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처럼
가네시로 카즈키 지음, 김난주 옮김 / 북폴리오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호시 신이치의 쇼트쇼트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남편이 아내가 죽었다면서 치료를 해달라고 의사에게 데려온다. 의사는 기가 막혀서 그를 돌려보내려고 한다. 일단 자신은 남자가 원하는 의사가 아닐 뿐만 아니라 죽은 사람을 어떻게 치료해준다는 말인가. 하지만 맥을 짚어보니 남자의 아내는 분명 살아있었다. 마치 죽은 것만 같았을 뿐이다. 남자의 말에 따르면 아내는 책을 굉장히 좋아하는 독서가인데 문제가 하나 있다고 한다. 읽는 책에 지나치게 몰입해버린다는 것이다. 이번에도 책을 읽고 있었는데 주인공이 죽어버린 부분에서 책을 잃어버렸고 그래서 아내가 지금 저런 상태라는 것이다. 남자가 찾아온 의사는 정신과의사였으니 제대로 찾아온 셈이었다.

그리고 보통은 남자의 아내는 책에 지나치게 감정이입하지만 책을 다 읽고 책장을 덮고 나면 원래대로 돌아왔었다는 것이다. 그 점에 착안해서 의사는 남자에게 아내가 읽고 있던 책을 건넨다. 마침 의사가 읽으려고 사둔 책이었는데 짬이 나지 않아서 아직 못 읽어봤다는 것이다. 집에 아내를 데려가 중단된 부분부터 다시 읽게 하면 아내는 예전처럼 돌아올 터였다. 남자는 안심하고 아내를 집으로 데려가지만 곧 의사에게 다시 연락을 한다. 아내가 책 속에 갇혀버렸다는 것이다. 의사는 기가 막혔지만 환자의 집을 방문한다. 문제는 이런 것이었다. 의사가 준 책의 제본이 잘못되어 있었고 이야기의 끝이 얼마 남지 않은 순간에 앞부분에 있어야 할 페이지가 뒷부분에 끼여 있어서 아내는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읽고 또 읽고 하다 보니 책의 끝으로 진행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의사는 상황은 파악했지만 해결책을 찾지 못해 난감해한다.

책은 앞의 이야기의 여자처럼은 아니겠지만 어느 정도 다른 세계로 통하는 관문의 역할을 한다. 책에 몰입해서 읽는 동안만큼은 책 속의 세계에 빠져서 새로운 지식과 감정의 홍수에 휘말리게 되는 것이다. 영화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두 시간 남짓한 시간동안 전혀 다른 세계를 열어준다. 큰 화면, 귀를 쩌렁쩌렁 울리는 음향, 어두운 주변이 몰입도를 높여준다. 그래서 영화는 일상 속의 작은 일탈을 맛보게 해주는 도구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 책 '영화처럼'에서도 영화는 일탈을 맛보게 하는 도구역할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뿐만 아니라 이 책에서 나오는 영화는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를 이어주는 끈 역할을 하기도 한다. 지금은 처지가 많이 달라졌지만 어릴 적에 친구와 함께 보던 영화는 두 사람을 그 당시로 데려가기도 하고 남편의 죽음 이후 자시의 안으로만 침잠해 들어갔던 여자를 세상과 다시 소통하게 하기도 한다.

다섯 편의 이야기는 하나씩의 주제를 가지고 있다. 첫 번째 이야기 '태양은 가득히'는 편모가정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친해진 두 소년의 우정을 다루고 있다. 무신경한 담임의 영웅주의로 알리고 싶지 않던 가정환경을 공유하게 된 두 소년은 영화를 함께 보면서 점차 친해진다. 서로의 가정환경에 대해서 모른척한다는 암묵적인 규칙을 가지고 말이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서로 친한 척 하지 않던 둘이고 한 명이 조선계 고등학교가 아니라 일본계 고등학교로 가면서 서로 길이 갈린다. 후에 다시 만나게 된 두 친구를 이어주는 끈은 역시 영화였다.

두 번째 이야기 '정무문'에서는 남편이 어떤 사건에 휘말려 죽어버린 이후 외부와의 접촉을 끊었던 여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여자를 밖으로 나오게 한 것은 죽은 남편이 DVD를 연체했다는 전화 한 통이었다. 이야기의 주인공인 여자가 영화를 보면서 예전의 자신감을 점차 회복하고 다시 세상과 맞설 용기를 얻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 외에도 로맨스를 주제로 한 '프랭키와 쟈니'와 복수를 주제로 한 '페일 라이더'도 기억에 남았다.

허나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마지막 이야기 '사랑의 샘'이었다. 어린 시절이후 다른 길을 가게 된 친구도 끔찍한 사건 이후 복수를 준비한 여자도 나오지 않지만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힘을 잃은 할머니의 기운을 회복시키기 위한 손자들의 노력이 기특했다. 단순히 따뜻한 이야기일 뿐이었다면 읽고 난 후에 잊혀졌겠지만 이야기 자체가 재미있어서 키득거리고 읽은 덕분에 기억에도 오래 남았다. 항상 '괜찮아'라는 분위기를 감고 있는 덕분에 집안의 구심점 역할을 해온 할머니가 힘을 잃자 집안의 분위기가 처지기 시작한다. 오랫동안 정답게 살아왔던 배우자를 잃은 탓인지 할머니는 부쩍 늙은 것만 같았다. 집안사람들 모두는 할머니를 정말 사랑하고 있었고 그래서 할머니가 예전처럼 기운을 회복할 방법이 없을지 고심한다. 그 때 손자들의 머리를 스친 것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처음으로 함께 본 영화의 상영회를 하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영화는 '로마의 휴일'이었다. 손자들, 정확하게는 대부분의 일을 주인공이 맡지만 일은 착착 진행되기 시작한다.

이야기의 대부분은 석양처럼 붉지만 아련한 분위기로 시작한다. 당시에는 소중하다는 것을 몰랐지만 후에는 추억이 되는 것 말이다. 하지만 주인공들이 그 상태로 안주했다면 그들의 옛 이야기는 결코 추억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다섯 편의 이야기 속의 주인공은 때로는 영화를 매개로 시간을 견디고 변화해나간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끝이 났을 때 영화가 그들에게는 구원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 모든 이야기가 하나하나 빛이 났을 뿐만 아니라 매개가 된 영화를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한 '영화처럼' 정말 재밌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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