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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1시의 산책
구로 시로 지음, 오세웅 옮김 / 북애비뉴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죽음은 많은 것을 빼앗아간다. 죽음은 단순히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없음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더 큰 것을 상징하기도 한다. 살아있을 때는 사랑해 마지않던 가족조차도 죽은 자의 상태로 돌아온다면 그들은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만다. 죽은 자를 아무 두려움 없이 맞이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 대상이 예전에 사랑했던 가족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도 있었다. 남편을 잃고 슬픔에 잠긴 아내는 어찌 할 바를 몰랐다. 남편이 죽은 자가 되어버렸지만 죽은 자의 상태로나마 붙잡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주술사에게 부탁했다. 죽은 남편을 다시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말이다. 주술사는 죽은 자를 돌아오게 하는 주술을 행했고 남편은 실제로 돌아왔다. 어느 달이 흐린 밤에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아내가 들었다. 아내는 직감적으로 죽은 남편이 돌아왔음을 깨달았다. 허나 아내는 쉽사리 문을 열지 못했다. 불현듯 두려운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아내가 망설이고 문을 열지 못하자 남편이 아내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가 남편을 너무 애절하게 붙들었기 때문에 편안히 갈 곳으로 향할 수 없었고 그녀의 곁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이제 그녀의 곁에 머물 테니 문을 열라고 남편은 말한다. 하지만 아내는 남편이 입을 연 시점에서 그가 죽은 자라는 것을 오싹할 정도로 실감한 터라 문을 열기는커녕 두려움에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 상태가 지속되었고 새벽이 되어 날이 밝아오자 남편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주술은 실패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제야 아내는 자신이 저지르려고 했던 일을 깨닫는다.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시점에서 그와의 인연은 끝나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죽은 자를 일으키려 해봤자 돌아온 사람은 그녀가 바랐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 이 책 '밤 11시의 산책'에서도 죽은 자가 산 자의 생을 위협한다. 허나 그 위협은 죽은 자에 의한 위협일 수도 있지만 죽은 자에 대한 미련을 거두지 못한 산자에 의한 위협일수도 있었다.
공포소설가 타쿠로는 한 때 정말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다. 너무나 사랑하는 아내와 딸과 살고 있었으며 자신의 소설도 인기를 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 가정, 사랑 전부에서 행운아였던 그는 얼마 후에 자신의 행복이 무너지기 시작했음을 깨닫는다. 그 시작점에 아내 미사코의 죽음이 있었다. 항상 부지런했던 아내가 어느 날 아침 늦잠을 잔다. 딸 치아키와 같이 늦잠을 자는 것으로 생각했던 타쿠로는 미사코가 늦도록 일어나지 않자 아내와 딸을 깨우러 2층으로 올라간다. 하지만 그가 보게 된 것은 죽은 아내와 그 품에서 아직 잠들어 있는 딸의 모습이었다. 아내가 평온한 얼굴로 죽어 있기를 바랐지만 강렬한 고통이 있었던 듯 그녀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그 후 타쿠로는 딸 치아키를 키우는 일과 자신의 소설에 대부분의 시간을 쓰면서 지낸다. 아직 손가락의 반지를 뺄 만큼 미사코를 잊지는 못한 채였다. 평온하고 그럭저럭 견딜만한 상황이었다. 딸 치아키에게 엄마 미사코의 죽음을 제대로 설명하지도 못했지만 그것은 시간이 해결해주리라 믿었다. 그런데 그 상황이 변한다. 딸 치아키가 아내의 재능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인지 독특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가 그린 그림이라고 하기에는 세밀하며 대담한 그림이었다. 하지만 그 그림을 높게 평가하는 것은 타쿠로 정도로 다른 어른들은 아이답지 않은 화풍의 그림을 보고 놀라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허나 타쿠로는 딸의 범상치않은 재능에 만족한다. 그런데 우연히 딸과 강변을 산책하고 돌아온 이후 아이는 밤 11시의 산택에 집착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시퍼런 얼굴의 여자를 그린다. 딸의 재능에 감탄하던 타쿠로도 점차 불안을 느끼기 시작하고 그 불안은 그의 담당자가 바뀌면서 가속화되기 시작한다. 다섯 살 아이의 눈에만 보이는 엄마의 존재, 자신의 눈으로 본 것을 섬뜩한 그림으로 표현하는 아이의 이야기가 오싹하게 이어진다. 두 부녀의 주변을 맴도는 시퍼런 얼굴의 여자는 정작 타쿠로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오히려 아이의 눈에만 보이기 때문에 더 오싹한 면이 있었다. 더구나 그 존재를 치아키가 엄마라고 부르기 때문에 그런 기분이 더했다.
이야기 자체는 주인공인 타쿠로가 담담한 태도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천천히 검은 물밑으로 잠겨드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급변할수록, 사건의 실체에 접근할수록 기분 나쁜 무언가가 주변에 있는 것만 같은 불쾌감이 몸을 감싸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정작 모든 진상을 알게 된 순간은 긴장감이 떨어지는 것만 같은 생각도 들었다. 정체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더 오싹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이만 보는 무언가를 소재로 한 이야기라서 굉장히 긴장감 있게 읽을 수 있었다. 시퍼런 얼굴의 여자와 밤 11시의 산책에 집착하는 치아키의 비밀 '밤 11시의 산책' 인상 깊게 읽었다. 읽고 나서 생각한 것이지만 역시 알 수 없는 존재를 볼 수 있는 사람보다 보지 못하는 사람 쪽이 더 강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