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철학이란 무엇인가
피에르 아도 지음, 이세진 옮김 / 이레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피에르 아도의 <고대철학이란 무엇인가?>는 흥겨운 책이다. 귀에 익은 발라드처럼 주선율이 확실하다. 화성들이 다채롭다. 미리 겁먹는 사람들을 위해 말하지만,  피에르 아도가 만든 이 책에서 독자들이 구절양장 그리스 산길에서 미아가 될 일은 없다. 물론 너무 방심하면 자기 화장실 안에서도 길을 잊곤 하는 것이 인간인지라 장담은 못하겠다. 하지만 이런 말을 할 정도로 피에르 아도는 그가 <고대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말하고 싶었던 바를 명백하게-반복적으로, 수많은 증거들을 들어서- 이야기 한다. 

우선 이 책은 거스리의 <희랍철학 입문>같이 그리스 철학의 주요개념을 풀어놓고 있는 책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시작해야 한다. 그러니까 이 책은 플라톤의 '이데아'가 뭔지, 스토아 학파의 '아파테이아'가 뭔지 자세히 설명하지 앟는다. 이런 개념들이 책 속에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 개념들을 설명하는 것이 이 책의 주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래 묵은 그리스인들이 자기의 용어로 만든 개념들에 아픈 상흔이 있었다면, 이 책은 '치유의 반창고'가 충분히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의 주 선율, 즉 주목적은 무엇인가? <고대철학이란 무엇인가> 는 소크라테스 이전 부터 중세의 스콜라 철학까지를 주로 이야기 한다. 각 철학 학파들의 세계관, 자연관, 윤리관, 철학적 훈련등이 다루진다. 하지만 각 철학 사조의 차이점 보다는 고대 철학이 가진고 있는 공통된 점을  부각한다. 이것이 핵심이다. 그 공통점은 '삶의 양식'으로서의 고대 철학이다. 즉 '철학은 삶이어야 한다.' 라는 것이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생활양식으로서의 철학'이 오뎅탕의 대나무 꼬치이다. 그리고 피타고라스,소크라테스,플라톤, 에피쿠로스 뭐 이런 멤버들이 꼬치에 대롱대롱 끼워진 형형색색의 오뎅들이 되신다는 이야기다. 그렇다. 오뎅 심장을 관통하는 '막대기 자체'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은 이 책의 핵심이다. 그리스인들에게는 '철학을 한다는 것은 삶을 제대로 살아간다'는 것이었다.

피에르 아도는 '철학'과 '철학담론' 을 구분한다. 우리가 '철학'시간에 배우는 모든 철학사조들은 '철학담론'이다. 이것은 '철학들'이라고 이야기해도 별로 틀린 말이 아니다. 그렇다면 앞에 있는 '철학이란 무엇인가?'. 수많은 대중 철학서의 첫장 제목 같기도 한 이말. 저자는 '철학'을 '실천하는 삶' 이라고 말한다. 특히 고대철학기에는 이런 '철학'과 '철학담론'이 구분되지 않았다는 것이 저자의 입장이다. 이것이 분리되기 시작하는 것은 중세 시대- 초기 그리스도교의 영향이 빠져나가고 난 이후- 그리스도교가 갑자기 부상하면서 부터이다. 아도는 이런 취지에서 현대의 철학들,철학자들이 '이론화 경향'에 목숨거는 것에 대히 눈을 흘긴다. 고대 철학자들은 이성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삶을 추론해 냈다. 그리고 그것을 담론화하며 이와 함께 그들의 추론이 만들어낸 철학대로 살아나가려고 했다. 즉 이렇게 담론과 실천이 하나가 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철학'이라는 말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극단적인예가 '소피스트'들이다. 그들은 말의 철학을 했을 뿐이다.

이쯤 되면 아도의 입장이 명백해졌다. 그렇다면 이제 두 가지를 더 첨부해 주어야 세속적인 이분법에 대한 오해를 풀 수 있을 듯 하다. 하나는 아도가 '실천의 철학'을 말한다고 '담론'을 필요없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철학을 한다는 것은 결국 추론적 사고들을 정리하고, 논리화시키고, 정교화시켜서, 토론하여 교육하는 것이다. 아도는 '영성의 훈련'이라는 말로 고대 철학의 특징을 말한다. 현대 이론이 고담준론화 되어 있기 때문에 '거대 이론'이나 '담론' 이라는 말만 들어도 적대시 하는 태도는 기실 전혀 '철학'적이지 못하다. '담론'과 '실천'은 새의 날개처럼 우리들이 '더 나은 인간'이 되게 하는 철학의 목적에 기여한다.  다음으로 '실천'에 대한 부분이다. 이 '실천'이라는 것은 가끔 '행위'와 혼동되기도 한다. 아무래도  민주화 운동의 역사가 가져다 준 사이드 이펙트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아도가 말하는 '실천'은 거리에 뛰쳐 나가 구호를 외치는 '실천' 을 말하지 않는다. 또 '아는 것을 실천하자' 라는 의미의 '물리적 차원'의 실천만을 뜻하지도 않는다. 오해를 살 수 있는 말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인용해 보자.

어떤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실천적인 삶이 필연적으로 타인들을 향하는 것은 아니다. 행동으로써 발생하는 결과들을 노리는 생각들만이 '실천적인' 것은 아니다. 정신적 활동과 자기 내에 목적을 지니며 그 자체의 관점으로 개진하는 성찰들이 그 보다 훨씬 더 실천적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철학은 '정리적 생활양식'이었다. 그외에도 고대 철학에서는 '높은 곳에서 바라보기'와 같은 정관적인 태도가 장려된다. 이 들이 궁극적으로 이런 '거리두기'를 통해서 다다르고 싶었던 것은 무었인가? 이 점이 중요하다. 그것은 어떤 이에게는 '선'이었고 어떤 이에게는 '신'이었으며, 어떤 이에게는 '궁극적 쾌락'이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자기 감찰'로서의 자기 윤리학의 덕목이다. 즉 궁극적인 선에 다다가기 위한 개인의 절제와 금욕, 자기 훈련을 목적에 둔 '내먼적 실천형식'이다. 그리고 이들이 누구인지도 중요하다. 이들은 그리스 인이다. 그리스 인들은 '현재지향적' 이었으며 또 '실용적'이었다. 그들은 폴리스를 중심으로 누구보다도 더 '정치적'인 사람들이었다. 이들 철학자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했던 바는 '타인과의 대화'이다. 플라톤의 거의 모든 저서가 대화로 이루어져있다는 점은 상징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리스토스텔레스의 '실천'을 세속적으로 '내면으로의 소거' '타인과 세계에 대한 외면'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관적 태도'는 마치 현실의 지평을 떠나서, 관념의 즐거움만을 택하라는 것 처럼 해석하는 보수주의적 태도가 있다. 마치 '순수예술'에 대한 보수주의자들의 열정처럼 그것이 현재의 기득권에 아무런 해를 주지 않고, 자신을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다면 충분히 열린 마음으로 향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면의 성찰' 만을 무 가운데 자르 듯 뚝 잘라서 강조한다. 이것은 코끼리의 다리를 잘라서 '이것이 코끼리의 실체다' 라고 하는 것과 똑같은 무뢰한 짓이다. 세속적으로 말해서도 마찬가지다. '내면의 성찰' ,'영성의 훈련'을 위해서 소크라테스는 거의 거지처럼 살았다. 좀 극단적인 견유주의자 디오니게스는 노숙자였다. 유물론적인 에피쿠로스(마르크스의 박사학위 논문이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였다. 고병권이 번역하여 나와 있다.) 역시 '쾌락'을 '감각적 쾌락'과 '궁극적 쾌락'으로 나누고 후자를 쫓기 위해 금욕을 실천했다. 금욕이 덕목이었던, 스토아 학파는 말할 것도 없다. 거의 모든 그리스 철학은 '내면적 성찰'을 위해 '자기 절제'와 '금욕'을 요구 했다. 그런데 '타인에 대한 관계성'도 없고, '자기 절제'와 '금욕'도 없이, 쓸 것 다 쓰고, 누릴 것 다 누리며 현재의 감각적 세계의 모든 혜택을 배불리 누리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론'만을 빼먹어 쓰는 짓은 졸렬하고 무지한 짓이 아닐 수 없다. 그건 '철학'도 아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자면 '똥떵어리'일 뿐이다. 

피에르 아도의 말을 인용해 보자

철학의 실천은 개별적인 철학사조들의 대립을 초월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 우리의 '세계 내 존재','타인과의 존재'를 의식하려는 노력이며, 메를로 퐁키가 말한 것 처럼 '세계를 보는 법을 다시 배우고" 보편적 시각에 도달하기 위한 노력이다. 이 시각 덕분에 우리는 우리의 개별성을 초월하고 타자의 입장에 설 수 있다.

고대의 철학적 삶은 항상 타인에 대한 관심과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었다는 점을 결코 잊어서는 안되겠다.  

(프리드먼을 인용하여) 현대의 현자는 그토록 많은 심미주의자들이 혐오감을 보이며 외면했던 인간들의 하수구를 외면하지 않는다.

피에르 아도식으로 말해서 우리 시대의 '철학자'란 누굴까 잠시 생각해봤다. 단지 어떤 담론을 만들고 그에 대한 학자적 양심을 거는 수준을 말하는것이 아니다.(지금까지 이야기했는데 아직도 철학자를 그렇게만 말한다면, 내가 글을 친절하게 이해시키지 못한 것이다.) 이것은 '내면적 성찰'을 거쳐 '존재' 자체와 '삶'을 일치되게 만든 분들이다. 결국 우리 시대의 선생이라고 할 만한 분들, 장일순 선생, 전우익 선생, 권정생 선생....그리고 자연의 법을 거르지 않고 그에 맞춰 자연적 농법을 실천하는 농부들.. 이런 분들이 고담준론의 철학책 한 권 제대로 쓰지 않았지만 철학자들이 아닐까 싶다.

이제 다른 이야기를 하자. <고대철학>이 읽기 좋다는 이야기다. 이 책을 읽다보면 왠지 '동양 철학'과 유사한 점을 느끼게 된다. 피에르 아도가 윤리학을 중심으로 그리스 철학을 집중시키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틀린 것이 아니었다. 책 말미에 아도는 '보편적 스토아주의'라는 개념을 꺼낸다. 즉'고대 그리스 철학'에 담긴 생각들이 지역성과 시간성을 넘는 보편성을 띤 것이 아닐까 하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보편적 스토아주의'라고 하는 것에 대해 긴 설명을 하진 않지만 이것은 고대 인도, 중국의 철학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점에서 우리는 서양 철학을 공부하다 학문적으로 동양학을 배운 학자보다 오히려 더 유리하다. 한국인의 삶은 알게 모르게 이런 동양철학의 전통하에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고대 그리스 철학이 모두 올바른 삶이란 무엇인가를 위해 '죽음'에 대해 성찰하고 논리적 추론을 만드는 과정이 등장한다. 예를 들어 에피쿠로스학파의 경우 '죽음'을 '무'이라고 설명한다. 비트겐슈타인 식으로 말하자면 '죽음' 이후는 '삶의 영역'이 아닌 '비시간의 영역'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궁극적으로 '현재의 생에 대한 집중'을 요구하는 것이다. 스토아 학파 역시 '삶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삶은 흘러간다' 는 식으로 '현재에 대한 집중'을 요구했다. 이것은 결국 '자기 자신의 내면에 대한 집중'과도 같은 말이다.

우리는 이런 태도를 익히 알고 있는 공자의 대화에서도 만날 수 있었다.<논어> 선진편에는 계로와 공자와의 대화가 나온다.

계로가 귀신을 섬기는 것에 대해 묻자 공자는 '사람을 섬기지 못하며서 어찌 귀신을 섬기리요'라고 답한다. 이어 계로가 죽음에 대해 묻자 공자는 ' 아직 삶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리오' 라고 답한다.

또한 '그리스 철학'이 '영성훈련'과 '공동체의 안정'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동시에 이루어내고자 했다는 점에서 대학의 가장 유명한 구절인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말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가끔 보수주의자들이 상대방을 공격하기 위해 '수신도 못하는 주제에'라고 하지만 그들은 <대학>이 이 개념들을 순차적으로만 배치한 것이 아닌 것을 모른다. 그리스 철학 역시 개인의 의식을 감찰하는 것과 이것이 더불어 사는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쳐야 하는 지에 대해 동시에 고민했다.

이 외에도 고대 철학 내내 강조되는 '높은 곳에 자기두기' ,'금욕', '감각적 세계에 대한 부정' 같은 개념들은 노자와 장자의 철학을 끊임없이 연상시킨다. 우리들은 알게든 모르게든 중국 고대철학의 세계관에 친숙하다. 그런 차원으로 보자면 서양 학자를 흥분시켰던 '고대 그리스 철학'과 '동양 철학'의 유사성 같은 것들이 책을 더욱 편안하게 만날 수 있는 문화적 자원이 된다.

이럭 저럭 피에르 아도의 <고대철학이란 무엇인가?>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이야기 한 듯 하다. 사족 같지만 피에르 아도는 말년 푸코의 '그리스로의 회귀'에 대해 비판적 시선을 보냈다. 이것은 이 책의 서문에도 잠깐 언급된다. 푸코의 '자기 배려'라는 개념이 자신의 '영성 훈련'이라는 개념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프레데리크 그로가 쓴 <미셸 푸코 진실의 용기>에 보면 아도의 푸코 비판의 핵심이 나온다. 아도는 푸코가 "자신의 윤리적 모델을 실존의 미학으로 규정하면서 너무 단순한 자기 양성을, 다시 말해 20세기 말의 새로운 댄디즘 버전'을 제안했다고 비판한다. <고대철학이란 무엇인가?> 의 행간에도 나오듯이 아도는 고대인들의 자기 변형이 자기 퇴각이 아니라 자기 극복과 보편화를 중요시 하고 궁극적인 '일자'에 대한 합의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핵심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래서 푸코가 자기 수양을 말하면서 결국 개인이 지향할 세계와 공동체 전체를 놓치고 있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미셸 푸코 진실의 용기>의 공저자인 장프랑소와 프라도 역시 고대 철학사 입장에서 만 본다면 푸코의 텍스트 축소와 생략이 지적될 만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피에르 아도 역시 고대 철학의 과학적 양상을 축소하고 고대 철학을 주로 윤리적 소명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 지점을 염두해 두면서 <고대철학이란 무엇인가?>를 본다면 더 넓은 바다로 나가기 위해 필요한 장비를 하나 더 갖춘 마음으로 길을 나서는 든든한 기분이 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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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g 2008-10-28 16:53   좋아요 0 | URL
흥미진진한 리뷰에 힘을 얻어 도전해 봄직한 책입니다
다음달 주문에는 추천해 주신 사막이 들어갈 예정이에요

드팀전 2008-10-28 17:48   좋아요 0 | URL
<사막>은 6-7년전에 봤습니다. 그 맘 때 제가 책 선물로 많이 주었던 것이 <사막>과 <눈먼자들의 도시>였습니다. 주제 사라마구 책은 이후에 입소문을 통해 인기를 얻어서 왠지 기분이 좋았습니다. <사막>도 품절 상태다가 이번 노벨상 수상으로 다시 인기를 얻지 않을까 싶네요. 사막 위에 나타난 청색 인간들인가...하는 구절이 생각납니다.
피에르 아도의 책도 좋습니다.

로쟈 2008-10-29 00:19   좋아요 0 | URL
아도가 <삶의 양식으로서의 철학>이란 책도 쓴 게 있더군요(영역돼 있습니다). 한번 소개된 책의 반응이 좋아야 계속 나올 텐데요...

드팀전 2008-10-29 11:56   좋아요 0 | URL
영역...^^...우리말 번역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2008-11-24 13: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드팀전 2008-11-25 09:21   좋아요 1 | URL
아..그러시군요. <반고흐효과>도 잘 읽었습니다.곧 아도의 책을 또 만날 수 있게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