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봇코짱 ㅣ 호시 신이치의 플라시보 시리즈 20
호시 신이치 지음, 윤성규 옮김 / 지식여행 / 2008년 3월
평점 :
절판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에 대한 추천평으로 이런 문구가 있었어요. '이 책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천재성은 보여주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문구 였지요. 호시 신이치의 책 '봇코짱'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이 바로 저 문구였네요.
작가 자신도 후기에 이 책은 작가 자체를 쇼트 쇼트 스토리로 완성한 형태라 할 수 있다고 적었구요. 저는 그 말에 저 문구를 덧붙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즉, '봇코짱은 호시 신이치를 투영한 것이며 그의 천재성을 보여주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것으로요.
짧은 이야기는 긴 이야기와 달리 호흡이 짧고 쉽게 접할 수 있게 하는 장점이 있는 반면 뚝뚝 끊어지기 때문에 집중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이번만은 흔치 않은 예외라고 할 수 있었어요. 3장 남짓한 짧은 이야기지만 그래서 더 날카롭게 마음을 그리고 생각을 찔러들어는 데가 있고 오히려 더 깊은 여운을 주더군요.
책에 실린 36가지 짧은 이야기들은 각각의 특색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작가의 뛰어난 필력과 흡입력을 보여줍니다. 안의 내용물이 알 수 없는 초콜릿 상자를 집어 든 심정과 이 책 첫 장을 넘기는 기분이 비슷할 것 같네요. 여우 홀림이 된 남자의 장난에 어이없이 넘어가는 주인공을 보고서는 실소를 터뜨리게 되구요. 어둠 속에서도 볼 수 있는 인간의 진화형태에는 섬뜩한 느낌을 받게 되네요. 각 이야기 하나가 마치 초콜릿 하나를 먹는 것 같아서 읽는 동안은 달콤한 유쾌함이 함께하고 읽은 후에는 씁쓸한 여운이 따라오구요.
일본 3대 SF 작가라 해서 외계인이나 과학문명에 관련된 내용만 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아요. 소원을 들어주는 요정을 만난 여자라든지 호화로운 금고를 매일 닦는 것이 취미인 남자 같이 사람의 욕망을 건드리면서도 유쾌하게 읽어나갈 수 있는 내용도 꽤 있구요.
그 중 가장 인상적인 이야기는 역시 '봇코짱'이었어요. 내용은 어느 술집 주인이 취미로 봇코짱이라는 애칭의 로봇을 만들어냅니다. 봇코짱은 그다지 똑똑한 로봇은 아니라 단순한 대화에 응답하는 정도였지만 외모는 인간과 매우 흡사하고 아름다워서 손님들은 그녀가 로봇이라는 사실을 몰랐지요. 단순히 일하는 아가씨로 안 손님들은 봇코짱에게 술을 사줬고 그녀가 마신 술은 관을 통해 돌아와 술집주인이 다시 그 술을 팔 수 있게 되어 있었구요. 술집주인은 덕분에 장사도 잘 되고 술도 다시 되팔 수 있으니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었어요.
그런데 짤막한 대답밖에 하지 않는 봇코짱을 사람들은 도리어 더 마음에 들어 하고 심지어 그녀를 깊이 사랑하게 된 젊은이까지 나타납니다. 봇코짱이 대답하는 말은 술집주인이 입력해 둔 짤막한 대답이고 로봇인 그녀의 마음 같은 것은 그 말에 담겨 있지 않은데 말이에요. 하지만 사람들은 그 말들을 자기 좋을 대로 자신의 감정에 맞춰 해석하지요. 예상 밖의 결말 그리고 이야기 끝에 묘사된 술집의 정경과 봇코짱의 '안녕히 주무세요'라는 말의 여운이 유난히 길었던 이야기 였어요.
다른 이야기로는 더울 때마다 생명체를 죽여 분노를 억누르지만 매년 죽이는 대상이 점차 커지고 있는 남자의 이야기 '더위', 어느 박사의 아기가 유괴당하고 박사가 로봇설계도를 내놓도록 협박받는 이야기 '유괴', 항상 정확한 시간을 알려 유난히 아끼고 소중히 여긴 시계가 시간을 틀린 이야기 '애용하는 시계'가 기억에 남네요.
이야기 하나하나가 인상적일 뿐 아니라 예상외의 결말을 보여주는 터라 읽는 재미가 뛰어난 책이었어요. 보통 소설은 어느 정도 읽다보면 이런 식으로 전개되겠구나 하는 감이 잡히는 데 이 책에 실린 이야기의 결말은 감이 안 잡히더라구요. 그래서 이야기가 끝날 때마다 매번 감탄했구요. 작가의 상상력과 사람의 욕망에 대한 통찰을 유쾌하지만 가볍지 않게 담아낸 단편 모음집이었어요. 매우 재밌었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