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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몽 ㅣ 호시 신이치의 플라시보 시리즈 26
호시 신이치 지음, 윤성규 옮김 / 지식여행 / 2008년 3월
평점 :
품절
호시 신이치의 작품은 보통 누군가가 등장하면서 시작된다. 대부분 N씨로 지칭되는 이름도 정확하지 않은 주인공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그 주인공의 일상에 정체불명의 인물이 등장하면서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이다. 알 수 없는 주인공에 더 괴이쩍은 존재가 등장하고 주인공의 일상이 뒤집히고 기괴한 결말을 맞는 것이 많은 호시 신이치의 작품에서 보이는 결말이었다.
허나 이번 '흉몽'에서는 그 영역이 더 넓어졌다. 인간이나 외계인이 주인공의 일상을 어지럽히던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귀신과 요괴까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디까지나 호시 신이치의 쇼트 쇼트이기 때문에 전설의 고향 같은 괴담이란 느낌은 아니지만 굳이 장르를 구분하자면 SF인 호시 신이치의 쇼트 쇼트에서 민담에 등장할 요귀를 보는 기분은 각별했다.
이 책 흉몽에서는 꿈에서 미래를 보고만 노인의 이야기처럼 독특한 상상력을 품은 이야기가 많지만 그 중에서 귀신이나 요괴가 나오는 이야기는 악령이 등장하는 '냉혹한 세상', 우연히 유령의 지시를 따랐다가 이득을 얻은 남자의 이야기 '지시', 술만 마시면 여자 귀신을 보게 되는 '밤과 술과', 서재에 나타난 귀신과 공존하는 남자의 이야기 '서재의 쓸모', 달이 밝은 밤에 식인요괴와 만난 노인의 이야기 '요괴', 유령에게서 능력을 받은 남자의 이야기 '다각경영', 숙직실에서 귀신과 마주치고 만 수의사의 이야기 '숙직'이었다.
하지만 '냉혹한 세상'의 악령은 여태까지 수많은 이야기 속에 등장해서 주인공을 괴롭히는 존재가 아니라 악당들의 수호신격인 존재였다. 오히려 사라지자 주인공이 고난에 빠지는데 악으로 끌어들인 후 파멸시킨다는 면에서는 악령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해 낸 셈이었다. 반면 '지시'나 '다각경영'에서는 조금 다른 느낌의 유령이 등장한다. '지시'의 경우에는 영매를 통해서 만나게 된 유령이고 '다각경영'은 우연한 사고로 마주치게 된 유령이다. 이 유령들은 사람에게 나쁜 영향력을 행사한다기보다 자신의 목적을 따로 가지고 있거나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저 그곳에 있었다는 느낌이 강해서 유령으로 등장하기는 하지만 사람과 별로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을 주기도 했다. 다만 '지시'에서 나오는 유령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부탁을 하고 '다각경영'에서는 자신을 성불시켜준 남자에게 능력을 선사하는 점이 달랐다. 물론 오랜 시간 갇혀 있던 유령이 준 능력이라 그런지 중요한 능력이라기보다 일종의 저주에 가까운 능력이었지만 말이다.
그런 유령이 있는가 하면 '밤과 술과'와 '서재의 쓸모'에 등장하는 유령은 울적한 시간을 기쁘게 함께 보내주는 벗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술만 마시면 등장하는 귀신이라거나 주인공이 혼자 있으면 서재에만 등장해서 말벗이 되어주는 귀신이라니 그렇게 기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더구나 귀신인데도 술을 안마시면 마주치지 않을 수 있고 서재에서 등장하는 귀신도 혼자 있고 싶다고 하면 자리를 피해주겠다 하니 귀신을 강제적으로 봐야 하는 것도 아닌 것이다. 귀신인데도 특별한 목적 없이 한가로운 시간을 같이 보낼 뿐인 존재라니 묘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 외에 '숙직'은 행운을 주는 기묘한 귀신의 이야기였는데 그 상황에서 깊게 파고들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찜찜한 마음 때문에 어쩔 줄 모르는 주인공의 태도가 공감이 가기도 했다.
이런 다양한 귀신이 등장하는 이야기들이 있었지만 가장 민담에 가까운 느낌의 이야기는 달이 밝은 밤에 산책하는 노인이 세 명의 식인 요괴를 만나는 이야기 '요괴'였다. 이 이야기에서는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노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이 노인은 밤에 산책을 다니는 취미가 있었다. 달이 밝은 밤의 산책은 정취가 있기도 했지만 문제는 이 노인이 식인요괴와 마주쳤다는 데에 있었다. 그것도 연달아 셋씩이나 말이다. 위기에 처한 노인의 상황은 긴장감 있는 것이었으나 그 상황을 대하는 노인의 태도는 초연한 것이었다. 더욱 놀라웠던 부분은 이야기의 결말이었는데 그 결말로 인해서 순간 멍한 기분이 들었다. 허나 가장 민담 속의 요괴이야기 같아서 마음에 든 이야기이기도 했다.
상상력의 끝이 없다는 말은 호시 신이치의 작품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말이다. 일정한 공식이 정해져 있는 것 같으면서도 매번 그 결말에 놀라게 되고 읽을 때마다 재미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 호시 신이치 쇼트 쇼트의 매력인 것 같다. 잔혹한 이야기도 없어서 편안하게 읽지만 그 기발한 상상력에 기분 좋게 놀랄 수 있는 '흉몽', 제목과 달리 기분 좋은 꿈을 꾸는 기분에 빠져 볼 수 있었던 것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