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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죽고싶은 나 1
케르스틴 기어 지음, 전은경 옮김 / 책들의도시 / 2008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람이 달에 한 걸음을 내딛어도, 우주로 여행을 가는 시대가 되어도 한 가지 변함이 없는 것이 있다. 서른살이 된 여성을 보는 주변의 시선이 바로 그것이다. 전에보다 덜 해졌다뿐이지 대체 결혼은 언제하냐는 것부터 들리는 소리는 그리 곱지 않다. 그 여성이 사회적으로 그다지 인정받지 않는 직업을 가지고 있고 학교를 제대로 졸업하지 않았다면 그 정도는 더해진다. 그렇다고 해서 친구들을 만나 속에 있는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세월을 흘렀지만 자신은 변함없어도 친구들은 각자 인생을 살기 마련이고 이미 극렬한 변화의 길에 들어선 것이 대부분이다. 결혼과 출산이라는 변화 말이다.
이런 우울한 상황에 충격적 선고까지 들은 여성이 한 명있다. 그녀의 이름은 게르다, 부모님이 아들을 기대했기 때문에 이름을 게르트로 지어뒀었고 그녀가 태어나자 A만 붙여서 게르다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 마당에 그 이름이 마음에 들일 없었던 그녀는 네 자매 중 막내이며 유일한 갈색 머리카락의 소유자다. 사실 갈색이면 어떻고 금색이면 어떻겠냐만은 결혼식의 신부가 화동으로 금발머리인 아이만 원해서 언니들이 전부 들어갔는데 혼자 남게 된 적까지 있다고 하니 머리색에 신경쓸 만하기도 하다. 그때 혼자 남은 게 울적하고 심심해서 할아버지 구두끈을 개 목에 묶는 아주 사소한 장난을 했는데 그게 큰 사건으로 번지고 말았다. 구두끈으로 묶인 개가 달려가자 할아버지 역시 끌려갔고 할아버지는 끌려가지 않으려 식탁보를 붙잡으셨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비싼 도자기 태반이 깨져버린 것이다. 결국 그녀에게 붙은 이름은 '마이스너 도자기 깨먹은 애'가 되었다.
친척들이 그녀를 싫어하는 것은 그렇다 치고 대학시절로 넘어가서 그녀는 문학작품을 공부했는데 어느 날 의사소설이 그 날의 과제였다. 그런 식으로 '쓰레기 작품'을 써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는데 게르다는 의사소설에 매료되고 만다. 되려 의사소설을 한 권 뚝딱 완성하고 그것을 출판사에 보냈다. 그런데 그녀에게 글 솜씨가 있었는지 출판사는 그 소설을 출판하기로 하면서 다음 작품은 언제 쓸 것이냐고 묻는다. 급기야 게르다는 재미없는 학업을 그만두고 전업 작가로 나선다. 그때 그녀의 나이 스물, 그저 소설을 쓰는 것이 좋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10년이 흘러서 그녀의 나이 서른, 아직도 소설을 쓰는 것은 즐겁기만 하지만 충격적인 통보를 받는다. 그녀의 책을 출판하던 오로라 출판사가 다른 출판사와 통합되면서 그녀가 활약해 온 시리즈물이 폐지된다는 것이다. 그나마 그녀를 아끼는 담당자가 다른 일거리를 구해주는데 로맨스 소설만 십년을 써 온 게르다에게 뱀파이어 소설을 쓰란다.
허나 짜증이 머리 꼭대기까지 차올라도 게르다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인터넷에서 자신의 증세를 확인하고 자가진단한 병명인 '신경증적 우울증'을 되뇌는 것뿐이었다. 그 상태에서 방문하게 된 부모님 집에서 얻게 된 수면제 35알. 게르다의 엄마는 약국에 갖다 주라면서 준 것이었지만 그녀는 이것을 하늘이 내려 준 기회라고 여긴다. 자살을 결심한 것이다. 답이 나오지 않는 자신의 인생에서 얻게 된 행운이고 이대로 대책 없이 늙게 되느니 죽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실행에 나서 자신의 물건을 하나하나 정리하기 시작한다. 자신이 죽은 후에 이상한 물건이나 지저분한 물건이 발견되어서 자신의 이미지가 망가지지 않길 바란 것이다. 또한 자신의 물건을 가족과 친구에게 남기는데 그 과정에서 속에 있는 말을 담은 편지를 준비한다. 어차피 죽을 마당에 못할 말이 뭐 있겠나 싶었던 것이다. 가령 가장 친한 친구에게는 널 정말 좋아하지만 네가 부른 노래만은 참을 수 없다거나 새로 와서 뱀파이어 소설을 쓰라고 하는 편집장에게는 당신의 소설은 어설프기 그지없다고 적는다. 그 외에도 엄마, 언니들에게, 아끼는 대녀에게, 내심 좋아했던 이모할머니에게도 편지를 쓴다.
그 후 무리를 해서 호텔방을 잡고 죽는 순간 입을 붉은 드레스와 구두를 산다. 자살계획이 착착 진행되어 이제 수면제 35알을 입에 털어 넣기만 하면 게르다의 계획은 완료될 예정이었다. 물론 대녀와 이모할머니 말고는 독설을 적은 편지도 보냈겠다 그야말로 죽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놈의 허영심이 게르다의 발을 붙잡았다. 입고 있는 붉은 드레스가 자신에게 너무 잘 어울려서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 보였고 아래층에 내려가서 칵테일 한 잔 하면 어떻겠냐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하필 아래층에서 친구 부인이 바람피우는 현장을 목도하고 어쩌나 하고 있는 와중에 친구가 나타나서 하소연하기 시작한다. 어떻게든 친구를 떼어내고 위층 호텔방에 돌아가서 자살을 하려는 게르다와 계속 그녀에게 달라붙으려는 친구의 줄다리기가 이어지고 끝내 게르다는 자살에 실패하고 만다. 여기서부터 그녀의 고난이 더해진다. 갈 곳도 없어진데다가 온갖 독설을 담은 편지는 이미 지인들의 손에 들어간 상황, 이때부터 게르다의 상황을 수습하기 위한 노력이 시작된다.
우울한 인생이라고 해서 자살을 하는 것이 옳지는 않지만 읽다보면 게르다의 입장을 십분 이해하게 되었다. 너무 이입한 나머지 그녀의 자살을 방해하는 올레의 등장에 함께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게르다가 죽기를 원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녀가 처한 상황에 나도 모르게 동조했던 것이다. '한 번 죽기가 이렇게 힘들다니'라고 생각하는 게르다에 폭소하기도 하고 어떻게든 그녀가 친구 올레를 쫓아내길 바랐지만 상황은 꼬여만 갔다.
전반에는 자살을 결심하는 상황인 만큼 사실 유쾌한 내용은 아니다. 허나 웃게 되는 상황 묘사와 독설을 담은 편지에 정말 유쾌하게 읽었다. 하지만 이 책 '오늘 죽고 싶은 나'의 진짜 재미는 게르다가 자살을 실패하고 모든 상황의 수습에 나선 이후에 있었다. 그녀를 아끼는 주변 사람들의 마음이 따뜻하기도 하고 상황이 하나씩 뒤집혀가는 것을 즐겁게 지켜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게르다의 독설이 담긴 편지를 읽게 된 사람들의 반응 역시 큰 즐거움 중에 하나였다. 게르다의 유쾌한 자살 소동 '오늘 죽고 싶은 나' 정말 재밌게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