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 교육은 없다. 이 책엔 대안도 없다.
개인적으로 블로그를 하면서 가장 자주 뵈었던 분이 글샘님이다.
보신분들은 이미 알겠지만 글샘님은 넉넉한 미소에, 불꽃 같은 마음을 가지신 분이다. '외유내강' 을 말한다면 글샘님이 그런 부류일게다. 그 분은 매일같이 전쟁에 비유되는 교육 현장에서 수많은 모순들과 부딪치신다. 그러면서 조금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본인과 아이들에게 길을 열어주고 계신분이다. 먼길을 마다 않고 서울에서 하는 촛불 집회에도 가시고, 개인적 손해를 감내하며 연가투쟁에도 참가하셨다. 학교를 다니면서 몇 몇 이런 선생님들을 만난다면 답답한 학교 생활에 작은 희망이라고 얻을 수 있을 것 이다.
그런나 나는 오늘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간간이 생각해 왔던 것이며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함께 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래서이다. 어떤 절대성을 말하거나, 결벽됨을 논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이래 저래 부족하고 모순적일 수 밖에 없다. 이것은 내가 늘 하던 말이기에 타인에게도 적용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인간이 재미있지 않은가? 그렇지만 이런 모순덩어리를 보고 즐거워하는 것 말고도 할 일은 몇 가지 더 있다.
글샘님의 <대한민국에 교육은 없다>의 리뷰를 보고 몇 개 생각이 들어서 결국 도발적인 문제제기를 한다. 최대한 감상적인 접근을 그 분에 대한 존경의 뜻으로 자제하겠다. 대신 그런 부분이 생긴다면 이것은 내 부덕의 문제이니 그것이 토론의 중심이 되지 않길 바란다.
이득재의 글은 교육 관련된 것 말과 예전에 가족 관련된 책을 본 적이 있다. 분석의 틀을 들뢰즈의 이론에서 빌어 왔던 것으로 기억된다. 가족을 '가국'이라는 국가주의와 연결하며, 그 이후는 거의 들뢰즈적 개념들로 한국사회와 가족문화에 적용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교육관련된 책에서도 이와 유사했을 것 같다. 하지만 이야기는 이 책에 대한 것은 아니다. 글샘님의 리뷰에서 역시 현실성이 없는 책에 대한 분노때문에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그 안에 평소하시던 교육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있기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득재의 책과 상관없이 함께 생각해볼 수 있는 것들이 있다고 믿는다.
글샘님의 주장은 한국의 교육이 애초부터 옳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역사에 대한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친일 교육이 반공교육으로 입시교육으로 바뀌어 가는 과정에 대한 것 말이다.
그런데, 2008년 3월 1일, 3.1절날 나온 이 책이 외치는 '교육 부재'는 옳고 옳고 다 옳다.
그렇지만, 태생이 옳지않았던 '학교'에다가 이런 말을 퍼붓는 것은 더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결국 주장의 핵심은 '힘없는 학교에 뭐라하지 말고 학교를 좌지우지 하는 권력'에 문제를 이야기하라는 것이다.
교육은 학교의 문제도, 대학의 문제도, 교육부의 문제도 아니다.
한국 교육의 문제는, 국가 권력의 문제이고, 부를 가진 자들의 문제다.
이 말은 정확하다. '학교'는 하나의 부분이고 '교육제도'에 대한 제유법일 뿐이다. 우리가 '정치적'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거기에도 들어 있다. 학교라는 것은 교육의 최전선이며 또 수요과 공급이 만나는 실재적인 시장이다. 그렇기에 '학교'와 '교육'을 분리해서 이야기할 수는 없다. '학교'의 문제를 이야기 한다는 것은 '교육'시스템 전체 중 일부를 건드리는 것이다. 그것은 거대한 교육이라는 유기체의 말단에 해당하며 또 일반인들이 만나는 가장 큰 촉수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교육행정과 학교 교육의 권력관계가 주객전도 되지 않았다면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교육이 사실 가장 큰 몸통에 해당 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글샘님의 글에는 기본적으로 학교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로서의 속성이 들어 있다. 그러니까 시스템에 반하는 '대안적 교육'이 아니라면 구조적으로 학교 교육은 '권력 관계망' 안에 포섭되어 있다. (물론 상부구조 안에서도 자율성은 살아있다.)
그런데 여기서 글샘님은 책에 대한 분노로 조금 점프를 하신다.
저자의 말대로라면, 대한민국 학교는 다 없애야 한다.
그리고 아이들을 모두 학원으로 보내잔 이야긴지...
이득재의 글이 비현실적이었거나 이해받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하려는 말과 별로 상관이 없다. 나는 이득재의 책을 읽지 않았지만, 궁금해지는 것이 생겼다. 글샘님의 글은 묘하게도 '학교와 학원을 대립항'으로 설정하고 있다. 즉 내가 궁금해진것은 '학교와 학원을 대립항으로만 설정하는 구조'이다. 사실 이 둘은 대립항이 아니다. 둘 다 공통된 목표, 입시를 지향하고 있다. 고전 경제학으로 말하자면 둘은 대체제에서 출발해서, 시장의 논리에 따라 현재는 학원이 절대제가 되어 버린 것이다. 여기서 자세히 봐야 할 것 그리고 질문해야 할 것은 '학교'를 '선'(이것은 착하다는 선이 아니다.)의 개념으로 두는 것이다. 글샘님은 '공교육'을 제대로 살려야 한다는 측면에서 이야기한 것이다. 학교의 대립항은 학원이 아닐 수 도 있다. 예를 들어 탈주론에서 이야기 하는 종류의 '공동체적 교육'같은 것도 일부 소수지만 그 대립항이 될 수 있다. 물론 나는 '공동체 교육'이 전면적인 '공교육'을 대체할 수 없다고 보는쪽이다. 그렇지만 '대립항 설정'은 그 문제를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는 지의 '인식 지평'에 대한 설정과 같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이어서 이런 질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공교육은 권력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글샘님 역시 이 지점이 반어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역사적 전거를 들어서 말하고 있다. 이 말은 결국 앞에서 말한 '이데올로기적 장치'로서 공교육의 존재적 한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하, 한국 교육에서 '공적 개념'이 있던 적이 있었다.
교련 사열하던 시절, 철저히 국가에 복속된 '공공의 노예'가 되어 교복 후크 하나 풀지 못하고 다니던 시절엔 '반공방첩, 간첩신고'등의 모토를 보며 등하교할 때, 우리는 <개인>을 부정당한 <공인>이었다.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땅에 태어날 정도로 <공인>이었다니깐.
여기서는 나는 약간 혼란스러워졌다. '개인'이라는 용어때문이다. '개인'의 자유에 대한 글샘님의 옹호는 이 글 외에도 여러번 접했다. 그것은 '역사적 집단주의'에 대한 반사적 진보개념이다. 글샘님은 '공교육의 제대로된 정상화'를 지지한다. 그런데 역사적으로도 그렇고 이론적으로도 '공교육'은 '개인'의 자유를 보장할 수 없다.(조금은 상대적인 개념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것은 앞서 이야기했던 '공교육'이 '국가 교육'과의 차이를 해명하고 이를 극복해나가기 전까지는 불가하다.
정리해보면 글샘님은 1)현재 한국 교육은 애초부터 글러먹었다. 2) 그럼에도 제대로된 공교육이 필요하다. 3) 그러나 이건 요원하다. 4) 유일하게 공교육이 공동체적인 것은 '전체주의적 공동체'에 대한 기여일 뿐이다.5)그리고 이것은 철저하게 '개인'을 억압해 왔다.(개인적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사이의 입장은 사실 세밀하게 좀 살펴볼 부분이 있는 지점이다. 안그러면 극단적으로 '신자유주의적 케인즈주의자'가 될 수도 있다.)
결국 '제대로된 공교육'에 대한 가치와 '개인의 자유'가 결절되는 부분은 '두발 문제'에서드러난다.
한국의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을 정상적인 잣대로 재서는 안 된다.
머리를 길러 주라고??? 그러면, 동네의 공부하기 싫어하는 아이들이 선지망을 한다.
그런 아이들이 모인 학교는 성적이 떨어지고, 더욱 학교는 개판이 된다.
지금 내가 근무하는 학교가 그렇다.
올해 머리카락 단속을 심하게 한다.
내년에 학부모들의 1지망이 부쩍 늘 예정이다.
이게 현실이다. 국가인권위원회는 학교에다가 뭐라고 하면 한 된다.
한소리 하려면, 교육부에다하든지, 학원 없애라고 해야 한다.
나는 부당한 '공교육'에 대한 성토와 그에 대한 반동으로 '개인의 옹호' 그리고 '두발 단속의 현실' '이것들이 철학적 모순 없이 쓰일 수 있는 사실을 논리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유일한 길은 '청소년을 미성숙한 개체'로 바라보는 태도 밖에 없다. 즉 '그들은 미래에는 개인이지만 아직 미성숙하기때문에 준개인일뿐이다. 그렇기때문에 그들에 대한 통제는 가능하다.' 그런데 역으로 이런 미성숙한 개인에 대한 통제와 개인에 대한 훈련의 부재는 성숙하지 못한 개인들만을 학교 밖으로 내몰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반복적인 악순환의 고리를 만든다. 이것을 선생님 하나가 끊을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이런 문제의식과 이에 합당한 개인적 실천이 어떤 틈을 만들 수 는 있다고 생각한다.
글샘님은 지속적으로 '왜곡된 교육현실' 그리고 '비정상적 학교 교육' '개인을 말살한 과거 정권의 교육제도' 에 대해 말하면서 어느 순간 그 모든 것들은 '어쩔 수 없이 분노하는 것'들로만 인정하는 논리로 들어선다. 즉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을 정상적인 잣대로 재서는 안된다' 는 말은 그곳이 비정상적인 영역임을, 변화의 가능성이 폐쇄된 공간임을 단정하는 것이다. 이런 보편성이 소거된 장소에서는 당연히 인권이 소거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흔히 정신병원이나 감옥 입구에서 이런 담론을 쉽게 접하게 된다. " 이곳에서는 이곳의 규칙이 있다." 단테의 <신곡>에서도 무차별적 지옥문 앞에 그런 푯말이 붙어 있다.
"나를 지나가려는 자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
물론 학교를 단테식의 막혀 있는 지옥으로 까지 해석하고 싶지는 않다.(실제 그 정도로 보일때가 있긴 하지만) 결국 어떻게 해석해도 좋다. 문제는 그런 상황에서 글샘님은 그동안 본인이 비난해왔던 전통적인 즉 교육행정당국들이 요구하는 논리를 따라간다. 글샘님 역시 '동네 공부하기 싫은 아이들' 이 수업 분위기 망치는 것을 배제하고 싶어한다. 과감히 짤라내야 한다라는 말까지 사용한다.(그 어투는 과격하지만 의미는 다른 길을 열어주라로 이해하면 그리 문제될 것은 없다. )그래서 학교 성적이 떨어지고 학교가 개판되는 것을 싫어한다. 결국 이 논리를 가장 극화시킨 것이 '국제중학교'이다. '국제중'과 '외국어고'에는 성적 높고 학교를 개판치지 않는 아이들이 모여든다. 조직의 입장과 개인의 입장이 같지는 않다. 전교조는 '국제중'등의 설립에 대해 부정적인 것으로 알고 있다. 오히려 굳이 나누자면 '평준화'논리에 충실하다. 어떤 모순도 감지되지 않는다면 이상한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건 비약이다.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이 논리가 가진 함의는 여러종류로 무섭기때문에 옮긴다.
밤 12시 넘어까지 학원에서 잡혀있는 것보다,
머리카락 자르는 것이 더 인권을 침해하는 노릇이란 말인가?
회초리로 종아리 한대라도 때려서 가르치는 것이 그렇게 인권 침해란 말인가?
이런 비논리적 선택을 요구하는 질문은 사실 한국의 수구세력이 가장 즐겨쓰는 방법이다. 훨씬 세련된 논리로 '금산법 개정' 이야기 같은 것들이 그 예다. '산업자본의 금융자본 허용'을 두고 한나라당은 '애국주의 자본담론'을 주장했다.(삼성경제연구소에서 나온 담론이다.) '외국자본에게 은행 다 넘어가는 것보다 국내 자본에 진입을 허용하여 지켜야 하지 않느냐' 는 주장을 했다. 결국 그 담론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더 쉬운 예를 들자면 저런 논리는 독재자 전두환이 히틀러에 비하면 덜 죽였기때문에 '인권을 덜 침해했다' 라고 하는 논리와 같이 쓰일 수도 있다. 여기서 죽은이들의 숫자를 세는 방식으로 혹한다면 이미 어젠다는 넘어가는 것이다. (이 예를 든 것은 그것 때문이다.)수구세력들은 이런 방식을 즐겨쓴다. 정답은 숫자를 세지 않는 것이다. 이에 대한 훌륭한 지적은 슬라보예 지젝에게서 나온다.
저 질문에 대한 답은 둘 다 '인권침해가 맞다.' 이다. 이것이 '인권침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과 '인권침해' 라고 생각하는 것 사이에는 지금은 작지만 나중에는 크게 벌어질 차이가 있다.
이제 글샘님은 여기서 그 큰 제도를 바꾸기 위한 방법을 이야기 한다. '힘없는 학교에게 요구하는 것은 부당하다' 라는 충분히 설득력있는 논지에서 말이다.(그런데 우리가 '학교'라고 할 때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단지 학생들과 선생이 있는 '학교'가 아니라 '시스템'이라는 대유법으로 쓰인다면 사실 '일반 학교'문제는 과민한 변호에 가깝다.)
정치에 철저하게 종속된 한국의 학교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정권을 바꾸어야 한다.
그것도 철저한 노동자의 정권으로
마치 세기 초의 혁명구호를 보는 듯 하다. 그런데 이 말이 가진 의미와 진정성을 알 수는 없다. 나는 진정으로 '노동자 정권'이 의미하는 바를 모르겠다는 뜻이다. 글샘님의 사회주의적 지향을 뭐라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차원이라면 나 역시 그 비난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보다 '노동자 정권'으로가 그저 하는 '이데올로기적 과격성' 외에 '삶의 양식'으로서의 진정성을 가진 말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는 것이다. 또한 재미있는 것이 있는데...한국의 교육은 철저하게 권력 손안에 들어 있지만 노동자 정권의 교육은 그런 권력로 부터 벗어나 있다는 뜻으로 읽힌다. 이것은 '권력' 문제에 대해 지나치게 일면적인 접근이다. 노동자 정권 역시 '정치 권력 '아니던가? (아나키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권력의 항상성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정식적으로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다.
" 진정 노동자 정권으로의 전복을 꿈꾸시나요? "
피에르 아도는 <고대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현재 철학의 이론화 경향-즉 철학과 철학 담론의 구분-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조금 예외라고 했다. 그 이유를 그는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마르크스에게 중요했던 것이 '실천의 영역' 즉 아도식으로 말하자면 '생활양식'으로서의 철학을 요구했기 때문이 아닐가 싶다. 그러나 마르크스 자체도 가치론에 있어서 사변적이고 이론적으로 으로 흐른 지점은 비판받는다.
글 뒷부분에 글샘님은 교육 현장에서의 어려움에 대해 말한다. 가르치는 행위 말고도 헤야할 업무가 산적해 있는 선생님들에게 제대로 된 교육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문제다. 실제로 선생님들의 업무와 사회적 기대는 과하다. 그 점에서 선생님들의 노고를 이해해야 한다. 현재의 시스템 하에서 선생님들에게 과부하가 걸린 것은 틀린 말은 아니다.(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정된 직장때문에 여전히 가장 인기있는 직장 중에 하나이다. 여기서 현재 금융위기에 일촉즉발 긴장하는 직장인들의 비애를 이야기하지는 않겠다. 그건 앞선 비교의 예와 똑같아지기 때문이다.)
소포클레스의 비극에 나오는 질문이었는데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만약 지혜로운자가 지혜로운 것을 이해받지도, 이해 되지도 못하는 지혜롭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 해야하는가?' 하는 자탄어린 질문이었다. 글샘님의 딜레마는 수 천년전의 그것에 닿아 있다. 글샘님은 한국 교육의 왜곡에 대해 그 기원과 역사, 그리고 현실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아마 알라딘의 그 누구보다 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것이다. 나는 선생님의 학생들에 대한 애정과 고민들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런 선생님들이 주변에 가끔씩 계시다는 것에 용기를 얻기도 한다.
그런데 글샘님의 교육에 대한 해법은 넘을 수 없는 벽 앞에서 쉬운 길을 이야기하고, 그것을 현실이라는 말로 이해시키려 한다. 그 지점이 안타깝다. (물론 이건 내게만 안타깝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벽'에 대한 해박한 이해와 '현실에 대한 몰입'은 수 많은 '상상력'들을 좌절시키기 때문이다. 글샘님이 상경투쟁을 하면서까지 열심히 하셨던 '촛불집회'에서 그 분은 '상상력에게 권력을'이라는 68혁명의 슬로건을 목도하고 즐거워하셨다.
그렇다면 우리 교육에도 상상력이 필요하다. (비록 공교육의 전복으로 까지 이루어지지는 못할 거라는 한계가 있지만 말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말이 학생들의 두발 자유에 기여하길 바란다.
"플라톤의 국가를 기대하지 말고 그저 작은 것 하나가 진보하거든 그것을 족히 여기라. 그리고 그러한 작은 것에서 비롯되는 것은 결코 그리 작은 것이 아님을 생각하라."
...쓰다보니 긴 글이 되었다. 지금도 아이들과 씨름하고 계실 글샘님에 대한 비난으로 읽히지 않길 바란다. 그냥 질문과 논리의 습작으로 이해하는게 오히려 나을 것 같다. 앞서도 말했지만 나는 글샘님을 블로거 중에 가장 여러번 만났고 평소에도 그분의 전체적인 지향에 대해 함께 한다. 물론 몇 몇 근원적인 태도에서 나와 다른 부분은 확실히 있다. 그런 걸 모르고 글샘님의 평소 정치관에 대한 안티로 '박수'를 보내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 제대로 글을 읽을 줄 모르는 바보다. 진짜 척결되어야 할 사람은 그런 취지로 박수를 보내는 당신이다. 또 진보적인 글샘님을 비판하기 때문에 '당신 분파지?' 하는 자도 똑같이 '정신의 문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