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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의 변명.크리톤.향연.파이돈 - 개정신판 ㅣ 세상을 움직이는 책 34
플라톤 지음, 박병덕 옮김 / 육문사 / 2007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인문학의 위기론'이 새로운 대응을 낳고 있다. '인문학 위기론'의 출처인 대학에서는 비인기인문학과들이 통폐합의 수난을 겪고 있다. 반면 상아탑을 나선 공간에서 '인문학'은 새롭게 싹을 틔우고 있다. 백발의 은퇴한 교사가 고전 강의를 듣기도 하고, 점심 시간에 여고동창들과 자식 자랑,며느라 뒷담화에 열을 올리던 아주머니들이 노트에 열심히 필기를 한다. 거기에 '희망의 인문학'의 새로운 버전으로 노숙자나 빈곤층을 위한 강의들로 계속 해서 이어지고 있다. 이윤의 노예처럼 그려지던 '전문경영인'들 역시 고액의 '인문학' 강좌를 열심히 따라다닌다. '인문학'이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자기를 새롭게 배치하려는 노력은 일단 가상하다.
그런데 생각을 해보면 여기에는 무언가 뒤틀림이 느껴진다. 특히 수천만원을 호가한다는 CEO들을 위한 인문학은 더욱 그렇다. 인터넷에서 본 몇 몇 사진들은 중세 시대 철학의 굴욕을 비유하는'신학의 시녀' 보다 오히려 더 굴욕적이다. 좀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자본의 시녀'가 된 '철학'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그렇게 '철학'은 허약하지 않다.) 별 다섯개 짜리 특급 호텔 리셉션장에는 고급 양복을 입은 CEO들이 눈을 반짝이며 앉아 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 대학 교수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에 감탄하며 '현묘의 도'를 깨달은 듯 한 고개짓을 한다. 하지만 나는 그 고급-아니 고가의- 인문학 강좌에 앉은 자들은 결코 '현묘의 도'를 깨달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경영인들을 너무 평가절하한다고 생각치는 말기 바란다. 그들 대부분은 좋은 대학과 좋은 대학원을 나왔을 것이다. 국제수지 그래프를 읽는 눈은 누구보다 빠를 것이고, 수많은 성공심리학이 가르쳐준 '인간심리'에 대해서는 박사 학위자들보다 나을 것이다. 나는 모든 '경영인'들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훌륭한 경영인들은 수많은 노동자들에게 좋은 일자리와 그들의 가족들을 부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또한 좋은 직장 안에서 노동자들은 자기의 능력을 발휘하며 자신의 꿈을 이루어나간다. 평등한 노사관계가 보장된 곳이라면 공장의 최고 주인은 아니어도 동등한 주인정도로는 대접을 받을 수있을게다.(인문학의 배운 CEO들이 강좌가 끝나고 그런 태도로 돌변해주길 기대한다.)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인문학이 대중과 소통하려는 노력과 그에 대한 대중들의 뜨거운 반응을 욕하는 것은 아니다. 여러번 강조하겠지만 그런 방식은 칭찬받아야 한다. 플라톤의 '대화편'의 주인공 소크라테스도 좋아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방법론은 '대화' 였다. '대화' 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상대방'을 직접적으로 상정하고 이야기 하는 방식이다. 소크라테스의 '대화'는 다른 말로 하면 '소통'이다.전문적인 철학 담론을 논하며 담론의 철옹성 안에서 박는 방식은 이미 소크라테스의 것이 아니었다. 소크라테스의 소통은 '시장'에서 이루어졌다. 물론 소크라테스의 시장과 남대문 시장은 그 성격이 완전히 다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소크라테스의 교육이 결코 '아카데미아'에서만 머물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대개의 모든 그리스인들이 그랬듯이 그들은 이야기하기를 좋아하고, 토론하기를 좋아하며, 소통을 좋아하는 정치적 인간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강좌'에서 깨달음을 얻은 듯한 눈빛을 보며 '인문학의 부활'보다 '인문학'이 위기시대에 과연 어떻게 소비되는가를 생각한다. 이것은 당연히 '인문학'이 궁극적으로 어떻게 소비되는 것이 가장 '인문학적'인가에 대한 질문과 같은 것이다.
대개의 '인문학 강좌'들이 고전을 다룬다. 동양 철학하면 '논어','노자'들을 이야기할 것이고, 서양하면 '소크라테스-플라톤' 부터 시작될 것이다. 이 책 <소크라테스의 변명>은 플라톤의 '대화'편 중 가장 널리 읽히는 책이다. 좀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내가 학력고사가 끝나고 고등학교 겨울 방학때, 이 책을 읽었을때- 완전히 대학생 필독서 목록때문에 봤다. 왠지 고딩이 아닌 성인으로서 대학생이라면 이정도는 하는 생각에- 나는 이 책이 '소크라테스'가 쓴 줄 알았다.(요즘은 중학생들도 이 책을 읽으니 나보다 훨씬 앞서가는 녀석들이다.영어도 잘하고...무서운 놈들!!)
소크라테스가 철학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왠만한 '철학 입문서'를 읽어본 사람들은 다 알것이다. 후대 사람이긴 하지만 역으로 인용하자면 철학사에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들에게서 일어났다. (니체는 이런 전환이 '이론적 인간'의 출현이라는 점에서 뜨악하게 바라본다.) 철학의 중심을 '자연'에서 '인간'으로 옮겨온 것이다. 물론 소크라테스의 인간은 '신의 섭리 하에 있는 인간'이다. 우리는 '시녀가 된 철학'의 시대를 지나 데카르트 쯤 와야지 '생각함으로 인해 존재하는 인간'을 만난다. 소크라테스라면 과연 가장 '인문학적'인-나는 여기서 이것을 거의 철학과 같은 개념으로 쓰고 있다만- '인문학의 용도'는 무엇이라고 생각했을 까? CEO들에게 자신과 후배들이 남긴 몇 마디 명언들을 기억시켜 주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돈벌이로 복잡해진 머리를-비단CEO뿐만이 아니라- 잠시 세척하는 시간을 주는 것으로 사용되길 원했을까? 명언이 필요하면 포털 사이트 검색을 해보면 될 터이고, 고급스럽게 머리를 세척하려면 유명한 미용실에 가서 누우면 될 터인데...그럼에도 사람들은 '인문학' 강좌를 듣고, 감동하고,그리고 한 일주일 쯤 지나면 '강좌'에 갔었다는 사실만 기억하고 나머지는 잊어버린다.
소크라테스의 말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변명>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먼저 당신 자신을 돌보시오. 당신이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하기보다는 덕과 지혜를 추구하시오, 국가의 이익을 돌보기보다는 국가 자체를 돌보시오. 이것이 당신이 어떤 행동을 할 때 준수해야할 순서요."
'당신 자신을 돌보시오' 라는 말은 소크라테스의 명언으로 알려진 신전에 새겨진 신탁, '너 자신을 알라.'의 다른 버전이다. '자신을 돌보라'는 것은 무엇인가? 내 몸이 건강하고 쾌락을 유지하라는 것만을 뜻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너, 인간이라는 존재가 무언지 생각하라'는 말이다. 소크라테스는 '무지'로 자신만의 해답을 찾았다. 그리고 그는 이제 '상대와 스스로에게 질문하는자' 로 남는다. 그리고 '단순히 사는 삶'이 아니라 '잘 사는 삶'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에게 잘사는 삶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진리'와 하나 되는 삶, 정의를 실천하는 용기 있는 삶, 중용과 절제의 삶이다. BMW 7시리지를 타고 강좌를 빠져나가며 소크라테스의 감흥에 고개를 끄덕여봐야 자신의 삶의 방향을 바꾸지 못한다면 '단순히 사는 삶'일 뿐이다. 그리고 거기에 대개는 자본의 구조가 은폐해주는 사적 이익들이 숨어있다. 대신 '삶'의 방향을 바꿀 어떤 계기라도 얻게 된다면 비싼 돈 주고 수업들은 보람이 있을 것이다.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게 '돈'이었다면 그걸 써서 얻었다고 뭐라하지는 않는게 좋을 듯 싶다.
물론 오늘 날의 시각으로 보자면 소크라테스-플라톤의 철학이 성에 꽉 찰리는 만무하다. 그들의 자연철학은 요즘 시각에서는 실소를 머금게 한다. 하지만 그들이 철저히 이성의 추론으로 거기에 도달했다는 점에서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그 추론의 결과들이 때로는 신화적인 보편성을 얻을 수도 있어 보인다. 영화 같은데는 여전히 그런 장치들이 제법 잘 활용된다. 또한 신화적 틀에 잡혀 있는 인간관이나 영혼관같은 것들도 마찬가지다.(예전에 소비에트에서 나왔던 철학입문서 같은데서는 그들이 유물론을 배격했다는 이유로 귀족철학의 대변자,유심론자라는 식으로 매도당했다. 그런 세속적인 해석방식은 당시부터 지겨웠다.) 거기에 소크라테스의 신적인 절대성에 대한 합일 같은 개념들은 '신이 사리진 시대'의 눈으로 보면 70년대 헤어스타일을 보는 듯 하다. 그가 상정하고 있는 '절대적 선'이나 '절대적 덕'의 개념들은 신이라는 논리적 소실점이 있다면 가능하지만, '신'을 괄호 치고 나면 과연 그 '선'과 '덕'을 규정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남길 수 밖에 없다. 하기야 이런 주제들은 철학사의 근본적인 숙제들이니까 소크라테스씨에게 모두 물어볼 필요는 없다.
내가 생각할 때 고전의 가르침은 사실 '깨달음'의 즐거움보다는 '뱀의 독'처럼 쓰다는데 있어보인다. <향연>에서 알키비아데스가 반어를 섞어가며 소크라테스를 칭송하는 대목에 나오는 말이있다.
... 뱀에 물린 고통을 맛본 사람은 뱀에 물려 본 일이 있는 사람 이외에는 그 고통이 어떠한 것인지를 말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그런데 나는 독사의 이빨보다도 더 심한 고통을 주는 어떤 것에 물렸습니다. 그것도 제일 아픈 곳을 말입니다. 즉 심장을, 아니 영혼을 물렸어요. 그것을 무엇이라 부르든 상관없습니다. 나를 문 것은 바로 철학이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과도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알키비아데스의 말을 어떻게 해석하든지는 사람에 따라 다를 것이다. 나는 철학의 즐거움이 또한 고통을 동반한다는 말에는 동의한다. '독사의 이빨'이 '자신'을 물어뜯는 치열함이 없다면-그것은 끝없는 자기 성찰,각성, 수련.그리고 실천을 동반한다- 그것은 '철학'이 아니다. 우리가 심장이 없는 사람을 허수아비라고 부르듯이, 철학의 심장을 얻으려는 '분투'(쓰고 보니 이 말이 얼마나 힘든 말인가?)가 없는 '인문학'은 허수아비에게 악세서리를 하나 더 달아준 것에 지나지 않는다. 프라다 가방을 매고, 아가타 귀고리를 하고 있어도 허수아비는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고전을 읽을 수록 구양수가 말란 '다상량' 의 중요성을 절감한다.
多聞 多讀 多想量(다문 다독 다상량)
다독은 다상량에 비해 얼마나 쉬운 일인가? 요즘 내겐 진짜 명상이 필요하다.
생각의 꼬리를 놓치지 않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