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환상문학 단편선 Miracle 2
김재한 외 지음, 김봉석 해설 / 시작 / 2008년 8월
평점 :
품절


사람은 평생에 걸쳐서 꿈을 꾼다. 백년 남짓한 길면서도 짧은 시간에 이뤄지는 꿈은 하나의 긴 것 일수도 있고 짧은 여러 개의 것 일수도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꿈은 사람의 노력여하에 따라 이룰 수 있는 수준의 것인 반면 닿을 수 없는 신기루에 가까운 꿈들은 환상이라고 불린다. 그런 환상을 쫓아가는 인생을 산다면 무지개를 잡는 인생을 사는 것마냥 허황될 것이다. 하지만 잡을 수 없는 무지개가 더 아름다워 보일수도 있고 그것을 목적으로 하는 삶이라면 난감하겠지만 그런 환상을 살짝 들여다보는 것은 꽤 즐거운 편이다.

이 책 '한국 환상문학 단편선'에는 그런 환상 9개가 실려 있다. 장편이라면 환상적인 이야기라도 현실과의 줄이 닿으면서 그 환상적인 면이 많이 깎여나갈것이다. 허나 단편이니 만큼 현실과 닿아 손상되지 않은 환상의 고유한 면을 들여다 볼 수 있다. 9개의 이야기는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상아처녀'에서는 그리스신화 속의 피그말리온이 자신만의 이상적 여성을 만들어내었던 것을 소재로 하고 있다. 과학을 이용해서 이상적 여성 갈라테이아를 만들어내고 그 여성과의 사랑을 이루려 하는 남자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데 그 이야기 속의 사랑은 온기로 대변된다. 과학을 통해 이상적 여성으로 탄생했지만 이야기 속의 갈라테이아는 이상적 여성과는 거리가 멀다. 몸은 성인여성이지만 그녀의 자아는 인간의 것과는 거리가 있다. 모든 감정을 학습해야 하고 인간다운 삶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인간이 아닌데 인간답게 살아야 하는 갈라테이아의 모습은 측은함까지 갖게 된다. 오히려 실험실의 수조에서 살던 때가 더 나았다는 생각까지 들게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울한 환상인 셈이다.

다른 이야기 '카나리아'와 '사육'은 판타지 소설에서는 흔한 주제인 흡혈귀에 대한 것이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어둠의 피조물의 이야기이니만큼 전반적인 분위기도 어둡다. 허나 익숙한 소재이지만 그것을 다루는 방식은 이색적이다. 또 다른 흡혈귀에게 장난감처럼 사육당하는 흡혈귀의 이야기나 사냥꾼에게 쫓기는 삶을 사느라 하수도 속에서 살아야 하는 흡혈귀의 이야기라니 묘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인간의 삶을 포기한 대신 더 나은 것을 얻은 자가 아니라 오히려 더 못한 상황에 빠져야 하는 기괴한 생명체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반면 '용의 비늘', '윈드 드리머', '세계는 도둑맞았다'의 경우 주인공이 처한 상황 자체는 힘든 것이지만 그 주인공들의 안에 그 상황을 벗어날 숨은 재능이나 조력자가 숨어 있어서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편이었다. 자신의 나라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모험에 떠나는 왕녀나 자유로 대변되는 새로운 비행선을 개발하는 황족, 인간을 공격하는 침략자를 막기위해 모습을 드러낸 마법사처럼 당장 처한 상황은 곤란한 것이었지만 왕녀에게는 용의 피가 흐르고 있었고 '윈드 드리머'의 황족은 뛰어난 비행선 개발자였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들도 인상적이었지만 가장 인상적인 이야기는 오히려 동양의 설화가 떠오르는 '목소리'였다. 한 남자가 굉장히 매력적인 부인을 가지고 있었고 심부름을 왔던 아이가 그 부인의 모습을 훔쳐본다. 그 장면을 남편이 보고 아이를 죽도록 때리고 쫓아낸다. 주변사람들은 그저 살짝 혼내면 좋을 것을 남자가 유난을 떤다고 말한다. 하지만 남자의 분노는 식을 줄을 몰랐고 아이의 스승인 도사가 와서 사과를 하지만 이마저도 거절한다. 그 도사는 가기 전에 기묘한 말을 하는데 부적을 써줄테니 그 부적을 반드시 갖고 있으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그 말을 무시했고 부인은 임신을 한 상태였다. 그 후 부인은 아이를 낳았는데 아들과 딸 쌍둥이였다. 딸은 굉장히 귀엽고 사랑스러웠지만 아들은 뱀의 혀를 달고 태어난 아이였다. 요괴에게 목소리를 빼앗긴 아이였던 것이다. 자신의 잘못이 아닌 이유로 인해 기괴한 용모를 갖게 된 아이의 이야기가 신선했다. 동양의 설화로는 많이 있는 내용이지만 이 책에서 기대했던 내용이 아니었던 만큼 그런 느낌이 더 했다.

9편의 이야기는 각각의 특색을 가지고 있었고 책을 읽는 동안은 환상의 조각을 하나하나 삼키는 기분이었다. 일상에서 보기 힘든 환상이라서 읽는 내내 즐겁기도 했지만 우울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도 있어서 그런 이야기를 읽을 때는 햇살마저 빛을 잃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현실을 잊게 하는 9개의 환상 조각이 담긴 '한국 환상문학 단편선' 매우 인상 깊게 읽었다. 그 신기루가 기대했던 형태의 것은 아니었지만 현실 속에서 잠깐의 청량감을 느끼기엔 충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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