상 그 자체였다.
단순히 인기 없는 남자들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뭔가 아쉬운 괴짜 교토대생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그들의 일상을 다룬 이야기라 아주 재밌게 읽었다. 망상이 반 이상이라서 멍하니 따라가다가 '아니잖아!'라고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그래서 오히려 실소를 자아냈다. 그리고 독특한 '에에자나이카'소동으로 마무리되는 이야기도 그렇지만 결국 이 이야기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다시 한 번 웃게 되었다. 읽고 난 이후에도 연애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믿을 수 없고 그런 이야기이기 때문에 더 유쾌한 망상으로 가득 찬 '태양의 탑' 앞으로 이 작가의 이름을 기억해두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