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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오스틴의 미로
엠마 캠벨 웹스터 지음, 하윤숙 옮김 / 현대문화센터 / 2008년 8월
평점 :
품절
영상물에 비해서 책은 상상이 끼어들 여지가 큰 매체다. 그래서인지 소설을 읽을 때는 종종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만약 주인공이 저쪽으로 가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하는 것이다. 이야기 자체는 주인공이 선택하는 방향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지만 주인공이 가지 않은 길도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좋아하는 이야기는 몇 번이나 읽게 되지만 주인공이 가지 않은 길은 알 길이 없다.
이런 고정되어 버린 이야기가 또 다른 생명력을 얻어 주인공이 다른 선택을 했을 때의 결과를 보여준다면 어떨까. 이런 생각이 실제로 책으로 나온 것이 바로 이 책 '제인 오스틴의 미로'다. 읽는 사람은 '오만과 편견'의 주인공인 엘리자베스 베넷의 입장에서 선택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읽는 사람이 엘리자베스 베넷이라고 가정하고 적절한 재능을 쌓아가며 원하는 사람과의 사랑을 이루면 성공이다. 이야기의 주요 기둥은 '오만과 편견'이지만 제인 오스틴의 다른 작품의 인물들이 읽는 사람의 선택에 따라서 모습을 드러낸다. 말하자면 제인 오스틴의 작품으로 이루어진 게임북인 셈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내려가는 책과 달리 책은 여러 가지의 분기점으로 나누어져 있고 선택한 안에 따라 다른 페이지로 넘기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단계는 5단계로 되어 있고 선택에 따라 끔찍한 결말을 맞을 수도 있고 '오만과 편견'의 주인공인 다아시나 '엠마'의 주인공 나이틀리와 결혼하는 결말을 맞을 수도 있다. 단순히 다아시와의 결혼을 꿈꾸는 책이라면 이 책은 그저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이 책에서 나오는 분기점이 꽤나 흥미롭다. 가령 엘리자베스의 언니 제인이 말을 타고 나갔다가 몸이 아파져서 빙리가 머무는 저택에서 요양하는 부분에 도달했을 때 엘리자베스는 언니를 만나러 들판을 가로질러 걸어간다. 이 때 분기가 등장하는 것이다. 왼쪽 길로 갈 것인지 아니면 오른쪽 길로 갈 것인지 말이다. 제대로 선택을 한다면 '오만과 편견'의 원래 이야기대로 저택에 도달할 수 있지만 잘못 선택한다면 집시 아이들에게 둘러싸이고 만다. 더구나 아이들이 돈을 달라고 요구하자 겁에 질려서 조금 내밀고 도망치려다 잡혀서 얼굴이 망가진다는 결말로 끝이 난다. 난데없이 튀어나온 강제종료인 셈이다.
원래대로라면 선택한 페이지만 가서 읽는 식으로 진행해봐야겠지만 가지 않은 길은 어떤 결말일지 궁금해서 다른 길도 대부분을 다 살펴봤다. 그 가지 않은 길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엘리자베스가 콜린스의 청혼을 받아들였을 때의 결말이었다. '오만과 편견'을 읽을 때 느낀 것이지만 콜린스는 말이 너무 많다. 높은 사람의 비유를 맞추려는 태도도 지나쳐서 역겨운 정도이다. 그가 청혼을 해왔을 때 당연히 거절하는 선택을 했지만 그의 청혼을 받아들이면 어떤 결말이 나올지 궁금해서 넘겨봤다.
엘리자베스가 콜린스와 결혼을 하면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엄마와 자매들이 집에서 쫓겨날 필요가 없기는 하다. 이 결과를 엘리자베스의 엄마는 기뻐하지만 아버지는 한탄한다. 엘리자베스 역시 착잡한 심정으로 굳건히 참으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점차 불행해 하고 있었다. 거기에 엘리자베스에게 끊임없이 주절대는 콜린스, 엘리자베스는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다 손에 든 책을 콜린스에게 집어 던지고 만다. '이제 좀 그만해!'라는 말을 외치면서 말이다. 그런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콜린스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엘리자베스는 묘한 안도감을 느낀다. 이제 저 지겨운 인간의 말을 들을 필요도 없고 남자 상속인이 없으니 롱본의 집을 잃을 일이 없겠구나 싶었던 것이다. 단지 콜린스를 자연사한 것처럼 위장할 필요가 있었다. 잠깐의 기쁨을 누린 엘리자베스였지만 곧 불쾌한 스캔들의 대상이 되고 자매들의 원망을 산다. 집을 지켰지만 남편을 죽였을 지도 모르는 여자를 자매로 둔 언니와 동생들은 결혼 가능성이 막혀버리고 만 것이다. 그래서 결국 엘리자베스가 불행해진다는 결말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안 좋은 결말이지만 끊임없이 떠드는 콜린스를 참다못해 엘리자베스가 그를 죽이고 만다는 것이 약간 우습게 느껴지기도 했다. 더구나 콜린스를 죽인 책의 제목은 '설교집'이었다. 그 외에도 다아시와 피츠윌리엄 대령이 엘리자베스를 사이에 두고 결투를 벌인다든지 자신의 위치를 지키기 위한 엠마 우드하우스의 방해공작 등 원작에는 결코 없을 부분들이 많아서 읽으면서 내내 즐거웠다.
읽으면 읽을수록 선택을 조금만 잘못해도 안 좋은 결말을 낳는 것이 많아서 그 과정을 잘 헤쳐나간 엘리자베스의 영리함이 돋보이는 느낌이기도 했다. 마지막 5단계에 들어섰을 때 의외의 결말도 숨어 있고 악령 같이 등장하는 '맨스필드 파크'의 패니까지 만나 볼 수 있어서 읽으면서 정말 즐거웠다. 제인 오스틴의 많은 작품들을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으로 만나볼 수 있는 '제인 오스틴의 미로' 재밌게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