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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디는 끝났다
이은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6월
평점 :
절판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 타인의 표정에 민감한 편입니다. 타인의 일그러진 얼굴에서 기쁨, 슬픔, 분노 같은 감정을 읽어냅니다. 반면 사이코패스의 경우에는 감정을 읽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고는 인식할 수 있어도 그것이 기쁨으로 인한 것인지 슬픔으로 인한 것인지 구분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사이코패스가 아닌 보통 사람이라 해도 피에로의 얼굴 만큼은 구분하기가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사람의 눈을 현혹시키는 현란한 분장 속에 과장되게 그려진 표정으로 인해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헷갈리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로는 개그맨도 피에로와 같습니다. 사람들을 웃게 하기 위해서 우는 사람들인 그들이 자학적인 소재로 사람들의 웃음을 불러일으키려 할 때 그들이 웃고 있지만 뒤에서는 울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생겨납니다. 이 책의 주인공인 개그맨 이진수 역시 웃고 있지만 울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그는 대학교 때부터 연기를 배워왔고 배우가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하지만 사정은 여의치 않았고 그가 성공을 거둔 것은 개그맨으로써 였습니다.
정상의 개그맨이 된 이진수는 사람들의 주목이 자신에게 몰려 있는 그 기회를 이용해서 영화배우로의 전환을 모색합니다. 그것을 위해 자신이 지은 시나리오를 여기저기에 내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와 관련된 연락은 거의 오지 않았고 친하게 지내던 배우 스티브는 그에게 쓴 소리를 합니다.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이진수는 분통을 터뜨립니다. 인지도를 올리기 위해 선택한 개그맨의 길, 유명해지기는 했지만 그 일 자체가 그의 발목을 붙잡게 된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려 할 때도 배우였고 지금도 배우이건만, 사람들에게는 그는 희극배우가 아니라 그저 인기를 끌고 있는 개그맨이었던 것입니다.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로 인해서 정상의 인기를 끌고 있음에도 불만족스러웠던 이진수의 생활에 기이한 긴장감을 준 것은 한 통의 문자메시지였습니다. 열흘 후에 죽게 될 것이라는 한 줄의 문자, 처음 이 문자를 본 이진수의 반응은 무시였습니다. 하지만 카운트를 하듯 점차 자신이 죽을 것이라고 예고된 날이 가까워질수록, 하루에 한 번 섬뜩한 문자가 날아올수록 그는 불안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매일을 악몽 속에서 깨어나고 낮에도 백일몽에 시달립니다. 바쁘고 고된 스케줄을 소화하느라 그렇다고 치부하기에는 점차 그가 보게 되는 환상의 강도가 심해집니다. 공포가 엄습해오기 시작하자 이진수는 자신에게 유감을 품고 있을 두 사람을 찾아갑니다. 한 명은 오랜 시간 사귀었으나 일방적으로 차버린 옛 애인 오미영이었고 다른 한 명은 무명시절 돌봐준 선배였지만 언제부턴지 그런 관계가 부담스러워서 자신의 손으로 퇴출시킨 김웅이었습니다.
오미영은 이제 이진수를 다 잊었고 곧 중국에 나갈 거라며 그에게 화를 내고, 김웅은 넉넉하게 웃으면서 연예계보다 영업을 하는 지금이 마음 편하다 말합니다. 의심하고 있던 두 사람 모두 그에게 문자를 보내지 않았다며 부인한 것입니다. 이진수는 그로 인해 더 큰 혼란에 빠집니다. 누구를 믿어야 할 지 알 수 없었고 그에게 오는 협박문자의 그 날은 가까워져 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나타나는 끔찍한 환상과 환청으로 인해서 공포감이 극에 달한 이진수는 죽음의 날에 살아남을 방법을 찾기 시작합니다.
면도날을 이용한 잔인한 살인사건이 소재라서 읽으면서 부담스러울 때가 많았습니다. 더구나 이진수가 환각에 시달리면서 보거나 듣게 되는 내용이 너무 잔혹한 것이 많았구요. 하지만 형사와 범인과의 대화에서 시작되어 다시 사건 발생 열흘 전으로 돌아가는 구성은 꽤 인상 깊었습니다. 마지막 결말도 충격적이었지만 제일 마지막 부분이 더 충격이었구요. 하지만 살인사건과 그 범인을 밝히는 것보다 주인공의 심리가 문자를 받을수록 그리고 예고된 죽음의 날이 가까워질수록 불안정해지는 것이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어떻게 될지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가운데 숨 막히는 긴장감이 이어진 게 좋았구요. 죽음의 예고를 받은 개그맨의 이야기 '코미디는 끝났다'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