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노크 소리가 ㅣ 호시 신이치의 플라시보 시리즈 18
호시 신이치 지음, 윤성규 옮김 / 지식여행 / 2008년 2월
평점 :
품절
깊은 숲 속 한적한 길에 두 여자가 웅크리고 있다. 피난처인 산막으로 가는 한적한 길, 함부로 움직이면 발견되고 만다. 그렇다고 길을 벗어나면 돌아갈 길을 잃을 뿐 아니라 숲에서의 생존확률은 높지 않다. 그 때 앞 쪽과 뒤 쪽에서 발소리가 들려온다. 분명 둘 중 하나는 두 여자를 찾는 형사의 것이지만 다른 하나는 도끼를 든 살인마의 것이다. 두 여자는 망설인다. 어느 쪽을 선택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운 좋게 형사를 선택한다면 형사의 보호를 받을 수 있을 테지만 살인마를 선택한다면 피묻은 도끼에 희생될 뿐이다. 가까워져 오는 발소리에 두 여자는 두려움과 초조함에 휩싸인다. 그리고 선택한다. 그 선택이 살인마의 앞으로 뛰어드는 것이 될 것인지 목숨을 구할 유일한 것일지 알 지 못한 채…….
얼마 전 우연하게 본 일본 드라마 '리모트'에 나온 한 장면입니다. 숲 속의 두 여자가 있는 장면에서 시작되어 누군가의 발소리로 상황이 급변하고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이 이 책 '노크 소리가'를 떠올리게 하더군요. 이 책에 등장하는 이야기와 달리 숲 속에서 시작된 이야기도 아니고 한 시간 정도의 드라마 속의 한 부분이지만 누군가가 등장하면서 이야기가 발전하고 선택에 따라 변하는 결말이라 문득 이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호시 신이치의 플라시보 시리즈 '노크 소리가'에 실린 대부분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노크 소리가 났다.'
호시 신이치의 쇼트 쇼트 중 다수는 단순한 공간에 누군가가 있고 그 장소에 다른 누군가가 등장하면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상상 외의 이야기 전개를 보여주다가 누군가가 떠나면서 이야기가 끝이 납니다. 그 떠나는 누군가는 앞서 왔던 이 일수도 있지만 원래 있던 이 일수도 있습니다. 또한 그 누군가는 'N씨' 혹은 그저 '남자'라는 식으로 표현되어서 애매모호한 점이 더해지구요. 주체가 사람이 아닌 경우까지 있으니 이야기의 모호성은 더해집니다. 단순한 구조 그 와중에 상상을 뒤집는 전개를 보여주는 거지요. 그래서 호시 신이치의 작품을 볼 때 자주 떠오르는 생각이 연극으로 상연하면 좋겠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지나치게 이야기가 짧기는 하지만 한 장소에서 벌어지는 이야기, 누군가 등장해서 벌어지고 누군가 퇴장하면서 끝이 나는 이야기라는 점이 그런 생각을 자주 하게 했습니다. 이번 '노크 소리가'의 경우에는 그런 생각이 더 자주 들더군요. 노크는 누군가의 방문이 있음을 말하니까요.
거기에 이 한 줄 '노크 소리가 났다.'는 상상력을 꽤나 자극하는 면이 있습니다. 사실 누군가가 이야기에 참여하는 것은 전화벨이 울리면서라든지 초인종을 울린다던지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노크 소리라는 것은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누군가가 밖에 서 있는 셈입니다. 알 수 없는 그러면서도 인간적인 누군가가 밖에서 누군가의 생활이나 이야기에 끼어들려고 한다는 점이 호기심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더군요. 밖에 누군가는 너무도 두렵지만 동시에 설레는 변화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공포는 그 진실이 드러나기 직전이 가장 강렬하니까요. 이야기 속에서 주인공을 공격한 사람이 정체불명의 누군가였던 것과 주인공의 친구 모모씨라고 밝혀진 이후의 긴장감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매번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두근거리면서 읽었습니다. 이번에는 어떤 이가 등장할 것인지, 어떻게 전개되어 갈 것인지를 말입니다.
그 점을 가장 즐겁게 생각하면서 읽은 탓에 뒷부분은 사실 좀 실망스러웠습니다. 권이 얇을 것을 우려한 탓인지 '노크 소리가 났다.'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24가지 이야기 중에서 15번째 이야기 '인형'까지더군요. 물론 누군가의 개입으로 시작되는 이야기이고 등장인물이 모호한 호시 신이치 특유의 특징은 뒤에 등장하는 이야기 쪽이 더 강합니다. '노크 소리가 났다'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호시 신이치의 쇼트 쇼트 치고 약간 긴 편인 10~12쪽 정도고 등장인물의 이름도 명확하게 '하라구치 아키오'라는 일본이름이 나옵니다. 하지만 '노크 소리가 났다.'라는 문장이 주는 긴장감을 즐기고 있던 터라 뒤가 아쉬웠네요.
짧은 이야기, 긴 여운의 쇼트 쇼트는 부담 없이 읽을 수 있기도 하고 흡입력도 큰 편이라 단숨에 읽게 되는 편입니다. 이번 '노크 소리가'도 다르지 않구요. 정체불명이어서 더 긴장감을 느낄 수 있는 '노크 소리가' 아주 재밌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