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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과 악몽 ㅣ 호시 신이치의 플라시보 시리즈 28
호시 신이치 지음, 윤성규 옮김 / 지식여행 / 2008년 3월
평점 :
품절
사람은 이제 동물로서의 본능을 많이 잃어버렸다. 하지만 아직도 남아 있는 본능 중에 하나는 생존본능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뒤편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뒤로 접근해서 말을 거는 사람에게는 자신도 모르게 약간의 불쾌감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한 생물이 다른 개체에게 뒤를 빼앗긴다는 것은 생존문제와 직결된다. 만약 토끼가 뒤로 접근한 늑대의 기척을 느끼지 못한다면 늑대의 움직임에 반응할 시간이 부족할 테고 아마도 토끼는 늑대의 식사감이 될 것이다.
덕분에 무의식중이지만 사람은 뒤를 빼앗긴다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고 뒤로 접근한 개체에 혐오감을 갖게 된다. 그래서 많은 공포 이야기에서 등 뒤의 시선에 대한 것이 나온 것 같다. 뒤를 빼앗겨서 생명을 잃을 위험과 직면한다면 누군가의 시선이 뒤에서 느껴진다는 것은 이미 목숨이 위험하다는 의미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괜히 신경이 예민할 때는 방문을 닫는 순간의 뒤편이 서늘한 것 같고 머리를 감아서 뒤를 볼 수 없을 때 뒤편에 누군가의 시선이 닿는 것만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도 그런 상황에 처한 남자가 있었다. 남자에게는 하나의 금기가 있었는데 어떤 특정 장소에 있는 건널목만은 지나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 남자는 살아오면서 몇 명의 여자를 만나왔는데 그 중 한 여자가 그 건널목에서 자살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남자는 계속 생각해봤지만 아무리 그래도 실연 때문에 여자가 자살한 장소를 지나치는 것은 꺼림칙했다. 생각해보면 여자는 성격이 얌전한 편이었다. 특별히 그녀가 잘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처음 만났을 때 마음에 들었던 얌전한 성격이 몇 번 만나고 보니 질려버린 것이 문제였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넘기려 해도 그 장소를 가고 싶지는 않았고 그런 식으로 다른 길로 돌아가다 보니 하나의 금기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평소대로 그 길을 피해가면 아무 문제가 없었겠지만 지금 만나고 있는 여자와의 데이트 시간에 맞추기가 빠듯한 터라 어쩔 수 없이 그 길을 가로지르게 된 것이다. 자신이 운전을 하는 것도 아니었고 택시를 탄 터라 택시기사 아저씨가 함께 있어서 두려움도 덜했지만 건널목이 가까워지자 남자는 긴장으로 얼어붙는다. 그리고 건널목을 지나치는 순간 남자는 시선으로 느낀다. 바로 죽은 하루코의 시선이었다. 눈 밑에 점이 있고 가만히 올려보는 시선이었다. 자신이 헤어지자고 말한 순간의 원망스러운듯한 시선 말이다. 그는 순간 오싹해하지만 차는 아랑곳없이 달리고 있었고 건널목도 이미 지나친 후였다.
뒤를 돌아봐도 그저 다른 자동차가 보일 뿐이지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긴장으로 인한 착각으로 치부하고 남자는 데이트 장소에 가지만 다시 시선을 느낀다. 어디를 가도 시선은 계속 따라온다. 누구와 어디에 있든 자신을 보는 하루코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이다. 심지어 잠을 자려고 누워도 등 뒤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옆으로 돌아누워도 시선이 따라오고 정자세로 누워도 침상 밑에서 시선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는 점차 두려움에 사로잡히지만 하루코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약간 신경질적인 상태가 되지만 현재 만나고 있는 여자에게 내색하고 싶지는 않았다. 자신 때문에 죽은 여자의 시선이 느껴져서 두렵다고 어떤 여자에게 말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현재 만나는 여자 친구가 그에게 이런 제안을 한다. 해변에 놀러가자는 것이다. 별 생각 없이 그 제안을 받아들인 남자였지만 아직 그가 모르는 것이 있었다.
2층의 계단 방에서 죽은 아들이 공부하고 있다는 '눈 오는 밤'도 인상적이었지만 가장 인상적인 이야기는 역시 '응시'였다. 자신이 버린 여자가 죽은 건널목을 지나친 이후 그 여자의 시선에 시달린다는 이야기가 섬뜩하면서도 이색적이었던 것이다. 호시 신이치의 이야기는 대부분 놀랄만한 반전을 안고 있지만 그 이야기를 말하는 필치는 담담한 편이라 그 이야기를 더 오래도록 기억하게 한다. 재밌는 이야기라도 하는 사람이 키득 거리면서 말하면 그다지 재미있지 않지만 담담한 투로 말하면 조금 더 재밌게 느껴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읽으면 읽을수록 매료되는 호시 신이치의 쇼트쇼트 '도련님과 악몽' 정말 재밌게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