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의 변명.크리톤.향연.파이돈 - 개정신판 세상을 움직이는 책 34
플라톤 지음, 박병덕 옮김 / 육문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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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인문학의 위기론'이 새로운 대응을 낳고 있다.  '인문학 위기론'의 출처인 대학에서는 비인기인문학과들이 통폐합의 수난을 겪고 있다. 반면 상아탑을 나선 공간에서 '인문학'은 새롭게 싹을 틔우고 있다. 백발의 은퇴한 교사가 고전 강의를 듣기도 하고, 점심 시간에 여고동창들과 자식 자랑,며느라 뒷담화에 열을 올리던 아주머니들이 노트에 열심히 필기를 한다. 거기에 '희망의 인문학'의 새로운 버전으로 노숙자나 빈곤층을 위한 강의들로 계속 해서 이어지고 있다.  이윤의 노예처럼 그려지던 '전문경영인'들 역시 고액의 '인문학' 강좌를 열심히 따라다닌다. '인문학'이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자기를 새롭게 배치하려는 노력은 일단 가상하다.

그런데 생각을 해보면 여기에는 무언가 뒤틀림이 느껴진다. 특히 수천만원을 호가한다는 CEO들을 위한 인문학은 더욱 그렇다. 인터넷에서 본 몇 몇 사진들은 중세 시대 철학의 굴욕을 비유하는'신학의 시녀' 보다 오히려 더 굴욕적이다. 좀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자본의 시녀'가 된 '철학'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그렇게 '철학'은 허약하지 않다.) 별 다섯개 짜리 특급 호텔 리셉션장에는 고급 양복을 입은 CEO들이 눈을 반짝이며 앉아 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 대학 교수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에 감탄하며 '현묘의 도'를 깨달은 듯 한 고개짓을 한다. 하지만 나는 그 고급-아니 고가의- 인문학 강좌에 앉은 자들은 결코 '현묘의 도'를 깨달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경영인들을 너무 평가절하한다고 생각치는 말기 바란다. 그들 대부분은 좋은 대학과 좋은 대학원을 나왔을 것이다. 국제수지 그래프를 읽는 눈은 누구보다 빠를 것이고, 수많은 성공심리학이 가르쳐준 '인간심리'에 대해서는 박사 학위자들보다 나을 것이다. 나는 모든 '경영인'들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훌륭한 경영인들은 수많은 노동자들에게 좋은 일자리와 그들의 가족들을 부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또한 좋은 직장 안에서 노동자들은 자기의 능력을 발휘하며 자신의 꿈을 이루어나간다. 평등한 노사관계가 보장된 곳이라면 공장의 최고 주인은 아니어도 동등한 주인정도로는 대접을 받을 수있을게다.(인문학의 배운 CEO들이 강좌가 끝나고 그런 태도로 돌변해주길 기대한다.)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인문학이 대중과 소통하려는 노력과 그에 대한 대중들의 뜨거운 반응을 욕하는 것은 아니다. 여러번 강조하겠지만 그런 방식은 칭찬받아야 한다. 플라톤의 '대화편'의 주인공 소크라테스도 좋아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방법론은 '대화' 였다. '대화' 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상대방'을 직접적으로 상정하고 이야기 하는 방식이다. 소크라테스의 '대화'는 다른 말로 하면 '소통'이다.전문적인 철학 담론을 논하며 담론의 철옹성 안에서 박는 방식은 이미 소크라테스의 것이 아니었다. 소크라테스의 소통은 '시장'에서 이루어졌다. 물론 소크라테스의 시장과 남대문 시장은 그 성격이 완전히 다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소크라테스의 교육이 결코 '아카데미아'에서만 머물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대개의 모든 그리스인들이 그랬듯이 그들은 이야기하기를 좋아하고, 토론하기를 좋아하며, 소통을 좋아하는 정치적 인간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강좌'에서 깨달음을 얻은 듯한 눈빛을 보며 '인문학의 부활'보다  '인문학'이 위기시대에 과연 어떻게 소비되는가를  생각한다. 이것은 당연히 '인문학'이 궁극적으로 어떻게 소비되는 것이 가장 '인문학적'인가에 대한 질문과 같은 것이다.

대개의 '인문학 강좌'들이 고전을 다룬다. 동양 철학하면 '논어','노자'들을 이야기할 것이고, 서양하면 '소크라테스-플라톤' 부터 시작될 것이다. 이 책 <소크라테스의 변명>은 플라톤의 '대화'편 중 가장 널리 읽히는 책이다. 좀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내가 학력고사가 끝나고 고등학교 겨울 방학때, 이 책을 읽었을때- 완전히 대학생 필독서 목록때문에 봤다. 왠지 고딩이 아닌 성인으로서 대학생이라면 이정도는 하는 생각에- 나는 이 책이 '소크라테스'가 쓴 줄 알았다.(요즘은 중학생들도 이 책을 읽으니 나보다 훨씬 앞서가는 녀석들이다.영어도 잘하고...무서운 놈들!!) 

소크라테스가 철학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왠만한 '철학 입문서'를 읽어본 사람들은 다 알것이다. 후대 사람이긴 하지만 역으로 인용하자면 철학사에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들에게서 일어났다. (니체는 이런 전환이 '이론적 인간'의 출현이라는 점에서 뜨악하게 바라본다.) 철학의 중심을 '자연'에서 '인간'으로 옮겨온 것이다. 물론 소크라테스의 인간은 '신의 섭리 하에 있는 인간'이다. 우리는 '시녀가 된 철학'의 시대를 지나 데카르트 쯤 와야지 '생각함으로 인해 존재하는 인간'을 만난다. 소크라테스라면 과연 가장 '인문학적'인-나는 여기서 이것을 거의 철학과 같은 개념으로 쓰고 있다만- '인문학의 용도'는 무엇이라고 생각했을 까?  CEO들에게 자신과 후배들이 남긴 몇 마디 명언들을 기억시켜 주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돈벌이로 복잡해진 머리를-비단CEO뿐만이 아니라- 잠시 세척하는 시간을 주는 것으로 사용되길 원했을까? 명언이 필요하면 포털 사이트 검색을 해보면 될 터이고, 고급스럽게 머리를 세척하려면 유명한 미용실에 가서 누우면 될 터인데...그럼에도 사람들은 '인문학' 강좌를 듣고, 감동하고,그리고 한 일주일 쯤 지나면 '강좌'에 갔었다는 사실만 기억하고 나머지는 잊어버린다.

소크라테스의 말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변명>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먼저 당신 자신을 돌보시오. 당신이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하기보다는 덕과 지혜를 추구하시오, 국가의 이익을 돌보기보다는 국가 자체를 돌보시오. 이것이 당신이 어떤 행동을 할 때 준수해야할 순서요."

'당신 자신을 돌보시오' 라는 말은 소크라테스의 명언으로 알려진 신전에 새겨진 신탁, '너 자신을 알라.'의 다른 버전이다. '자신을 돌보라'는 것은 무엇인가? 내 몸이 건강하고 쾌락을 유지하라는 것만을 뜻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너, 인간이라는 존재가 무언지 생각하라'는 말이다. 소크라테스는 '무지'로 자신만의 해답을 찾았다. 그리고 그는 이제 '상대와 스스로에게 질문하는자' 로 남는다. 그리고 '단순히 사는 삶'이 아니라 '잘 사는 삶'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에게 잘사는 삶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진리'와 하나 되는 삶, 정의를 실천하는 용기 있는 삶, 중용과 절제의 삶이다. BMW 7시리지를 타고 강좌를 빠져나가며 소크라테스의 감흥에 고개를 끄덕여봐야 자신의 삶의 방향을 바꾸지 못한다면 '단순히 사는 삶'일 뿐이다. 그리고 거기에 대개는 자본의 구조가 은폐해주는 사적 이익들이 숨어있다. 대신 '삶'의 방향을 바꿀 어떤 계기라도 얻게 된다면 비싼 돈 주고 수업들은 보람이 있을 것이다.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게 '돈'이었다면 그걸 써서 얻었다고 뭐라하지는 않는게 좋을 듯 싶다.

물론 오늘 날의 시각으로 보자면 소크라테스-플라톤의 철학이 성에 꽉 찰리는 만무하다. 그들의 자연철학은 요즘 시각에서는 실소를 머금게 한다. 하지만 그들이 철저히 이성의 추론으로 거기에 도달했다는 점에서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그 추론의 결과들이 때로는 신화적인 보편성을 얻을 수도 있어 보인다. 영화 같은데는 여전히 그런 장치들이 제법 잘 활용된다. 또한 신화적 틀에 잡혀 있는 인간관이나 영혼관같은 것들도 마찬가지다.(예전에 소비에트에서 나왔던 철학입문서 같은데서는 그들이 유물론을 배격했다는 이유로 귀족철학의 대변자,유심론자라는 식으로 매도당했다. 그런 세속적인 해석방식은 당시부터 지겨웠다.) 거기에 소크라테스의 신적인 절대성에 대한 합일 같은 개념들은 '신이 사리진 시대'의 눈으로 보면 70년대 헤어스타일을 보는 듯 하다. 그가 상정하고 있는 '절대적 선'이나 '절대적 덕'의 개념들은 신이라는 논리적 소실점이 있다면 가능하지만, '신'을 괄호 치고 나면 과연 그 '선'과 '덕'을 규정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남길 수 밖에 없다. 하기야 이런 주제들은 철학사의 근본적인 숙제들이니까 소크라테스씨에게 모두 물어볼 필요는 없다. 

내가 생각할 때 고전의 가르침은 사실 '깨달음'의 즐거움보다는 '뱀의 독'처럼 쓰다는데 있어보인다. <향연>에서 알키비아데스가 반어를 섞어가며 소크라테스를 칭송하는 대목에 나오는 말이있다. 

... 뱀에 물린 고통을 맛본 사람은 뱀에 물려 본 일이 있는 사람 이외에는 그 고통이 어떠한 것인지를 말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그런데 나는 독사의 이빨보다도 더 심한 고통을 주는 어떤 것에 물렸습니다. 그것도 제일 아픈 곳을 말입니다. 즉 심장을, 아니 영혼을 물렸어요. 그것을 무엇이라 부르든 상관없습니다. 나를 문 것은 바로 철학이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과도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알키비아데스의 말을 어떻게 해석하든지는 사람에 따라 다를 것이다. 나는 철학의 즐거움이 또한 고통을 동반한다는 말에는 동의한다. '독사의 이빨'이 '자신'을 물어뜯는 치열함이 없다면-그것은 끝없는 자기 성찰,각성, 수련.그리고 실천을 동반한다- 그것은 '철학'이 아니다. 우리가 심장이 없는 사람을 허수아비라고 부르듯이, 철학의 심장을 얻으려는 '분투'(쓰고 보니 이 말이 얼마나 힘든 말인가?)가 없는 '인문학'은 허수아비에게 악세서리를 하나 더 달아준 것에 지나지 않는다. 프라다 가방을 매고, 아가타 귀고리를 하고 있어도 허수아비는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고전을 읽을 수록 구양수가 말란 '다상량' 의 중요성을 절감한다.

 多聞  多讀 多想量(다문 다독 다상량)

다독은 다상량에 비해 얼마나 쉬운 일인가? 요즘 내겐 진짜 명상이 필요하다.

생각의 꼬리를 놓치지 않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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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08-12-24 10:40   좋아요 0 | URL
저는 박종현님이 옮기신 책으로 읽었는데요, 희랍어의 원래 뜻을 보면서 읽을 수 있어서 더 좋았던 것 같습니다. 고전의 참 의미는 그 시대로 돌아가서 그 시대의 마음으로 읽는 데서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고전을 어떻게 현대화할지는 그 시대의 마음으로 읽고나서 생각할 문제겠지요, 이 책에 나오는 문장과 단어들의 논리와 그것이 어떻게 증명되는 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인문학 강의란.. 정말 허수아비에 달린 프라다 가방이겠죠. (아, 안녕하세요:> )

드팀전 2008-12-24 17:29   좋아요 0 | URL
^^ 안녕하세요
 
고대철학이란 무엇인가
피에르 아도 지음, 이세진 옮김 / 이레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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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피에르 아도의 <고대철학이란 무엇인가?>는 흥겨운 책이다. 귀에 익은 발라드처럼 주선율이 확실하다. 화성들이 다채롭다. 미리 겁먹는 사람들을 위해 말하지만,  피에르 아도가 만든 이 책에서 독자들이 구절양장 그리스 산길에서 미아가 될 일은 없다. 물론 너무 방심하면 자기 화장실 안에서도 길을 잊곤 하는 것이 인간인지라 장담은 못하겠다. 하지만 이런 말을 할 정도로 피에르 아도는 그가 <고대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말하고 싶었던 바를 명백하게-반복적으로, 수많은 증거들을 들어서- 이야기 한다. 

우선 이 책은 거스리의 <희랍철학 입문>같이 그리스 철학의 주요개념을 풀어놓고 있는 책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시작해야 한다. 그러니까 이 책은 플라톤의 '이데아'가 뭔지, 스토아 학파의 '아파테이아'가 뭔지 자세히 설명하지 앟는다. 이런 개념들이 책 속에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 개념들을 설명하는 것이 이 책의 주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래 묵은 그리스인들이 자기의 용어로 만든 개념들에 아픈 상흔이 있었다면, 이 책은 '치유의 반창고'가 충분히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의 주 선율, 즉 주목적은 무엇인가? <고대철학이란 무엇인가> 는 소크라테스 이전 부터 중세의 스콜라 철학까지를 주로 이야기 한다. 각 철학 학파들의 세계관, 자연관, 윤리관, 철학적 훈련등이 다루진다. 하지만 각 철학 사조의 차이점 보다는 고대 철학이 가진고 있는 공통된 점을  부각한다. 이것이 핵심이다. 그 공통점은 '삶의 양식'으로서의 고대 철학이다. 즉 '철학은 삶이어야 한다.' 라는 것이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생활양식으로서의 철학'이 오뎅탕의 대나무 꼬치이다. 그리고 피타고라스,소크라테스,플라톤, 에피쿠로스 뭐 이런 멤버들이 꼬치에 대롱대롱 끼워진 형형색색의 오뎅들이 되신다는 이야기다. 그렇다. 오뎅 심장을 관통하는 '막대기 자체'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은 이 책의 핵심이다. 그리스인들에게는 '철학을 한다는 것은 삶을 제대로 살아간다'는 것이었다.

피에르 아도는 '철학'과 '철학담론' 을 구분한다. 우리가 '철학'시간에 배우는 모든 철학사조들은 '철학담론'이다. 이것은 '철학들'이라고 이야기해도 별로 틀린 말이 아니다. 그렇다면 앞에 있는 '철학이란 무엇인가?'. 수많은 대중 철학서의 첫장 제목 같기도 한 이말. 저자는 '철학'을 '실천하는 삶' 이라고 말한다. 특히 고대철학기에는 이런 '철학'과 '철학담론'이 구분되지 않았다는 것이 저자의 입장이다. 이것이 분리되기 시작하는 것은 중세 시대- 초기 그리스도교의 영향이 빠져나가고 난 이후- 그리스도교가 갑자기 부상하면서 부터이다. 아도는 이런 취지에서 현대의 철학들,철학자들이 '이론화 경향'에 목숨거는 것에 대히 눈을 흘긴다. 고대 철학자들은 이성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삶을 추론해 냈다. 그리고 그것을 담론화하며 이와 함께 그들의 추론이 만들어낸 철학대로 살아나가려고 했다. 즉 이렇게 담론과 실천이 하나가 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철학'이라는 말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극단적인예가 '소피스트'들이다. 그들은 말의 철학을 했을 뿐이다.

이쯤 되면 아도의 입장이 명백해졌다. 그렇다면 이제 두 가지를 더 첨부해 주어야 세속적인 이분법에 대한 오해를 풀 수 있을 듯 하다. 하나는 아도가 '실천의 철학'을 말한다고 '담론'을 필요없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철학을 한다는 것은 결국 추론적 사고들을 정리하고, 논리화시키고, 정교화시켜서, 토론하여 교육하는 것이다. 아도는 '영성의 훈련'이라는 말로 고대 철학의 특징을 말한다. 현대 이론이 고담준론화 되어 있기 때문에 '거대 이론'이나 '담론' 이라는 말만 들어도 적대시 하는 태도는 기실 전혀 '철학'적이지 못하다. '담론'과 '실천'은 새의 날개처럼 우리들이 '더 나은 인간'이 되게 하는 철학의 목적에 기여한다.  다음으로 '실천'에 대한 부분이다. 이 '실천'이라는 것은 가끔 '행위'와 혼동되기도 한다. 아무래도  민주화 운동의 역사가 가져다 준 사이드 이펙트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아도가 말하는 '실천'은 거리에 뛰쳐 나가 구호를 외치는 '실천' 을 말하지 않는다. 또 '아는 것을 실천하자' 라는 의미의 '물리적 차원'의 실천만을 뜻하지도 않는다. 오해를 살 수 있는 말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인용해 보자.

어떤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실천적인 삶이 필연적으로 타인들을 향하는 것은 아니다. 행동으로써 발생하는 결과들을 노리는 생각들만이 '실천적인' 것은 아니다. 정신적 활동과 자기 내에 목적을 지니며 그 자체의 관점으로 개진하는 성찰들이 그 보다 훨씬 더 실천적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철학은 '정리적 생활양식'이었다. 그외에도 고대 철학에서는 '높은 곳에서 바라보기'와 같은 정관적인 태도가 장려된다. 이 들이 궁극적으로 이런 '거리두기'를 통해서 다다르고 싶었던 것은 무었인가? 이 점이 중요하다. 그것은 어떤 이에게는 '선'이었고 어떤 이에게는 '신'이었으며, 어떤 이에게는 '궁극적 쾌락'이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자기 감찰'로서의 자기 윤리학의 덕목이다. 즉 궁극적인 선에 다다가기 위한 개인의 절제와 금욕, 자기 훈련을 목적에 둔 '내먼적 실천형식'이다. 그리고 이들이 누구인지도 중요하다. 이들은 그리스 인이다. 그리스 인들은 '현재지향적' 이었으며 또 '실용적'이었다. 그들은 폴리스를 중심으로 누구보다도 더 '정치적'인 사람들이었다. 이들 철학자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했던 바는 '타인과의 대화'이다. 플라톤의 거의 모든 저서가 대화로 이루어져있다는 점은 상징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리스토스텔레스의 '실천'을 세속적으로 '내면으로의 소거' '타인과 세계에 대한 외면'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관적 태도'는 마치 현실의 지평을 떠나서, 관념의 즐거움만을 택하라는 것 처럼 해석하는 보수주의적 태도가 있다. 마치 '순수예술'에 대한 보수주의자들의 열정처럼 그것이 현재의 기득권에 아무런 해를 주지 않고, 자신을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다면 충분히 열린 마음으로 향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면의 성찰' 만을 무 가운데 자르 듯 뚝 잘라서 강조한다. 이것은 코끼리의 다리를 잘라서 '이것이 코끼리의 실체다' 라고 하는 것과 똑같은 무뢰한 짓이다. 세속적으로 말해서도 마찬가지다. '내면의 성찰' ,'영성의 훈련'을 위해서 소크라테스는 거의 거지처럼 살았다. 좀 극단적인 견유주의자 디오니게스는 노숙자였다. 유물론적인 에피쿠로스(마르크스의 박사학위 논문이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였다. 고병권이 번역하여 나와 있다.) 역시 '쾌락'을 '감각적 쾌락'과 '궁극적 쾌락'으로 나누고 후자를 쫓기 위해 금욕을 실천했다. 금욕이 덕목이었던, 스토아 학파는 말할 것도 없다. 거의 모든 그리스 철학은 '내면적 성찰'을 위해 '자기 절제'와 '금욕'을 요구 했다. 그런데 '타인에 대한 관계성'도 없고, '자기 절제'와 '금욕'도 없이, 쓸 것 다 쓰고, 누릴 것 다 누리며 현재의 감각적 세계의 모든 혜택을 배불리 누리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론'만을 빼먹어 쓰는 짓은 졸렬하고 무지한 짓이 아닐 수 없다. 그건 '철학'도 아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자면 '똥떵어리'일 뿐이다. 

피에르 아도의 말을 인용해 보자

철학의 실천은 개별적인 철학사조들의 대립을 초월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 우리의 '세계 내 존재','타인과의 존재'를 의식하려는 노력이며, 메를로 퐁키가 말한 것 처럼 '세계를 보는 법을 다시 배우고" 보편적 시각에 도달하기 위한 노력이다. 이 시각 덕분에 우리는 우리의 개별성을 초월하고 타자의 입장에 설 수 있다.

고대의 철학적 삶은 항상 타인에 대한 관심과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었다는 점을 결코 잊어서는 안되겠다.  

(프리드먼을 인용하여) 현대의 현자는 그토록 많은 심미주의자들이 혐오감을 보이며 외면했던 인간들의 하수구를 외면하지 않는다.

피에르 아도식으로 말해서 우리 시대의 '철학자'란 누굴까 잠시 생각해봤다. 단지 어떤 담론을 만들고 그에 대한 학자적 양심을 거는 수준을 말하는것이 아니다.(지금까지 이야기했는데 아직도 철학자를 그렇게만 말한다면, 내가 글을 친절하게 이해시키지 못한 것이다.) 이것은 '내면적 성찰'을 거쳐 '존재' 자체와 '삶'을 일치되게 만든 분들이다. 결국 우리 시대의 선생이라고 할 만한 분들, 장일순 선생, 전우익 선생, 권정생 선생....그리고 자연의 법을 거르지 않고 그에 맞춰 자연적 농법을 실천하는 농부들.. 이런 분들이 고담준론의 철학책 한 권 제대로 쓰지 않았지만 철학자들이 아닐까 싶다.

이제 다른 이야기를 하자. <고대철학>이 읽기 좋다는 이야기다. 이 책을 읽다보면 왠지 '동양 철학'과 유사한 점을 느끼게 된다. 피에르 아도가 윤리학을 중심으로 그리스 철학을 집중시키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틀린 것이 아니었다. 책 말미에 아도는 '보편적 스토아주의'라는 개념을 꺼낸다. 즉'고대 그리스 철학'에 담긴 생각들이 지역성과 시간성을 넘는 보편성을 띤 것이 아닐까 하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보편적 스토아주의'라고 하는 것에 대해 긴 설명을 하진 않지만 이것은 고대 인도, 중국의 철학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점에서 우리는 서양 철학을 공부하다 학문적으로 동양학을 배운 학자보다 오히려 더 유리하다. 한국인의 삶은 알게 모르게 이런 동양철학의 전통하에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고대 그리스 철학이 모두 올바른 삶이란 무엇인가를 위해 '죽음'에 대해 성찰하고 논리적 추론을 만드는 과정이 등장한다. 예를 들어 에피쿠로스학파의 경우 '죽음'을 '무'이라고 설명한다. 비트겐슈타인 식으로 말하자면 '죽음' 이후는 '삶의 영역'이 아닌 '비시간의 영역'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궁극적으로 '현재의 생에 대한 집중'을 요구하는 것이다. 스토아 학파 역시 '삶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삶은 흘러간다' 는 식으로 '현재에 대한 집중'을 요구했다. 이것은 결국 '자기 자신의 내면에 대한 집중'과도 같은 말이다.

우리는 이런 태도를 익히 알고 있는 공자의 대화에서도 만날 수 있었다.<논어> 선진편에는 계로와 공자와의 대화가 나온다.

계로가 귀신을 섬기는 것에 대해 묻자 공자는 '사람을 섬기지 못하며서 어찌 귀신을 섬기리요'라고 답한다. 이어 계로가 죽음에 대해 묻자 공자는 ' 아직 삶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리오' 라고 답한다.

또한 '그리스 철학'이 '영성훈련'과 '공동체의 안정'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동시에 이루어내고자 했다는 점에서 대학의 가장 유명한 구절인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말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가끔 보수주의자들이 상대방을 공격하기 위해 '수신도 못하는 주제에'라고 하지만 그들은 <대학>이 이 개념들을 순차적으로만 배치한 것이 아닌 것을 모른다. 그리스 철학 역시 개인의 의식을 감찰하는 것과 이것이 더불어 사는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쳐야 하는 지에 대해 동시에 고민했다.

이 외에도 고대 철학 내내 강조되는 '높은 곳에 자기두기' ,'금욕', '감각적 세계에 대한 부정' 같은 개념들은 노자와 장자의 철학을 끊임없이 연상시킨다. 우리들은 알게든 모르게든 중국 고대철학의 세계관에 친숙하다. 그런 차원으로 보자면 서양 학자를 흥분시켰던 '고대 그리스 철학'과 '동양 철학'의 유사성 같은 것들이 책을 더욱 편안하게 만날 수 있는 문화적 자원이 된다.

이럭 저럭 피에르 아도의 <고대철학이란 무엇인가?>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이야기 한 듯 하다. 사족 같지만 피에르 아도는 말년 푸코의 '그리스로의 회귀'에 대해 비판적 시선을 보냈다. 이것은 이 책의 서문에도 잠깐 언급된다. 푸코의 '자기 배려'라는 개념이 자신의 '영성 훈련'이라는 개념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프레데리크 그로가 쓴 <미셸 푸코 진실의 용기>에 보면 아도의 푸코 비판의 핵심이 나온다. 아도는 푸코가 "자신의 윤리적 모델을 실존의 미학으로 규정하면서 너무 단순한 자기 양성을, 다시 말해 20세기 말의 새로운 댄디즘 버전'을 제안했다고 비판한다. <고대철학이란 무엇인가?> 의 행간에도 나오듯이 아도는 고대인들의 자기 변형이 자기 퇴각이 아니라 자기 극복과 보편화를 중요시 하고 궁극적인 '일자'에 대한 합의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핵심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래서 푸코가 자기 수양을 말하면서 결국 개인이 지향할 세계와 공동체 전체를 놓치고 있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미셸 푸코 진실의 용기>의 공저자인 장프랑소와 프라도 역시 고대 철학사 입장에서 만 본다면 푸코의 텍스트 축소와 생략이 지적될 만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피에르 아도 역시 고대 철학의 과학적 양상을 축소하고 고대 철학을 주로 윤리적 소명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 지점을 염두해 두면서 <고대철학이란 무엇인가?>를 본다면 더 넓은 바다로 나가기 위해 필요한 장비를 하나 더 갖춘 마음으로 길을 나서는 든든한 기분이 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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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g 2008-10-28 16:53   좋아요 0 | URL
흥미진진한 리뷰에 힘을 얻어 도전해 봄직한 책입니다
다음달 주문에는 추천해 주신 사막이 들어갈 예정이에요

드팀전 2008-10-28 17:48   좋아요 0 | URL
<사막>은 6-7년전에 봤습니다. 그 맘 때 제가 책 선물로 많이 주었던 것이 <사막>과 <눈먼자들의 도시>였습니다. 주제 사라마구 책은 이후에 입소문을 통해 인기를 얻어서 왠지 기분이 좋았습니다. <사막>도 품절 상태다가 이번 노벨상 수상으로 다시 인기를 얻지 않을까 싶네요. 사막 위에 나타난 청색 인간들인가...하는 구절이 생각납니다.
피에르 아도의 책도 좋습니다.

로쟈 2008-10-29 00:19   좋아요 0 | URL
아도가 <삶의 양식으로서의 철학>이란 책도 쓴 게 있더군요(영역돼 있습니다). 한번 소개된 책의 반응이 좋아야 계속 나올 텐데요...

드팀전 2008-10-29 11:56   좋아요 0 | URL
영역...^^...우리말 번역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2008-11-24 13: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드팀전 2008-11-25 09:21   좋아요 1 | URL
아..그러시군요. <반고흐효과>도 잘 읽었습니다.곧 아도의 책을 또 만날 수 있게되나요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 덕분인지 클래식에 대해 물어오는 이들이 주변에 가끔 있다. 국내 연주자들 중에 나는 백건우와 장한나를 가장 아낀다. 백건우는 절제와 금욕적인 연주자의 모습을 보여주며 이미 정상을 달리고 있다. 장한나는 신동으로부터 시작해서 여전히 잘 크고 있다. 동시대의 훌륭한 연주자가 성장하는 것을 보는 것은 즐거움이다. 장한나의 뛰어난 점은 그녀가 첼로를 잘 연주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음악을 나눌 줄 안다.' 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녀가 책읽기를 연주하기 만큼 좋아한다는 것도 그녀의 연주가 여기서 머물지 않을 것임을 보여준다.

장한나가 대학에서 음악을 전공하지 않고 철학을 전공했을 때 이미 그녀는 더 멀리 나아가는 자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하버드 철학과가 우리 대학처럼 대충 공부하고 리포트 낸다고 또는  세계적인 연주가라고 대충 봐주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더 그렇다. 물론 장한나는 아직 졸업의 벽을 넘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인터뷰에서 음악 이야기 만큼이나 책 이야기를 많이 한다. 각종 문학작품은 물론이고, 철학 서적들에 대한 이야기 말이다.

이에 비해 한국에서 음악하는 대학생들은-물론 전부는 아니겠지만-어떤가 싶다. 첼로를 전공하는 친구는 리히터가 누군지도 모른다. 성악을 전공하는 친구는 조지 셀이 누군지도 모른다. 오로지 파바로티와 마리아 칼라스만 알뿐. 하물며 ...

미켈란젤리는 제자 아르헤리치에게 그냥 산책하며 사색하는 법만 가르쳤다고 한다.(설마 그것만 했겠냐만..) '음악전문가' 들만이 판치는 시점에 장한나의 행보는 아름답기만 하다.


동아일보

‘한나의 편지’가 도착했어요!


기사입력 2008-10-28 05:49 기사원문보기





[동아일보]

첼리스트 장한나, 진천 문상초교생과 아름다운 인연

“교장선생님, 아이들이 다른 유명 바이올리니스트의 연주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는 말이 생각나서 제가 그 나이 때 즐겨 듣던 하이페츠의 음반 하나 보냅니다. 선생님과 아이들이 함께 들으며 행복한 시간이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미국 뉴욕에서 장한나)

“지난봄 장한나 누나가 왔을 때 정말 기분이 좋았습니다. 누나가 주신 책도 잘 읽었어요. 한나 누나가 선물해 주신 하이페츠의 곡 잘 감상했습니다. 누나를 꼭 한 번 더 보고 싶습니다.”(문상초등학교 4학년 정민우)

올해 봄 충북 진천군 문상초등학교 마을도서관에서 학생들에게 책을 기증하고 연주를 함께했던 첼리스트 장한나(26) 씨. 세계적인 연주자인 장 씨와 전교생이 바이올린을 배우고 있는 시골 초등학교 학생들이 편지를 주고받으며 아름다운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장 씨가 런던 체임버 오케스트라와의 내한공연(11월 3∼9일)을 앞두고 27일 서울 중구 소공동 웨스틴조선호텔에서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진천의 문상초등학교 마을도서관에서 학생들과 함께 책을 읽고 연주했을 때 너무도 기뻤다”며 “아이들을 위해 제가 초등학교 시절에 매일 들었던 야샤 하이페츠의 음반을 편지와 함께 보냈다”고 소개했다.

장 씨는 4월 7일 문상초등학교의 학교마을도서관 개관식에 참석해 바이올린을 배우고 있는 전교생 99명과 함께 연주했으며, 카프카의 ‘변신’, 톨스토이 단편선,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등 책 180권을 기증했다.

이 학교 학생들은 장 씨가 기증해준 책을 표지가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전부 돌려봤으며, 장 씨가 선물로 보내준 CD도 점심시간과 자습시간, 음악시간에 감상해왔다. 4월 이후 장한나의 홈페이지(han-nachang.co.kr) 게시판에는 최근까지도 문상초등학교 학생들의 감사 편지가 계속 올라오고 있다.

“언니가 보내준 톨스토이 단편선 1편과 2편 잘 봤어요. 책 고마웠어요. 언니처럼 똑똑해지고 싶어요.”(최향숙)

“장한나 언니가 주신 책은 정말 재밌어요. 언니! 그중에서 돈키호테가 산초에게 섬을 준다고 하고 데리고 다닌 걸 보면 돈키호테는 참 재밌는 것 같아요.”(김혜련)

“20일에 학교 운동장에서 작은 음악회를 열었어요. 누나랑 했던 ‘주먹 쥐고∼’도 당연히 연주했고요. 누나가 오셨으면 정말 좋았을 거예요.”(정민우)

장 씨는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음악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음악이 내 인생의 전부가 되는 것은 싫다”고 말했다. 그는 “음악가는 연주를 통해 내면의 소리를 전달하는 것이므로, 우선 내면을 채우는 게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미국 하버드대 철학과에 재학 중인 장 씨는 최근 D H 로런스의 ‘아들과 연인’ ‘사랑하는 연인들’ ‘채털리 부인의 사랑’을 감명 깊게 읽었다고 말했다. 장 씨는 “톨스토이와 달리 로런스는 사랑에 대해 직설적인 화법으로 이야기한다”며 “마치 돌과 돌이 부딪쳐서 동그래지는 것처럼, 사랑에 대한 생생한 묘사가 인상적”이라고 설명했다. 장 씨는 “음악이나 미술이나 인류의 무의식적인 흐름이 담긴 것”이라며 “음악가로서 나 자신과 다른 사람의 마음을 더 잘 알기 위해서는 악기 연습 외에 문학작품도 더 많이 읽고 싶고, 역사와 철학책도 많이 읽고 싶다”고 말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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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8-10-28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악은 모르지만, 장한나가 저런 사람이었군요. 훌륭하게 성장했으면 좋겠네요.

드팀전 2008-10-28 17:49   좋아요 0 | URL
잘 성정하고 있는 것 같아요. 최근에 비발디 음반을 한 장 내어서 국내활동과 인터뷰가 좀 이어질 듯 합니다.

Jade 2008-10-29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뜬금없이) 저도 D.H.로렌스 좋아요 ㅋㅋ

드팀전 2008-10-29 11:55   좋아요 0 | URL
로렌스의 책은 읽어본게 없군요.^^ 기회가 닿으면
 
대한민국에 교육은 없다. 이 책엔 대안도 없다.

개인적으로 블로그를 하면서 가장 자주 뵈었던 분이 글샘님이다.

보신분들은 이미 알겠지만 글샘님은 넉넉한 미소에, 불꽃 같은 마음을 가지신 분이다. '외유내강' 을 말한다면 글샘님이 그런 부류일게다. 그 분은  매일같이 전쟁에 비유되는 교육 현장에서 수많은  모순들과 부딪치신다. 그러면서 조금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본인과 아이들에게 길을 열어주고 계신분이다. 먼길을 마다 않고 서울에서 하는 촛불 집회에도 가시고, 개인적 손해를 감내하며 연가투쟁에도 참가하셨다. 학교를 다니면서 몇 몇 이런 선생님들을 만난다면 답답한 학교 생활에 작은 희망이라고 얻을 수 있을 것 이다.

그런나 나는 오늘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간간이 생각해 왔던 것이며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함께 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래서이다. 어떤 절대성을 말하거나, 결벽됨을 논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이래 저래 부족하고 모순적일 수 밖에 없다. 이것은 내가 늘 하던 말이기에 타인에게도 적용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인간이 재미있지 않은가? 그렇지만 이런 모순덩어리를 보고 즐거워하는 것 말고도 할 일은 몇 가지 더 있다. 

글샘님의 <대한민국에 교육은 없다>의 리뷰를 보고 몇 개 생각이 들어서 결국 도발적인 문제제기를 한다. 최대한 감상적인 접근을 그 분에 대한 존경의 뜻으로 자제하겠다. 대신 그런 부분이 생긴다면 이것은 내 부덕의 문제이니 그것이 토론의 중심이 되지 않길 바란다.  

이득재의 글은 교육 관련된 것 말과 예전에 가족 관련된 책을 본 적이 있다. 분석의 틀을 들뢰즈의 이론에서 빌어 왔던 것으로 기억된다. 가족을 '가국'이라는 국가주의와 연결하며, 그 이후는 거의 들뢰즈적 개념들로 한국사회와 가족문화에 적용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교육관련된 책에서도 이와 유사했을 것 같다. 하지만 이야기는 이 책에 대한 것은 아니다. 글샘님의 리뷰에서 역시 현실성이 없는 책에 대한 분노때문에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그 안에 평소하시던 교육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있기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득재의 책과 상관없이 함께 생각해볼 수 있는 것들이 있다고 믿는다.

글샘님의 주장은 한국의 교육이 애초부터 옳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역사에 대한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친일 교육이 반공교육으로 입시교육으로 바뀌어 가는 과정에 대한 것 말이다.

그런데, 2008년 3월 1일, 3.1절날 나온 이 책이 외치는 '교육 부재'는 옳고 옳고 다 옳다.
그렇지만, 태생이 옳지않았던 '학교'에다가 이런 말을 퍼붓는 것은 더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결국 주장의 핵심은 '힘없는 학교에 뭐라하지 말고 학교를 좌지우지 하는 권력'에 문제를 이야기하라는 것이다.

교육은 학교의 문제도, 대학의 문제도, 교육부의 문제도 아니다.
한국 교육의 문제는, 국가 권력의 문제이고, 부를 가진 자들의 문제다.

이 말은 정확하다. '학교'는 하나의 부분이고 '교육제도'에 대한 제유법일 뿐이다. 우리가 '정치적'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거기에도 들어 있다. 학교라는 것은 교육의 최전선이며 또 수요과 공급이 만나는 실재적인 시장이다. 그렇기에 '학교'와 '교육'을 분리해서 이야기할 수는 없다. '학교'의 문제를 이야기 한다는 것은 '교육'시스템 전체 중  일부를 건드리는 것이다.  그것은 거대한 교육이라는 유기체의 말단에 해당하며 또 일반인들이 만나는 가장 큰 촉수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교육행정과 학교 교육의 권력관계가 주객전도 되지 않았다면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교육이 사실 가장 큰 몸통에 해당 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글샘님의 글에는 기본적으로 학교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로서의 속성이 들어 있다. 그러니까 시스템에 반하는 '대안적 교육'이 아니라면 구조적으로 학교 교육은 '권력 관계망' 안에 포섭되어 있다. (물론 상부구조 안에서도 자율성은 살아있다.)

그런데 여기서 글샘님은 책에 대한 분노로 조금 점프를 하신다.


저자의 말대로라면, 대한민국 학교는 다 없애야 한다.
그리고 아이들을 모두 학원으로 보내잔 이야긴지...

이득재의 글이 비현실적이었거나 이해받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하려는 말과 별로 상관이 없다. 나는 이득재의 책을 읽지 않았지만, 궁금해지는 것이 생겼다. 글샘님의 글은 묘하게도 '학교와 학원을 대립항'으로 설정하고 있다. 즉 내가 궁금해진것은  '학교와 학원을 대립항으로만 설정하는 구조'이다. 사실 이 둘은 대립항이 아니다. 둘 다 공통된 목표, 입시를 지향하고 있다. 고전 경제학으로 말하자면 둘은 대체제에서 출발해서, 시장의 논리에 따라 현재는 학원이 절대제가 되어 버린 것이다. 여기서 자세히 봐야 할 것 그리고 질문해야 할 것은 '학교'를 '선'(이것은 착하다는 선이 아니다.)의 개념으로 두는 것이다. 글샘님은 '공교육'을 제대로 살려야 한다는 측면에서 이야기한 것이다. 학교의 대립항은 학원이 아닐 수 도 있다. 예를 들어 탈주론에서 이야기 하는 종류의 '공동체적 교육'같은 것도 일부 소수지만 그 대립항이 될 수 있다. 물론 나는 '공동체 교육'이 전면적인 '공교육'을 대체할 수 없다고 보는쪽이다. 그렇지만 '대립항 설정'은 그 문제를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는 지의 '인식 지평'에 대한 설정과 같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이어서 이런 질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공교육은 권력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글샘님 역시 이 지점이 반어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역사적 전거를 들어서 말하고 있다. 이 말은 결국 앞에서 말한 '이데올로기적 장치'로서 공교육의 존재적 한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하, 한국 교육에서 '공적 개념'이 있던 적이 있었다.
교련 사열하던 시절, 철저히 국가에 복속된 '공공의 노예'가 되어 교복 후크 하나 풀지 못하고 다니던 시절엔 '반공방첩, 간첩신고'등의 모토를 보며 등하교할 때, 우리는 <개인>을 부정당한 <공인>이었다.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땅에 태어날 정도로 <공인>이었다니깐.

여기서는 나는 약간 혼란스러워졌다. '개인'이라는 용어때문이다. '개인'의 자유에 대한 글샘님의 옹호는 이 글 외에도 여러번 접했다. 그것은 '역사적 집단주의'에 대한 반사적 진보개념이다.  글샘님은 '공교육의 제대로된 정상화'를 지지한다. 그런데 역사적으로도 그렇고 이론적으로도 '공교육'은 '개인'의 자유를 보장할 수 없다.(조금은 상대적인 개념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것은 앞서 이야기했던 '공교육'이 '국가 교육'과의 차이를 해명하고 이를 극복해나가기 전까지는 불가하다. 

정리해보면 글샘님은 1)현재 한국 교육은 애초부터 글러먹었다. 2) 그럼에도 제대로된 공교육이 필요하다. 3) 그러나 이건 요원하다. 4) 유일하게 공교육이 공동체적인 것은 '전체주의적 공동체'에 대한 기여일 뿐이다.5)그리고 이것은 철저하게 '개인'을 억압해 왔다.(개인적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사이의 입장은 사실 세밀하게 좀 살펴볼 부분이 있는 지점이다. 안그러면 극단적으로 '신자유주의적 케인즈주의자'가 될 수도 있다.)

결국 '제대로된 공교육'에 대한 가치와 '개인의 자유'가 결절되는 부분은 '두발 문제'에서드러난다.

한국의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을 정상적인 잣대로 재서는 안 된다.
머리를 길러 주라고??? 그러면, 동네의 공부하기 싫어하는 아이들이 선지망을 한다.
그런 아이들이 모인 학교는 성적이 떨어지고, 더욱 학교는 개판이 된다.
지금 내가 근무하는 학교가 그렇다.
올해 머리카락 단속을 심하게 한다.
내년에 학부모들의 1지망이 부쩍 늘 예정이다.
이게 현실이다. 국가인권위원회는 학교에다가 뭐라고 하면 한 된다.
한소리 하려면, 교육부에다하든지, 학원 없애라고 해야 한다.

나는 부당한 '공교육'에 대한 성토와 그에 대한 반동으로 '개인의 옹호' 그리고 '두발 단속의 현실' '이것들이 철학적 모순 없이 쓰일 수 있는 사실을 논리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유일한 길은 '청소년을 미성숙한 개체'로 바라보는 태도 밖에 없다. 즉 '그들은 미래에는 개인이지만 아직 미성숙하기때문에 준개인일뿐이다. 그렇기때문에 그들에 대한 통제는 가능하다.' 그런데 역으로 이런 미성숙한 개인에 대한 통제와 개인에 대한 훈련의 부재는 성숙하지 못한 개인들만을 학교 밖으로 내몰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반복적인 악순환의 고리를 만든다. 이것을 선생님 하나가 끊을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이런 문제의식과 이에 합당한 개인적 실천이 어떤 틈을 만들 수 는 있다고 생각한다.

 글샘님은 지속적으로 '왜곡된 교육현실' 그리고 '비정상적 학교 교육' '개인을 말살한 과거 정권의 교육제도' 에 대해 말하면서 어느 순간 그 모든 것들은 '어쩔 수 없이 분노하는 것'들로만 인정하는 논리로 들어선다. 즉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을 정상적인 잣대로 재서는 안된다' 는 말은 그곳이 비정상적인 영역임을, 변화의 가능성이 폐쇄된 공간임을 단정하는 것이다. 이런 보편성이 소거된 장소에서는 당연히 인권이 소거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흔히 정신병원이나 감옥 입구에서 이런 담론을 쉽게 접하게 된다. " 이곳에서는 이곳의 규칙이 있다." 단테의 <신곡>에서도 무차별적 지옥문 앞에 그런 푯말이 붙어 있다.

"나를 지나가려는 자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 

물론 학교를 단테식의 막혀 있는 지옥으로 까지 해석하고 싶지는 않다.(실제 그 정도로 보일때가 있긴 하지만) 결국 어떻게 해석해도 좋다. 문제는 그런 상황에서 글샘님은 그동안 본인이 비난해왔던 전통적인 즉 교육행정당국들이 요구하는 논리를 따라간다.  글샘님 역시 '동네 공부하기 싫은 아이들' 이 수업 분위기 망치는 것을 배제하고 싶어한다. 과감히 짤라내야 한다라는 말까지 사용한다.(그 어투는 과격하지만 의미는 다른 길을 열어주라로 이해하면 그리 문제될 것은 없다. )그래서 학교 성적이 떨어지고 학교가 개판되는 것을 싫어한다. 결국 이 논리를 가장 극화시킨 것이 '국제중학교'이다. '국제중'과 '외국어고'에는 성적 높고 학교를 개판치지 않는 아이들이 모여든다. 조직의 입장과 개인의 입장이 같지는 않다. 전교조는 '국제중'등의 설립에 대해 부정적인 것으로 알고 있다. 오히려 굳이 나누자면 '평준화'논리에 충실하다.  어떤 모순도 감지되지 않는다면 이상한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건 비약이다.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이 논리가 가진 함의는 여러종류로 무섭기때문에 옮긴다.

밤 12시 넘어까지 학원에서 잡혀있는 것보다,
머리카락 자르는 것이 더 인권을 침해하는 노릇이란 말인가?
회초리로 종아리 한대라도 때려서 가르치는 것이 그렇게 인권 침해란 말인가?

이런 비논리적 선택을 요구하는 질문은 사실 한국의 수구세력이 가장 즐겨쓰는 방법이다. 훨씬 세련된 논리로 '금산법 개정' 이야기 같은 것들이 그 예다. '산업자본의 금융자본 허용'을 두고 한나라당은 '애국주의 자본담론'을 주장했다.(삼성경제연구소에서 나온 담론이다.) '외국자본에게 은행 다 넘어가는 것보다 국내 자본에 진입을 허용하여 지켜야 하지 않느냐' 는 주장을 했다. 결국 그 담론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더 쉬운 예를 들자면 저런 논리는 독재자 전두환이 히틀러에 비하면 덜 죽였기때문에 '인권을 덜 침해했다' 라고 하는 논리와 같이 쓰일 수도 있다. 여기서 죽은이들의 숫자를 세는 방식으로 혹한다면 이미 어젠다는 넘어가는 것이다. (이 예를 든 것은 그것 때문이다.)수구세력들은 이런 방식을 즐겨쓴다. 정답은 숫자를 세지 않는 것이다. 이에 대한 훌륭한 지적은 슬라보예 지젝에게서 나온다. 

저 질문에 대한 답은 둘 다 '인권침해가 맞다.' 이다. 이것이 '인권침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과 '인권침해' 라고 생각하는 것 사이에는 지금은 작지만 나중에는 크게 벌어질 차이가 있다.  

이제 글샘님은 여기서 그 큰 제도를 바꾸기 위한 방법을 이야기 한다. '힘없는 학교에게 요구하는 것은 부당하다' 라는 충분히 설득력있는 논지에서 말이다.(그런데 우리가 '학교'라고 할 때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단지 학생들과 선생이 있는 '학교'가 아니라 '시스템'이라는 대유법으로 쓰인다면 사실 '일반 학교'문제는 과민한 변호에 가깝다.)

정치에 철저하게 종속된 한국의 학교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정권을 바꾸어야 한다.
그것도 철저한 노동자의 정권으로

마치 세기 초의 혁명구호를 보는 듯 하다. 그런데 이 말이 가진 의미와 진정성을 알 수는 없다. 나는 진정으로 '노동자 정권'이 의미하는 바를 모르겠다는 뜻이다. 글샘님의 사회주의적 지향을 뭐라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차원이라면 나 역시 그 비난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보다 '노동자 정권'으로가 그저 하는 '이데올로기적 과격성' 외에 '삶의 양식'으로서의 진정성을 가진 말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는 것이다. 또한 재미있는 것이 있는데...한국의 교육은 철저하게 권력 손안에 들어 있지만 노동자 정권의 교육은 그런 권력로 부터 벗어나 있다는 뜻으로 읽힌다. 이것은 '권력' 문제에 대해 지나치게 일면적인 접근이다. 노동자 정권 역시 '정치 권력 '아니던가? (아나키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권력의 항상성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정식적으로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다.

" 진정 노동자 정권으로의 전복을 꿈꾸시나요? " 

피에르 아도는 <고대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현재 철학의 이론화 경향-즉 철학과 철학 담론의 구분-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조금 예외라고 했다. 그 이유를 그는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마르크스에게 중요했던 것이 '실천의 영역' 즉 아도식으로 말하자면 '생활양식'으로서의 철학을 요구했기 때문이 아닐가 싶다. 그러나 마르크스 자체도 가치론에 있어서 사변적이고 이론적으로 으로 흐른 지점은 비판받는다.    

글 뒷부분에 글샘님은 교육 현장에서의 어려움에 대해 말한다. 가르치는 행위 말고도 헤야할 업무가 산적해 있는 선생님들에게 제대로 된 교육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문제다. 실제로 선생님들의 업무와 사회적 기대는 과하다. 그 점에서 선생님들의 노고를 이해해야 한다. 현재의 시스템 하에서 선생님들에게 과부하가 걸린 것은 틀린 말은 아니다.(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정된 직장때문에 여전히 가장 인기있는 직장 중에 하나이다. 여기서 현재 금융위기에 일촉즉발 긴장하는 직장인들의 비애를 이야기하지는 않겠다. 그건 앞선 비교의 예와 똑같아지기 때문이다.)

소포클레스의 비극에 나오는 질문이었는데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만약 지혜로운자가 지혜로운 것을 이해받지도, 이해 되지도 못하는 지혜롭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 해야하는가?' 하는 자탄어린 질문이었다. 글샘님의 딜레마는 수 천년전의 그것에 닿아 있다. 글샘님은 한국 교육의 왜곡에 대해 그 기원과 역사, 그리고 현실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아마 알라딘의 그 누구보다 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것이다. 나는 선생님의 학생들에 대한 애정과 고민들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런 선생님들이 주변에 가끔씩 계시다는 것에 용기를 얻기도 한다.

그런데 글샘님의 교육에 대한 해법은 넘을 수 없는 벽 앞에서 쉬운 길을 이야기하고, 그것을 현실이라는 말로 이해시키려 한다. 그 지점이 안타깝다. (물론 이건 내게만 안타깝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벽'에 대한 해박한 이해와 '현실에 대한 몰입'은 수 많은 '상상력'들을 좌절시키기 때문이다. 글샘님이 상경투쟁을 하면서까지 열심히 하셨던 '촛불집회'에서 그 분은 '상상력에게 권력을'이라는 68혁명의 슬로건을 목도하고 즐거워하셨다.

그렇다면 우리 교육에도 상상력이 필요하다. (비록 공교육의 전복으로 까지 이루어지지는 못할 거라는 한계가 있지만 말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말이 학생들의 두발 자유에 기여하길 바란다.

"플라톤의 국가를 기대하지 말고 그저 작은 것 하나가 진보하거든 그것을 족히 여기라. 그리고 그러한 작은 것에서 비롯되는 것은 결코 그리 작은 것이 아님을 생각하라."

 

...쓰다보니 긴 글이 되었다. 지금도 아이들과 씨름하고 계실 글샘님에 대한 비난으로 읽히지 않길 바란다. 그냥 질문과 논리의 습작으로 이해하는게 오히려 나을 것 같다. 앞서도 말했지만 나는 글샘님을 블로거 중에 가장 여러번 만났고 평소에도 그분의 전체적인 지향에 대해 함께 한다. 물론 몇 몇 근원적인 태도에서 나와 다른 부분은 확실히 있다. 그런 걸 모르고 글샘님의 평소 정치관에 대한 안티로 '박수'를 보내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 제대로 글을 읽을 줄 모르는 바보다. 진짜 척결되어야 할 사람은 그런 취지로 박수를 보내는 당신이다. 또 진보적인 글샘님을 비판하기 때문에 '당신 분파지?' 하는 자도 똑같이 '정신의 문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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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8-10-27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상은 짧은 생각인데... 긴 생각을 적어 주셨군요. ^^
제가 감정에 치우쳐서 쓴 글을 이렇게 논리적으로 비판해 주시니... 황송합니다.
제가 학교를 옹호할 수밖에 없는 건, 여기 있고 매일 교사역할을 수행하고 있기때문에 논리 이전에 생활을 쓰다보니 그렇게 된 거지요.
학교를 전면적으로 개혁할 뻔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노무현 탄핵 국면에서 <교육개발원>에선 교장제도 개선을 위한 보고서를 낸 적이 있었거든요. 거기 상당히 발전적인 상상력을 개재시킬 여유가 있었는데... 탄핵 국면 지나고 파병하고 하면서 교육개혁의 방향을 교사개혁으로 몰아가 버리더라구요. 물론 교사개혁도 필요하지만, 백년지대계라면 가장 문제점이 되는 고리를 손봐야 하는 것이었는데 말입니다.
제가 아이들 두발 자유를 억압하는 쪽에 선 것에 대하여 이해하실 수 없겠지만,
두발 자유 이후의 학교들이 2,3년 안에 거의 모조리 단속으로 돌아선 사정까지 말씀드리긴 좀 어렵네요.
제가 전적으로 노동자 정부를, 사회주의 정부를 원하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그런 정부를 들은 적도 본 적도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학생을 위한 교사가 있는 학교를 국가가 좀 지원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그게 공교육 아닌가, 싶어서 푸념해 본거랍니다.
논리적 비약도, 닫힌 상상력도 모두 제 무지의 소치입니다.
그래도 이런 비판의 글은 달게 읽겠습니다. 담에 또 써 주세요. ^^(시간이 많으시다면...)
저는 이제 퇴근합니다. 애들이 종례하러 빨리 오래요.

드팀전 2008-10-27 23:24   좋아요 0 | URL
종례는 빨리 해주셔야지요. 제일 욕먹는 담탱이(비하적 발언이지만 저희때 쓰던 말이라서 한 번 떠올려봤습니다.)가 종례시간에 안오는 선생님이지요.^^

불편한 글일텐데 너그럽게 봐주신-완전히는 아니겠지만-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저 역시 외곽의 시선이기때문에-아이를 아직 학교에 보내지도,또 교직에 있지도 않으니- 내부 시선과는 다른 측면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대신 아이가 생기니까 이 아이를 어떤 철학을 가지고,어떻게 키워야 할 지에 대해서는 조금 더 실재적으로 많이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 애정으로 봐주시길 바랍니다.

두발문제는 사실 성장통이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성장통이 만약에 보편적 가치의 성취를 위한 것이라면 한 동안의 불편함과 못마땅함을 거두어야 되는 건 아닐까 싶습니다. '짧은 머리'의 기원이 일본 군사주의 교육정책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솔직히 가끔은 머릿이때문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합니다.)어쨋든 지금은 그 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그런 잔재로 신체의 자유에 대한 '통제' 양식를 띠고 있는 것은 그런 문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합니다. 선진국의 어느 나라도 두발 문제로 학생들을 교문 앞에서 잡아채지는 않을겝니다.

수능이 코 앞이니 아이들이나 선생님도 싱숭생숭 해지시겠네요.^^

글샘 2008-10-28 0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두발과 인권을 떠들어댄 것은, 두발단속이 꼭 필요하대서가 아닙니다.
학생들이 1년에 수십, 수백명씩 자살하는 이 나라에서, 공부하다가 죽은 놈 없다는 인식을 하는 '편견'을 일깨우고 싶었던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노무현 정권이 사학법 개정 - 교장선출제 개선 - 대학입시 개선 - 공교육 정상화의 플랜을 갖고 있었기에 저는 참 희망을 가졌더랬는데요, 문턱에서 좌절되는 걸 보고 슬픈 마음 가눌 길이 없답니다.
아직도 학교의 모순이 전혀 개선되지 않는 고리가 승진제도에 있거든요.
교육운동의 모습도 전교조가 너무 매도되고, 그러다보니 좀 파행적으로 운영되고, 이제는 전교조도 당신들의 조직이 되어버린 느낌이어서(젊은 조합원이 드물거든요.) 교육의 희망을 어디서 찾아야 할는지... 저도 고민중에 있습니다.
요즘은 학습기술을 연구하면서 교사들과 학습하는 방법의 학습으로 학생에게 다가갈 수 있는 교사들의 모임을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교육운동에는 반드시 교사들의 학습이 필요하거든요. (그것도 교사들이 연세가 높으셔서 힘들긴 합니다만... 제가 경력 20년인데 아직도 2/3 지점에 머물고 있으니 말이죠.)
전교조가 생길 수 있었던 힘은, 바로 학교에서 공부하던 팀이 많았다는 데 있거든요. 그런데 막상 전교조가 합법화된 지금, 단위학교에선 전교조 분회원 교육도 거의 없습니다. 유명무실한 조직이죠. 머리는 커졌고, 수뇌부는 20년 전 그사람들이고, 몸통은 새몸인데... 새판을 짜야할 때가 된 것인데, 몸통의 사람들은 점점 무심해 지고 있구요.
배운 게 이 노릇이라, 아이들과 매일 뒹굴면서 존경받는 교사는 커녕 욕이나 먹지 않으면 다행으로 살고 있습니다만, 나날이 달라지는 아이들을 생각하지 않는 교육제도가 막막하기도 해요.
학교에 대한 질타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저는 이 나라의 교육은 문제 교사 하나 때리고, 교원평가해서 줄세우고...하는 걸로는 제자리걸음밖에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좀 오바한 거구요.
핀란드처럼, 국가에서 교육에 좀 관심을 가지고 투자를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교육과 의료는 국가와 국민의 공생을 뒷받침하는 건데, 교육에 관심없고 경쟁에만 관심이 있는 것 같아서(국제중, 특목고의 논리는 오로지 경쟁, 승리죠) 마음이 아픕니다.
공부 못하는 학생도 학생이다!고 하기 전에, 학교를 공부 못하는 학생과 잘하는 학생으로 나누려는 의도를 자꾸 저지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지금 실업계는 무조건 공부 못하는 학생이 가는 데라는 의식이 많습니다. 그러면 없애야죠.
아니면 직업교육을 제대로 시키든가.

또 말만 많아졌군요.
수능이 정말 코앞입니다. 우리 마을은 잘사는 마을이 아니어서 아이들 학력도 중간 아래인데... 아이들이 이제 조금 긴장하고 있습니다.(휴, 이제서야...) 내 자식 잘 되길 바라듯이 우리반 아이들이 시험 잘 쳐오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매사가 모순이네요. ^^

노이에자이트 2008-10-28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교조에서 한때는 체벌이나 두발규제 금지운동도 한 걸로 아는데 요즘은 안하나 봐요.두 분이 "한국의 학교 현장에서 학생의 인권을 위해서는 교사는 어디까지 할 수 있는가"로 토론주제를 좁혀서 얘기하면 좋을 듯 싶습니다.

드팀전 2008-10-28 17:53   좋아요 0 | URL
노이에님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듣고 싶군요...오늘 <시사in>을 봤는데 특집 주제가'보수의 마녀사냥, 전교조> 였습니다. 관심을 가져야 될 기사라고 보였습니다. 언론과 동시에 와해 시나리오가 있더군요.언론보다 전교조가 전략전술면에서 더 취약해 보여서 어떤 현명한 대책이 있어야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Arch 2008-10-28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부와 내부의 시선은 다를 수 밖에 없겠지만 꼭 당사자성이 있어야 논의를 할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물론 이 부분은 두분께서도 말씀하셨지만. 아무래도 현안에 자주 접하다보면 좀 더 감정이 겪하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논의와 상관없을지도 모르겠지만 전 전교조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변을 보면 전교조 선생님들한테 피해를 봤다는 얘기가 들려서 이것도 언론과 뜬구름 잡는 소문 때문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곤 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건 전교조 선생님들이 그동안 수구세력들이 뻔하게 저질러온 교육의 많은 불합리한 일들에 제동을 걸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게 비록 보여지는바로는 여러 모순에 직면해있을지라도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다고 대의를 위해 작은 일을 접어두자란 뜻은 아니구요.
이건 전교조 뿐 아니라 모든 진보세력의 문제로 보이는데요. 성관련 범죄만해도 한나라당은 성범죄당이라고 할정도로 비일비재하게 문제가 불거지고 있지만 아무도 나서서 말하지 않죠. 그들도 자성하지 않고. 그런데 조금 좌편향된 당에서 성범죄 얘기가 나오면 시끌벅적합니다. 진보를 자임하는만큼 자성의 목소리를 높이는 거고, 부딪힘으로 현실을 조금씩 바꿔나갈 수 있단 생각이 듭니다만 아무런 논의없이 의례 그려려니 하는데 비해 조금 억울하단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게 민주주의의 과정이고 진정한 진보의 방향이란 생각이 들면서도 말이죠.
너무 멀리 나간 얘기 같네요. 옥찌들이 싸우는 바람에 이러는거라면 핑계고, 두분 논의를 보면서 좀 더 생각을 정리해야겠어요.


드팀전 2008-10-29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앞서도 말했지만 <시사in>의 특집 주제가 '전교조'이니까 참고해 보시면 좋을 듯 합니다. 언론은 '언론의 자유를 위한 투쟁'이라는 대의명분이 설령 우파라고 하더라도- 앞에 대놓고는 뭐라하지 못할-지지를 얻을 수 있지만 전교조는 이런 측면에서 전선이 더 넓고 또 한편으로는 '좌/우'로 나뉘어 공격받기에도 좋기때문에 싸움에 더 취약할 수 밖에 없어보입니다. 미디어정치에 있어서도 언론은 언로라도 몇 개 있지만 교육계는 그러지도 못하니까요.
 

기원전 428년 레스보스가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레스보스인들은 아테네인들에게 진압당한다. 민회는 이들의 처리를 두고 토론한다. 당시 민회를 지배하던 이는 '클레온'이었다. 그는 아테네인에게 '강경노선'을 설득한다.그리고 배 한 척을 보낸다. 레스보스인 남자는 모두 죽이고,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로 팔아버리라는 명령을 집행하기 위해서 말이다.

아테인들은 다음 날 , 좀 잔인했던 게 아닌가 고민한다. 그리고 다시 민회가 소집된다. 클레온은 다시금 '매파'를 자청한다. (이 논지를 그대로 인용하고 싶지만 너무 길다. 나름대로 대중을 움직일 수 있는 글이다)

"여러분들의 동맹국들은 그들의 이익 때문이 아니라 여러분의 힘 때문에 여러분에게 묶여있습니다.그러므로 지금 여러분이 아무리 동정심을 보여주어도 그들은 감사하지 않을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허약함의 증거로 여겨질 것이고, 반란을 일으켜도 아무 처벌도 받지 않는다면 다른 폴리스들 역시 반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정치적 잘못들 중에서 불확실성이야말로 가장 나쁜 것입니다. 나쁜 법을 유지하는 편이 법을 계속 바꿔대는 것보다 낫습니다. 일단 결정된 사항은 반드시 지켜져야 합니다.....

여러분은 심사숙고가 필요한 민회를 마치 극장의 볼거리와 같이 취급했기 때문입니다.미틸레네는 단일한 도시로는 그 어떤 곳보다 더 큰 피해를 여러분게에 끼쳤습니다. 그들이 합당한 처벌을 받게 해 줍시다. 그들은 고의로 일을 저질렀습니다. 자발적이지 않은 행위에만 변명이 가능합니다.....

동정심은 우리에게 우호적인 자들에게 주어야지 불구대천의 적에게 줄 것이 아닙니다.온건함은 장차 여러분에게 호의적일 자들에게 보여주어야지, 여러분에 대한 증오를 누그러뜨리지 않을 자들에게 보여주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제국에 방해가 되는 세번째 것, 즉 연설을 즐기는 것에 대해서는 -연설가는 매수될 수 있습니다- 똑똑이 연설가들에게 중요하지 않은 일들에 대해서나 그들의 기술을 펼쳐보이게 합시다." 

키토는 이에 대해 "저속함에 대한 아부와 폭력에 대한 고무를 은폐하기에 딱 알맞을 만큼의 진실을 담고 있다." 라고 했다.멋진 표현이다. 이건 클레온의 연설이 3류는 아니라는 뜻이다. 교묘하게 가려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다짜고짜 '다 죽이자' 얼마나 덜 매력적인가?  진정 우리의 무기가 말이라면, 다짜고짜 '죽이자'는 새디스트적인 자기쾌락에 봉사할 뿐 실제적이지도 매력적이지 못하다.

클레온에 대해서 한사람이 반대 발언을 했다. 에우리크라테스의 아들 디오도토스이다. 키토는 투키디데스가 그의 저서 <펠로폰네소스전쟁>에서 그의 이름을 남겨준 것에 대해 기억될 만한 자격이 있다고 칭찬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디오도토스의 연설은 명문이다.

"성급함은 어리석음과 동행하며, 흥분은 야비함과 저속한 정신과 함께합니다. 그것들은 모두 현명한 판단의 적입니다. 행동은 말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멍청이거나 아니면 부정직한 사람입니다. 만약 미래의 불확실한 일들에 대해 말 이외의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의견을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어리석은 자일 것입니다......누구보다 해악을 끼치는 자는 바로 연설가들이 뇌물을 먹었다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입니다. 무지하다는 비방은 참겠습니다.그러나 뇌물을 먹었다는 비방은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연설가가 성공한다 하더라도 의심을 받을 것이며, 만약 실패한다면 무능할 뿐 아니라 부정직하다고 생각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선량한 사람들이 도시에 충고하는 일을 꺼리게 되고, 정직하게 제안된 현명한 조언도 나쁜 조언과 똑같은 의심을 받게 됩니다...."

먼저 디오도토스는 자신과 반대의견을 뇌물이라는 도덕적 꼬리로 차단하려는 논지에 대해 논리적으로 격파한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언로는 차단하는 것이 미래의 폴리스 전체에 얼마나 큰 해악이 되는지 설득한다. 이어서 그는 클레온의 강경처벌론에 맞서 더 커다랗고, 설득력이 있을 의제로 아테네인들에게 연설한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처벌이 아니라 현재와 우리의 이익이라는 점으로 동감을 끌어낸다.

"문제는 그들의 유죄여부가 아니라 우리의 이익입니다. 우리는 현재에 대해, 즉 그들에게 어떤 처우를 할 것인가에 대해서가 아니라, 미래에 대해, 즉 그들이 우리에게 가장 잘 봉사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심사숙고해야 합니다."

이어서 데오도토스는 다양한 범죄에 대한 사형제도가 있지만 별로 효과가 없다는 점을 말한다. 공적인든 사적이든 잘못을 저지르는 것은 인간의 속성이라고 전제한다. 그리고 이어서 욕망은 희망을 돕고, 우연은 인간을 더 부추기고 , 가끔 그 우연이 성공을 가져다 주어서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시도를 하게끔 한다고 말한다.(여기서는 반란의 성공이다.) 인간의 욕망으로부터 시작된 무모한 반란의 시도에 대한 설명이 리드미컬하다. 그는 이어서 이들이 협상을 바라고 있고, 면책의 기회로 그들을 뉘우치게 해야한다고 말한다. 또한 현재 반란진영의 평민들을 구제해주지 않으면 결국 그들 반란귀족처럼 우리도 그들 귀족들 손에 놀아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데오도토스의 마지막 연설이 이어진다.

"나는 여러분이 동정심과 온건함에만 치중하지는 말기를 바랍니다.이 점에서 나는 클레온보다 조금더 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이 주동자들에게 진지한 판결을 내리고, 나머지는 무죄로 풀어주기를 요청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이로운 정책이며 또 강력한 정책입니다. 무분별한 폭력으로 행동하는 집단보다 신중하고 현명하게 적에 대응하는 집단이 더욱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키토가 데오도토스의 연설에서 가장 감명깊다고 여긴 부분을 그가 아무런 감정에도 호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감정에 대한 지성의 통제가 총체적 효과를 나타내는 장면으로 그려진다. 키토는 이 연설이 그리스의 시나 그리스 예술과 유사하다고 말했다.

이런 저런 의미들을 떠나서 데오도토스의 연설만 그냥 따라 읽어도 투키티데스의<펠로폰네소스전쟁>을 읽고 싶게 만드는 명연설이다. 물론 나는 도널드 케이건으로 우회한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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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2 13: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10-23 1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1차 세계대전 공부하다가 케이건을 알게 되었어요. <전쟁과 인간>에도 페레폰네소스 전쟁에 한 장을 할애했는데 아예 단일 저서도 냈더라구요.저는 소크라테스 전기 읽다가 펠레폰네소스 전쟁을 토막지식으로 알았을 뿐이예요.
데오도토스의 연설은 통찰력이 번뜩이는 명언의 향연이군요.키토가 반할 만하겠네요.

드팀전 2008-10-23 17:58   좋아요 0 | URL
원래는 4권짜리 연구서인데 저자가 한 권으로 줄였다더군요.^^
틈 나는 대로 볼 생각입니다. 투키티데스를 언제가 볼 날도 있지 않을까 싶구요. .^^

2008-10-27 0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