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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
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 솔출판사 / 200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요즘 소설 읽는 재미에 푹 빠져있다. 엄밀히 말해 '소설'에 빠져있다기보다는 갈수록 무미건조해져가는 이 세상에서 '이야기'가 주는 마력에 빠져있다고나 할까, 아님 지루한 일상 속에서 '소설같은 이야기'가 그립다고나 할까.
하지만 오랜 공백을 두고 다시 한 권, 두 권을 읽다보니 새록새록 재미를 느끼면서도 조금 지나 또 소설을 놓게 되는 건 아닌지 하는 의구심이 들 때도 있다. 지리멸렬한 서사 구조, 얄팍한 주제의식, 묘사의 부정확성... 소설이란 독특하고 매력적인 장르가 지녀할 바를 놓치고 있는 글들을 읽을 때 그렇다.
그러던 중, '열정'이라는 제목과, 아름다운 여인의 초상화가 고상하고 신비로운 색감으로 그려져 있는 책 표지, '헝가리'의 작가라는 세 가지 사실이 어우러져 풍기는 묘한 우수에 이끌려 이 책을 읽게 된 건 정말이지 행운이었다. 소설 예찬을 당분간 간직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건 정말이지 행복하다.
소설의 이야기는 매우 단순하다. 19세기 제국주의의 끝 무렵 귀족 사회에서 성장한 두 남자. 한 남자는 부유하고 한 남자는 가난하다. 그에 따라 생성된 그들의 변할 수 없는 성격과 운명. 부유한 남자는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지만 아내는 그의 친구와 사랑에 빠진다. 결국 세 사람은 배신으로 상처받게 되고 사랑과 헌신으로 이루어진 고귀한 관계는 깨어진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뒤이어지는 진실... 숱한 영화, 문학 속에서 익숙해진 그림이고 이렇게만 살펴 보면 오히려 순정만화의 스토리라고 해도 좋을 듯 하다.
하지만 그러한 스토리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사랑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외국 문학계의 대단한 칭찬을 보고 출판사의 허위 광고일거라고 예상한 것을 부끄러워하며 결국 고개를 주억거리게 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이 소설을 감히 '고전'의 반열에 올려놓아도 손색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이유는.
무엇보다 이 소설에서는 요즘 소설이 잃어가고 있는 고귀한 인간성을 엿볼 수 있다. 삶, 사랑, 열정, 운명, 우정, 가치, 시간, 고독, 고뇌, 기다림, 책임, 진실... 우리가 읽는 소설 뿐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서 점점 잊고 사는 '진정함'을 다시금 되새기게 하는 것이다. 이 세상 누구의 삶이나 시간과 공간에 상관없이 매한가지로 유치하고 우주의 한 점에 불과할 지 모르나 인생의 가치는 '의미'에 있는 것처럼 스토리만 따지자면 삼류 연애소설의 한 장면일지 모르나 주인공의 고뇌는 어느 철학서 못지 않다.
이러한 주제의식을 뒷받침해주는 것은 어느 부분 하나 모자람없이 탄탄하게 자리하고 있는 소설적인 완성도이다. 주인공의 독백으로 소설 전반을 이끌어 가지만 단 한 번도 그 흐름이 지루하다거나 건너뛴다거나 묘사가 생생하지 않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훌륭하게 이야기가 전개된다. (번역자의 역량 또한 대단하다 느껴지지만) 여러번 곱씹고 기억하고 싶게 만드는, 잠언의 한 구절 같은 아름다운 문체도 넋이 나갈 지경이다. 현재와 과거를 적절히 넘나드는 구성 역시 자유롭다.
이 책이 고전의 반열에 오르길 바라는 마음을 되돌아보며 과연 고전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잊고 있던 이 질문에 대해 약간은 생소한 기분으로 대답해 본다. '작품이 특수한 시대상, 사회상을 반영하고 거기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 하나로 모든 시대와 사회를 비추어 낼 수 있다면 다시 말해 부분에서 전체를 보게 한다면, 그리고 시간의 흐름에 상관없이 변함없는 '인간'의 모습을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고전'이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