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 교육은 없다. 이 책엔 대안도 없다.

개인적으로 블로그를 하면서 가장 자주 뵈었던 분이 글샘님이다.

보신분들은 이미 알겠지만 글샘님은 넉넉한 미소에, 불꽃 같은 마음을 가지신 분이다. '외유내강' 을 말한다면 글샘님이 그런 부류일게다. 그 분은  매일같이 전쟁에 비유되는 교육 현장에서 수많은  모순들과 부딪치신다. 그러면서 조금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본인과 아이들에게 길을 열어주고 계신분이다. 먼길을 마다 않고 서울에서 하는 촛불 집회에도 가시고, 개인적 손해를 감내하며 연가투쟁에도 참가하셨다. 학교를 다니면서 몇 몇 이런 선생님들을 만난다면 답답한 학교 생활에 작은 희망이라고 얻을 수 있을 것 이다.

그런나 나는 오늘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간간이 생각해 왔던 것이며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함께 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래서이다. 어떤 절대성을 말하거나, 결벽됨을 논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이래 저래 부족하고 모순적일 수 밖에 없다. 이것은 내가 늘 하던 말이기에 타인에게도 적용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인간이 재미있지 않은가? 그렇지만 이런 모순덩어리를 보고 즐거워하는 것 말고도 할 일은 몇 가지 더 있다. 

글샘님의 <대한민국에 교육은 없다>의 리뷰를 보고 몇 개 생각이 들어서 결국 도발적인 문제제기를 한다. 최대한 감상적인 접근을 그 분에 대한 존경의 뜻으로 자제하겠다. 대신 그런 부분이 생긴다면 이것은 내 부덕의 문제이니 그것이 토론의 중심이 되지 않길 바란다.  

이득재의 글은 교육 관련된 것 말과 예전에 가족 관련된 책을 본 적이 있다. 분석의 틀을 들뢰즈의 이론에서 빌어 왔던 것으로 기억된다. 가족을 '가국'이라는 국가주의와 연결하며, 그 이후는 거의 들뢰즈적 개념들로 한국사회와 가족문화에 적용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교육관련된 책에서도 이와 유사했을 것 같다. 하지만 이야기는 이 책에 대한 것은 아니다. 글샘님의 리뷰에서 역시 현실성이 없는 책에 대한 분노때문에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그 안에 평소하시던 교육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있기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득재의 책과 상관없이 함께 생각해볼 수 있는 것들이 있다고 믿는다.

글샘님의 주장은 한국의 교육이 애초부터 옳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역사에 대한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친일 교육이 반공교육으로 입시교육으로 바뀌어 가는 과정에 대한 것 말이다.

그런데, 2008년 3월 1일, 3.1절날 나온 이 책이 외치는 '교육 부재'는 옳고 옳고 다 옳다.
그렇지만, 태생이 옳지않았던 '학교'에다가 이런 말을 퍼붓는 것은 더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결국 주장의 핵심은 '힘없는 학교에 뭐라하지 말고 학교를 좌지우지 하는 권력'에 문제를 이야기하라는 것이다.

교육은 학교의 문제도, 대학의 문제도, 교육부의 문제도 아니다.
한국 교육의 문제는, 국가 권력의 문제이고, 부를 가진 자들의 문제다.

이 말은 정확하다. '학교'는 하나의 부분이고 '교육제도'에 대한 제유법일 뿐이다. 우리가 '정치적'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거기에도 들어 있다. 학교라는 것은 교육의 최전선이며 또 수요과 공급이 만나는 실재적인 시장이다. 그렇기에 '학교'와 '교육'을 분리해서 이야기할 수는 없다. '학교'의 문제를 이야기 한다는 것은 '교육'시스템 전체 중  일부를 건드리는 것이다.  그것은 거대한 교육이라는 유기체의 말단에 해당하며 또 일반인들이 만나는 가장 큰 촉수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교육행정과 학교 교육의 권력관계가 주객전도 되지 않았다면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교육이 사실 가장 큰 몸통에 해당 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글샘님의 글에는 기본적으로 학교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로서의 속성이 들어 있다. 그러니까 시스템에 반하는 '대안적 교육'이 아니라면 구조적으로 학교 교육은 '권력 관계망' 안에 포섭되어 있다. (물론 상부구조 안에서도 자율성은 살아있다.)

그런데 여기서 글샘님은 책에 대한 분노로 조금 점프를 하신다.


저자의 말대로라면, 대한민국 학교는 다 없애야 한다.
그리고 아이들을 모두 학원으로 보내잔 이야긴지...

이득재의 글이 비현실적이었거나 이해받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하려는 말과 별로 상관이 없다. 나는 이득재의 책을 읽지 않았지만, 궁금해지는 것이 생겼다. 글샘님의 글은 묘하게도 '학교와 학원을 대립항'으로 설정하고 있다. 즉 내가 궁금해진것은  '학교와 학원을 대립항으로만 설정하는 구조'이다. 사실 이 둘은 대립항이 아니다. 둘 다 공통된 목표, 입시를 지향하고 있다. 고전 경제학으로 말하자면 둘은 대체제에서 출발해서, 시장의 논리에 따라 현재는 학원이 절대제가 되어 버린 것이다. 여기서 자세히 봐야 할 것 그리고 질문해야 할 것은 '학교'를 '선'(이것은 착하다는 선이 아니다.)의 개념으로 두는 것이다. 글샘님은 '공교육'을 제대로 살려야 한다는 측면에서 이야기한 것이다. 학교의 대립항은 학원이 아닐 수 도 있다. 예를 들어 탈주론에서 이야기 하는 종류의 '공동체적 교육'같은 것도 일부 소수지만 그 대립항이 될 수 있다. 물론 나는 '공동체 교육'이 전면적인 '공교육'을 대체할 수 없다고 보는쪽이다. 그렇지만 '대립항 설정'은 그 문제를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는 지의 '인식 지평'에 대한 설정과 같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이어서 이런 질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공교육은 권력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글샘님 역시 이 지점이 반어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역사적 전거를 들어서 말하고 있다. 이 말은 결국 앞에서 말한 '이데올로기적 장치'로서 공교육의 존재적 한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하, 한국 교육에서 '공적 개념'이 있던 적이 있었다.
교련 사열하던 시절, 철저히 국가에 복속된 '공공의 노예'가 되어 교복 후크 하나 풀지 못하고 다니던 시절엔 '반공방첩, 간첩신고'등의 모토를 보며 등하교할 때, 우리는 <개인>을 부정당한 <공인>이었다.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땅에 태어날 정도로 <공인>이었다니깐.

여기서는 나는 약간 혼란스러워졌다. '개인'이라는 용어때문이다. '개인'의 자유에 대한 글샘님의 옹호는 이 글 외에도 여러번 접했다. 그것은 '역사적 집단주의'에 대한 반사적 진보개념이다.  글샘님은 '공교육의 제대로된 정상화'를 지지한다. 그런데 역사적으로도 그렇고 이론적으로도 '공교육'은 '개인'의 자유를 보장할 수 없다.(조금은 상대적인 개념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것은 앞서 이야기했던 '공교육'이 '국가 교육'과의 차이를 해명하고 이를 극복해나가기 전까지는 불가하다. 

정리해보면 글샘님은 1)현재 한국 교육은 애초부터 글러먹었다. 2) 그럼에도 제대로된 공교육이 필요하다. 3) 그러나 이건 요원하다. 4) 유일하게 공교육이 공동체적인 것은 '전체주의적 공동체'에 대한 기여일 뿐이다.5)그리고 이것은 철저하게 '개인'을 억압해 왔다.(개인적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사이의 입장은 사실 세밀하게 좀 살펴볼 부분이 있는 지점이다. 안그러면 극단적으로 '신자유주의적 케인즈주의자'가 될 수도 있다.)

결국 '제대로된 공교육'에 대한 가치와 '개인의 자유'가 결절되는 부분은 '두발 문제'에서드러난다.

한국의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을 정상적인 잣대로 재서는 안 된다.
머리를 길러 주라고??? 그러면, 동네의 공부하기 싫어하는 아이들이 선지망을 한다.
그런 아이들이 모인 학교는 성적이 떨어지고, 더욱 학교는 개판이 된다.
지금 내가 근무하는 학교가 그렇다.
올해 머리카락 단속을 심하게 한다.
내년에 학부모들의 1지망이 부쩍 늘 예정이다.
이게 현실이다. 국가인권위원회는 학교에다가 뭐라고 하면 한 된다.
한소리 하려면, 교육부에다하든지, 학원 없애라고 해야 한다.

나는 부당한 '공교육'에 대한 성토와 그에 대한 반동으로 '개인의 옹호' 그리고 '두발 단속의 현실' '이것들이 철학적 모순 없이 쓰일 수 있는 사실을 논리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유일한 길은 '청소년을 미성숙한 개체'로 바라보는 태도 밖에 없다. 즉 '그들은 미래에는 개인이지만 아직 미성숙하기때문에 준개인일뿐이다. 그렇기때문에 그들에 대한 통제는 가능하다.' 그런데 역으로 이런 미성숙한 개인에 대한 통제와 개인에 대한 훈련의 부재는 성숙하지 못한 개인들만을 학교 밖으로 내몰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반복적인 악순환의 고리를 만든다. 이것을 선생님 하나가 끊을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이런 문제의식과 이에 합당한 개인적 실천이 어떤 틈을 만들 수 는 있다고 생각한다.

 글샘님은 지속적으로 '왜곡된 교육현실' 그리고 '비정상적 학교 교육' '개인을 말살한 과거 정권의 교육제도' 에 대해 말하면서 어느 순간 그 모든 것들은 '어쩔 수 없이 분노하는 것'들로만 인정하는 논리로 들어선다. 즉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을 정상적인 잣대로 재서는 안된다' 는 말은 그곳이 비정상적인 영역임을, 변화의 가능성이 폐쇄된 공간임을 단정하는 것이다. 이런 보편성이 소거된 장소에서는 당연히 인권이 소거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흔히 정신병원이나 감옥 입구에서 이런 담론을 쉽게 접하게 된다. " 이곳에서는 이곳의 규칙이 있다." 단테의 <신곡>에서도 무차별적 지옥문 앞에 그런 푯말이 붙어 있다.

"나를 지나가려는 자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 

물론 학교를 단테식의 막혀 있는 지옥으로 까지 해석하고 싶지는 않다.(실제 그 정도로 보일때가 있긴 하지만) 결국 어떻게 해석해도 좋다. 문제는 그런 상황에서 글샘님은 그동안 본인이 비난해왔던 전통적인 즉 교육행정당국들이 요구하는 논리를 따라간다.  글샘님 역시 '동네 공부하기 싫은 아이들' 이 수업 분위기 망치는 것을 배제하고 싶어한다. 과감히 짤라내야 한다라는 말까지 사용한다.(그 어투는 과격하지만 의미는 다른 길을 열어주라로 이해하면 그리 문제될 것은 없다. )그래서 학교 성적이 떨어지고 학교가 개판되는 것을 싫어한다. 결국 이 논리를 가장 극화시킨 것이 '국제중학교'이다. '국제중'과 '외국어고'에는 성적 높고 학교를 개판치지 않는 아이들이 모여든다. 조직의 입장과 개인의 입장이 같지는 않다. 전교조는 '국제중'등의 설립에 대해 부정적인 것으로 알고 있다. 오히려 굳이 나누자면 '평준화'논리에 충실하다.  어떤 모순도 감지되지 않는다면 이상한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건 비약이다.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이 논리가 가진 함의는 여러종류로 무섭기때문에 옮긴다.

밤 12시 넘어까지 학원에서 잡혀있는 것보다,
머리카락 자르는 것이 더 인권을 침해하는 노릇이란 말인가?
회초리로 종아리 한대라도 때려서 가르치는 것이 그렇게 인권 침해란 말인가?

이런 비논리적 선택을 요구하는 질문은 사실 한국의 수구세력이 가장 즐겨쓰는 방법이다. 훨씬 세련된 논리로 '금산법 개정' 이야기 같은 것들이 그 예다. '산업자본의 금융자본 허용'을 두고 한나라당은 '애국주의 자본담론'을 주장했다.(삼성경제연구소에서 나온 담론이다.) '외국자본에게 은행 다 넘어가는 것보다 국내 자본에 진입을 허용하여 지켜야 하지 않느냐' 는 주장을 했다. 결국 그 담론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더 쉬운 예를 들자면 저런 논리는 독재자 전두환이 히틀러에 비하면 덜 죽였기때문에 '인권을 덜 침해했다' 라고 하는 논리와 같이 쓰일 수도 있다. 여기서 죽은이들의 숫자를 세는 방식으로 혹한다면 이미 어젠다는 넘어가는 것이다. (이 예를 든 것은 그것 때문이다.)수구세력들은 이런 방식을 즐겨쓴다. 정답은 숫자를 세지 않는 것이다. 이에 대한 훌륭한 지적은 슬라보예 지젝에게서 나온다. 

저 질문에 대한 답은 둘 다 '인권침해가 맞다.' 이다. 이것이 '인권침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과 '인권침해' 라고 생각하는 것 사이에는 지금은 작지만 나중에는 크게 벌어질 차이가 있다.  

이제 글샘님은 여기서 그 큰 제도를 바꾸기 위한 방법을 이야기 한다. '힘없는 학교에게 요구하는 것은 부당하다' 라는 충분히 설득력있는 논지에서 말이다.(그런데 우리가 '학교'라고 할 때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단지 학생들과 선생이 있는 '학교'가 아니라 '시스템'이라는 대유법으로 쓰인다면 사실 '일반 학교'문제는 과민한 변호에 가깝다.)

정치에 철저하게 종속된 한국의 학교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정권을 바꾸어야 한다.
그것도 철저한 노동자의 정권으로

마치 세기 초의 혁명구호를 보는 듯 하다. 그런데 이 말이 가진 의미와 진정성을 알 수는 없다. 나는 진정으로 '노동자 정권'이 의미하는 바를 모르겠다는 뜻이다. 글샘님의 사회주의적 지향을 뭐라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차원이라면 나 역시 그 비난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보다 '노동자 정권'으로가 그저 하는 '이데올로기적 과격성' 외에 '삶의 양식'으로서의 진정성을 가진 말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는 것이다. 또한 재미있는 것이 있는데...한국의 교육은 철저하게 권력 손안에 들어 있지만 노동자 정권의 교육은 그런 권력로 부터 벗어나 있다는 뜻으로 읽힌다. 이것은 '권력' 문제에 대해 지나치게 일면적인 접근이다. 노동자 정권 역시 '정치 권력 '아니던가? (아나키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권력의 항상성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정식적으로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다.

" 진정 노동자 정권으로의 전복을 꿈꾸시나요? " 

피에르 아도는 <고대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현재 철학의 이론화 경향-즉 철학과 철학 담론의 구분-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조금 예외라고 했다. 그 이유를 그는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마르크스에게 중요했던 것이 '실천의 영역' 즉 아도식으로 말하자면 '생활양식'으로서의 철학을 요구했기 때문이 아닐가 싶다. 그러나 마르크스 자체도 가치론에 있어서 사변적이고 이론적으로 으로 흐른 지점은 비판받는다.    

글 뒷부분에 글샘님은 교육 현장에서의 어려움에 대해 말한다. 가르치는 행위 말고도 헤야할 업무가 산적해 있는 선생님들에게 제대로 된 교육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문제다. 실제로 선생님들의 업무와 사회적 기대는 과하다. 그 점에서 선생님들의 노고를 이해해야 한다. 현재의 시스템 하에서 선생님들에게 과부하가 걸린 것은 틀린 말은 아니다.(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정된 직장때문에 여전히 가장 인기있는 직장 중에 하나이다. 여기서 현재 금융위기에 일촉즉발 긴장하는 직장인들의 비애를 이야기하지는 않겠다. 그건 앞선 비교의 예와 똑같아지기 때문이다.)

소포클레스의 비극에 나오는 질문이었는데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만약 지혜로운자가 지혜로운 것을 이해받지도, 이해 되지도 못하는 지혜롭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 해야하는가?' 하는 자탄어린 질문이었다. 글샘님의 딜레마는 수 천년전의 그것에 닿아 있다. 글샘님은 한국 교육의 왜곡에 대해 그 기원과 역사, 그리고 현실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아마 알라딘의 그 누구보다 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것이다. 나는 선생님의 학생들에 대한 애정과 고민들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런 선생님들이 주변에 가끔씩 계시다는 것에 용기를 얻기도 한다.

그런데 글샘님의 교육에 대한 해법은 넘을 수 없는 벽 앞에서 쉬운 길을 이야기하고, 그것을 현실이라는 말로 이해시키려 한다. 그 지점이 안타깝다. (물론 이건 내게만 안타깝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벽'에 대한 해박한 이해와 '현실에 대한 몰입'은 수 많은 '상상력'들을 좌절시키기 때문이다. 글샘님이 상경투쟁을 하면서까지 열심히 하셨던 '촛불집회'에서 그 분은 '상상력에게 권력을'이라는 68혁명의 슬로건을 목도하고 즐거워하셨다.

그렇다면 우리 교육에도 상상력이 필요하다. (비록 공교육의 전복으로 까지 이루어지지는 못할 거라는 한계가 있지만 말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말이 학생들의 두발 자유에 기여하길 바란다.

"플라톤의 국가를 기대하지 말고 그저 작은 것 하나가 진보하거든 그것을 족히 여기라. 그리고 그러한 작은 것에서 비롯되는 것은 결코 그리 작은 것이 아님을 생각하라."

 

...쓰다보니 긴 글이 되었다. 지금도 아이들과 씨름하고 계실 글샘님에 대한 비난으로 읽히지 않길 바란다. 그냥 질문과 논리의 습작으로 이해하는게 오히려 나을 것 같다. 앞서도 말했지만 나는 글샘님을 블로거 중에 가장 여러번 만났고 평소에도 그분의 전체적인 지향에 대해 함께 한다. 물론 몇 몇 근원적인 태도에서 나와 다른 부분은 확실히 있다. 그런 걸 모르고 글샘님의 평소 정치관에 대한 안티로 '박수'를 보내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 제대로 글을 읽을 줄 모르는 바보다. 진짜 척결되어야 할 사람은 그런 취지로 박수를 보내는 당신이다. 또 진보적인 글샘님을 비판하기 때문에 '당신 분파지?' 하는 자도 똑같이 '정신의 문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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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8-10-27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상은 짧은 생각인데... 긴 생각을 적어 주셨군요. ^^
제가 감정에 치우쳐서 쓴 글을 이렇게 논리적으로 비판해 주시니... 황송합니다.
제가 학교를 옹호할 수밖에 없는 건, 여기 있고 매일 교사역할을 수행하고 있기때문에 논리 이전에 생활을 쓰다보니 그렇게 된 거지요.
학교를 전면적으로 개혁할 뻔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노무현 탄핵 국면에서 <교육개발원>에선 교장제도 개선을 위한 보고서를 낸 적이 있었거든요. 거기 상당히 발전적인 상상력을 개재시킬 여유가 있었는데... 탄핵 국면 지나고 파병하고 하면서 교육개혁의 방향을 교사개혁으로 몰아가 버리더라구요. 물론 교사개혁도 필요하지만, 백년지대계라면 가장 문제점이 되는 고리를 손봐야 하는 것이었는데 말입니다.
제가 아이들 두발 자유를 억압하는 쪽에 선 것에 대하여 이해하실 수 없겠지만,
두발 자유 이후의 학교들이 2,3년 안에 거의 모조리 단속으로 돌아선 사정까지 말씀드리긴 좀 어렵네요.
제가 전적으로 노동자 정부를, 사회주의 정부를 원하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그런 정부를 들은 적도 본 적도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학생을 위한 교사가 있는 학교를 국가가 좀 지원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그게 공교육 아닌가, 싶어서 푸념해 본거랍니다.
논리적 비약도, 닫힌 상상력도 모두 제 무지의 소치입니다.
그래도 이런 비판의 글은 달게 읽겠습니다. 담에 또 써 주세요. ^^(시간이 많으시다면...)
저는 이제 퇴근합니다. 애들이 종례하러 빨리 오래요.

드팀전 2008-10-27 23:24   좋아요 0 | URL
종례는 빨리 해주셔야지요. 제일 욕먹는 담탱이(비하적 발언이지만 저희때 쓰던 말이라서 한 번 떠올려봤습니다.)가 종례시간에 안오는 선생님이지요.^^

불편한 글일텐데 너그럽게 봐주신-완전히는 아니겠지만-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저 역시 외곽의 시선이기때문에-아이를 아직 학교에 보내지도,또 교직에 있지도 않으니- 내부 시선과는 다른 측면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대신 아이가 생기니까 이 아이를 어떤 철학을 가지고,어떻게 키워야 할 지에 대해서는 조금 더 실재적으로 많이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 애정으로 봐주시길 바랍니다.

두발문제는 사실 성장통이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성장통이 만약에 보편적 가치의 성취를 위한 것이라면 한 동안의 불편함과 못마땅함을 거두어야 되는 건 아닐까 싶습니다. '짧은 머리'의 기원이 일본 군사주의 교육정책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솔직히 가끔은 머릿이때문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합니다.)어쨋든 지금은 그 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그런 잔재로 신체의 자유에 대한 '통제' 양식를 띠고 있는 것은 그런 문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합니다. 선진국의 어느 나라도 두발 문제로 학생들을 교문 앞에서 잡아채지는 않을겝니다.

수능이 코 앞이니 아이들이나 선생님도 싱숭생숭 해지시겠네요.^^

글샘 2008-10-28 0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두발과 인권을 떠들어댄 것은, 두발단속이 꼭 필요하대서가 아닙니다.
학생들이 1년에 수십, 수백명씩 자살하는 이 나라에서, 공부하다가 죽은 놈 없다는 인식을 하는 '편견'을 일깨우고 싶었던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노무현 정권이 사학법 개정 - 교장선출제 개선 - 대학입시 개선 - 공교육 정상화의 플랜을 갖고 있었기에 저는 참 희망을 가졌더랬는데요, 문턱에서 좌절되는 걸 보고 슬픈 마음 가눌 길이 없답니다.
아직도 학교의 모순이 전혀 개선되지 않는 고리가 승진제도에 있거든요.
교육운동의 모습도 전교조가 너무 매도되고, 그러다보니 좀 파행적으로 운영되고, 이제는 전교조도 당신들의 조직이 되어버린 느낌이어서(젊은 조합원이 드물거든요.) 교육의 희망을 어디서 찾아야 할는지... 저도 고민중에 있습니다.
요즘은 학습기술을 연구하면서 교사들과 학습하는 방법의 학습으로 학생에게 다가갈 수 있는 교사들의 모임을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교육운동에는 반드시 교사들의 학습이 필요하거든요. (그것도 교사들이 연세가 높으셔서 힘들긴 합니다만... 제가 경력 20년인데 아직도 2/3 지점에 머물고 있으니 말이죠.)
전교조가 생길 수 있었던 힘은, 바로 학교에서 공부하던 팀이 많았다는 데 있거든요. 그런데 막상 전교조가 합법화된 지금, 단위학교에선 전교조 분회원 교육도 거의 없습니다. 유명무실한 조직이죠. 머리는 커졌고, 수뇌부는 20년 전 그사람들이고, 몸통은 새몸인데... 새판을 짜야할 때가 된 것인데, 몸통의 사람들은 점점 무심해 지고 있구요.
배운 게 이 노릇이라, 아이들과 매일 뒹굴면서 존경받는 교사는 커녕 욕이나 먹지 않으면 다행으로 살고 있습니다만, 나날이 달라지는 아이들을 생각하지 않는 교육제도가 막막하기도 해요.
학교에 대한 질타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저는 이 나라의 교육은 문제 교사 하나 때리고, 교원평가해서 줄세우고...하는 걸로는 제자리걸음밖에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좀 오바한 거구요.
핀란드처럼, 국가에서 교육에 좀 관심을 가지고 투자를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교육과 의료는 국가와 국민의 공생을 뒷받침하는 건데, 교육에 관심없고 경쟁에만 관심이 있는 것 같아서(국제중, 특목고의 논리는 오로지 경쟁, 승리죠) 마음이 아픕니다.
공부 못하는 학생도 학생이다!고 하기 전에, 학교를 공부 못하는 학생과 잘하는 학생으로 나누려는 의도를 자꾸 저지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지금 실업계는 무조건 공부 못하는 학생이 가는 데라는 의식이 많습니다. 그러면 없애야죠.
아니면 직업교육을 제대로 시키든가.

또 말만 많아졌군요.
수능이 정말 코앞입니다. 우리 마을은 잘사는 마을이 아니어서 아이들 학력도 중간 아래인데... 아이들이 이제 조금 긴장하고 있습니다.(휴, 이제서야...) 내 자식 잘 되길 바라듯이 우리반 아이들이 시험 잘 쳐오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매사가 모순이네요. ^^

노이에자이트 2008-10-28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교조에서 한때는 체벌이나 두발규제 금지운동도 한 걸로 아는데 요즘은 안하나 봐요.두 분이 "한국의 학교 현장에서 학생의 인권을 위해서는 교사는 어디까지 할 수 있는가"로 토론주제를 좁혀서 얘기하면 좋을 듯 싶습니다.

드팀전 2008-10-28 17:53   좋아요 0 | URL
노이에님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듣고 싶군요...오늘 <시사in>을 봤는데 특집 주제가'보수의 마녀사냥, 전교조> 였습니다. 관심을 가져야 될 기사라고 보였습니다. 언론과 동시에 와해 시나리오가 있더군요.언론보다 전교조가 전략전술면에서 더 취약해 보여서 어떤 현명한 대책이 있어야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Arch 2008-10-28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부와 내부의 시선은 다를 수 밖에 없겠지만 꼭 당사자성이 있어야 논의를 할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물론 이 부분은 두분께서도 말씀하셨지만. 아무래도 현안에 자주 접하다보면 좀 더 감정이 겪하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논의와 상관없을지도 모르겠지만 전 전교조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변을 보면 전교조 선생님들한테 피해를 봤다는 얘기가 들려서 이것도 언론과 뜬구름 잡는 소문 때문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곤 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건 전교조 선생님들이 그동안 수구세력들이 뻔하게 저질러온 교육의 많은 불합리한 일들에 제동을 걸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게 비록 보여지는바로는 여러 모순에 직면해있을지라도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다고 대의를 위해 작은 일을 접어두자란 뜻은 아니구요.
이건 전교조 뿐 아니라 모든 진보세력의 문제로 보이는데요. 성관련 범죄만해도 한나라당은 성범죄당이라고 할정도로 비일비재하게 문제가 불거지고 있지만 아무도 나서서 말하지 않죠. 그들도 자성하지 않고. 그런데 조금 좌편향된 당에서 성범죄 얘기가 나오면 시끌벅적합니다. 진보를 자임하는만큼 자성의 목소리를 높이는 거고, 부딪힘으로 현실을 조금씩 바꿔나갈 수 있단 생각이 듭니다만 아무런 논의없이 의례 그려려니 하는데 비해 조금 억울하단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게 민주주의의 과정이고 진정한 진보의 방향이란 생각이 들면서도 말이죠.
너무 멀리 나간 얘기 같네요. 옥찌들이 싸우는 바람에 이러는거라면 핑계고, 두분 논의를 보면서 좀 더 생각을 정리해야겠어요.


드팀전 2008-10-29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앞서도 말했지만 <시사in>의 특집 주제가 '전교조'이니까 참고해 보시면 좋을 듯 합니다. 언론은 '언론의 자유를 위한 투쟁'이라는 대의명분이 설령 우파라고 하더라도- 앞에 대놓고는 뭐라하지 못할-지지를 얻을 수 있지만 전교조는 이런 측면에서 전선이 더 넓고 또 한편으로는 '좌/우'로 나뉘어 공격받기에도 좋기때문에 싸움에 더 취약할 수 밖에 없어보입니다. 미디어정치에 있어서도 언론은 언로라도 몇 개 있지만 교육계는 그러지도 못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