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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 - 신달자 에세이
신달자 지음 / 민음사 / 2008년 3월
평점 :
품절
중학교 2학년 때, 어느날 밤 갑자기 죽는다는게 너무 무섭게 느껴진 적이 있었습니다. 흔히 귀신이야기도 했고 사람은 죽는다는 것도 알고는 있었지만 가까운 사람이 죽은 기억도 거의 없었고 피상적인 것으로밖에 죽음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왜 그런 감정이 그 때 밀려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이후로 한 동안 잠을 자고 싶지가 않더군요. 언젠가는 끝없이 잘 텐데 지금 자는 일이 너무 무익하게 느껴졌구요.
죽음으로 소중한 사람을 잃는다는 것부터 오만가지 생각과 불안이 머리를 복잡하게 했지만 가장 큰 두려움은 건전지가 다하듯이 뚝 하고 목숨이 끊기고 영혼이니 전생, 내생 같은 것이 없는 게 죽음이면 어떻하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별 쓸데없는 걱정으로 잠을 설쳤나 싶지만, 지금도 죽음이 그렇게 뚝 끊어지는 형태면 어떻하나하는 점은 두렵습니다.
이 책 '나는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는 시인 신달자의 에세이 입니다. 그녀는 24년간 남편의 병수발을 했고 책은 남편의 죽음에 대해서 말하며 시작합니다. 그녀가 묘사하는 남편의 죽음 그리고 이후가 제가 생각하는 두려움의 모습과 근접해서 그런지 이 생각이 읽는 내내 떠나지 않더군요.
유명한 분이라는 것 말고는 저자분에 대한 사전지식이 많지 않아서 이 책 제목 '나는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를 보고 남편 분이 그때 돌아가셨다는 이야기인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읽다보니 이 때가 저자분이 대학원에 진학하고 살아남기 위해서 안간힘을 다해 버티던 시기라는 걸 알겠더군요.
그녀의 남편, 심교수라고 지칭되는 분은 지금으로부터 28년 전에 뇌졸중으로 쓰러지셨다고 합니다. 그 때 그녀의 나이 서른 다섯이구요. 아이 셋과 부인, 어머니를 부양하던 가장이 그렇게 쓰러졌으니 그 때의 충격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23일간의 중환자실 생활과 환자가 눈을 뜬 것으로 행복이 돌아올 줄 알았던 순진함, 이후 24년간의 병수발이 저자분의 감성을 실어 하나하나 담겨있습니다.
책을 보면 주위 사람들이 가장 먼저 하는 말은 '재밌어?'라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이 책에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 지를 모르겠더군요. 처음에는 그 질문에 맞지 않게 '불쌍해'라고 답했습니다. 가족이고 남편이고 아이의 아버지이기는 하지만 그 분을 붙잡고 버티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저자분의 노력이 안타깝게 느껴졌으니까요.
쓰러지기 전과 다른 사람처럼 변해버린 사람을 돌보고 모든 패악을 다 받아내는 것도 인간적 굴욕을 감내해야 하는 것도 생계를 책임지고 아이를 키우고 시어머니를 모시고 하는 것도 전부 한 사람에게 쏠려 있다는 게 읽는 순간 그렇게 마음 아플 수가 없었습니다. 특히 환자가 성질을 부리면서 빗자루로 때렸다는 부분에서는 할 말을 잃었지요.
하지만 점차 그 생각이 변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버틴 모습은 안타깝지만 오히려 모든 고통을 전가하는 남편을 불쌍하게 생각하고 아끼는 모습에 감히 동정을 보내도 좋을지 결정할 수가 없었구요. 더구나 마흔 살에 대학원에 진학하고 박사학위를 받고 교수직에 오르는 것,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서 빚도 전부 청산하고 경제적 안정도 찾고 그렇게 자신을 괴롭힌 남편에게 운전기사와 차를 선물하는 모습이라니...
가장 좋았던 부분은 역시 교수가 되어서 그 쪽 강의를 위해 외박을 하고 자유를 만끽하는 부분이었어요. 모든 걸 희생하는 사람, 존경스러운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다시 찾아가는 모습이라 그게 후련하기도 하고 같이 기뻐하게 되더군요. 그 때도 굴레이면서 애증의 대상인 남편 병수발 도중이었지만요.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꾸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같이 분해하고, 간신히 숨을 쉬나 했더니 시어머니의 병수발까지 9년이나 하게 된 상황에 안타까워하고, 지지 않고 버텨내는 모습에 감탄하게 만들더군요. 글을 읽으면서 울고 웃고 한다지만 그 만한 흡입력을 가진 책은 많지 않거든요.
실화라는 점도 있지만 중간 중간 들어간 붉은 활자로 나타나는 시와 마음을 흔드는 이야기에 굉장히 인상 깊게 봤어요. 읽고 나면 복잡한 심경이 되어서 한 마디로 어떻다고는 표현할 수 없지만요. 굳이 말하자면 '존경스럽고, 안타까운' 정도일 것 같네요. 표지의 붉은 부분이 읽기 전에는 붉은 노을 같아서 아름답게 느껴졌는데 읽고 나니 붉은 눈물 같아 마음이 싸하구요. 오랜만에 인상적인 에세이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