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왕을 모셨지
보흐밀 흐라발 지음, 김경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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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에 반짝이는 몽돌같은 소설이다.  

동글 동글한 자갈돌들이 서로 부딪히며 까르륵 거리듯 책장을 넘길 때 마다 손 끝에 웃음이 묻는다. 그런데 넘긴 손 끝에는 늘상 조그마한 그을음이 따라 붙는다. 까만색 그을음. 그렇다. <영국왕을 모셨지>는 몽돌처럼 '까맣게' 빛난다.  '블랙 코미디'라고 하던가. 그러나 차가운 금속성의 검은색은 아니다.  비로드의 검은 색이다.  판소리에서 좋은 광대는 사람을 웃기다가 울리다가 쥐락 펴락한다. 좋은 블랙 코미디 작가도 이와 같다. 쥐고 흔드는 면에서는 그 역시 광대이다. 그들의 일광설을 따라 들락 말락 하다보면 해는 어느 새 뉘엿 뉘엿 산너머로 떨어지는 법이다. 보후밀 흐라발 역시 좋은 작가답게 그렇게 시간가는 줄도 모르게 독자를 '쥐고 흔든다'. 웃음의 스타카토와 한숨의 리타르탄도로 말이다.    

 주인공 디테는 꼬마라는 뜻이다. 견습 웨이터다.  
"명심해라! 넌 아무것도 보지 않았고 아무것도 듣지 않았다 ! 하지만 또 명심해라. 넌 모든 걸 봐야하며 모든 걸 들어야 한다!"  
 마치 구중궁궐 내명부에 들어간 신출내기 궁녀에게 상궁마님이 건네는 말 같다. 초보 웨이터 디테의 처지 역시 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 차이가 있다면 전자는 전제 권력을 중심으로 탐욕과 음모가 넘실대는 궁중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후자는 돈을 중심으로 모여드는 권력과 부의 이면을 배경으로 한다는 점이다. 시골출신의 웨이터 보조 디테는 부자들의 삶을 보며 세상을 움직이는 중심에 '돈'이 있다는 것을 깨우치게 된다. 그에게 삶의 목표가 생긴 것이다. 디테가 바라보는 부자들은 좀 오묘한 인물들이다. 멋진 옷을 입고 멋진 여인들과 함께 멋진 요리를 먹지만 무료한 삶의 무언가를 채우기 위해 부질없는 재미나 싸움, 토론을 즐긴다. 그 모든 것이 '부자들의 취향'일 뿐이다. 디테는 티호타 호텔, 파리 호텔 등 조금씩 성격이 다른 호텔을 거쳐 가며 그들을 겪는다. 거리의 여인들을 사서 관음의 쾌락만 즐기는 금융인들, 근엄함을 잊어버리고 아이로 돌아가버리는 장군, 대통령 등등. 디테를 그들을 관찰하고 그 이야기만을 그대로 전할 뿐 다른 어떤 도덕적 판단을 하지는 않는다. 그에게 비춰지는 인물들은 그냥 한편의 오페라부파의 주인공들처럼 소동을 벌이고 또 언제그랬냐는 듯 돈을 지불하고 사라지는 사람들이다. 디테가 그리는 인물들 면면은 그 모두 줄이 달린 목각인형들 처럼 희화되어 있다.  

 디테는 '영국왕을 모셨던' 지배인 스크르지바네크의 지도 아래 제법 한 사람 몫을 해내는 웨이터로 성장한다. 그리고 '아비시니아 황제'를 모신 웨이터가 되기에 이른다. '영국왕'을 모셨던지 '이비니시아황제'를 모셨던지 그닥 대단한 일은 아니다. 그들 사이에서는 일종의 자기 프라이드로 언급되는 일이지만 그건 오랜 경험의 축적에 대한 은유일 뿐이다. 디테의 경우도 실제 '아비시니아 황제'를 모신 경험적인 사건과 그가 '아비니시아 황제'를 모신 일의 경험적 가치,또는 의미론적인 가치에는 시차가 발생한다. 그런 면에서 디테는 더 많은 '아비니시아들'을 모시고 나서야 비로소 '황제를 모신 웨이터'로서의 '초라한 위용'이라는 역설적 위치에 다다르게 된다. 그건 오랜 풍파를 겪어온 사람이 가진 삶의 혜안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호텔 웨이터로서 세상의 부조리함과 부와 권력의 뒷모습들 바라봐오던 디테의 삶에도 이제 역사적 사건의 끼여들기 시작한다. 2차 세계대전의 암운이 체코에도 "드리운 것이다. 그 동안의 희비극은 소동극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작가는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을 통과해야하는 힘없는 디테를 가학적인 상태로 던져놓는다. 디테는 우연히 민족주의적 체코 청년들에게 곤경을 겪는 리자라는 열성 나치당원을 돕다가 사랑에 빠진다. 그는 이제 친독 부역자가 된 셈이다. 작가는 이제 허구와 역사가 중첩되는 그로테스크한 희비극의 연출에 골몰하게 된다. 독일 신부 리자를 임신 시키기 위한 당국과의 합법적 교섭이 시작된다. 

"젊은 간호사 손이 어찌나 능숙한지 그녀는 몇 분 뒤에 정액 두 방울을 종이에 묻혀 들고 나갔다. 삼심분 뒤 내 정액은 아리안 여자의 질에 적합하며 수태를 시킬 수 있는 우수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 결과 독일 명예-혈통 보호청이 내가 독일 혈통의 아리안 여자와 결혼하는 것을 반대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했다며 도장을 힘있게 찍어 결혼허가서를 건네주었다. 반면에 체코 애국자들은 같은 도장을 그렇게 꾹 눌러 사형에 처해졌다" 

 후에 디테가 공산 체코정부로 기소당한 주된 이유는 '독일 신부의 임신'과 관련이 있다. 디테 역시 자신의 죄가 직접적으로 나치에 부역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역사적 상황을 이용하거나 외면한 죄였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신문기사는 여기 이 사람들과 또 다른 네명을 판결에 따라 총살한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었다. 매일 죄 없는 새로운 많은 사람들이.... 그런데 나는 여기서 한 손에 성기를 잡고 다른 손으로 책상에 놓인 포르노 사진을 넘기고 있었다." 

 굳이 이런 인용을 한 것은 디테가 겪게 되는 불운을 이야기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이 책에는 처음부터 성적인 것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그런데 애로틱하다기 보다는 귀엽거나 혹은 위의 예처럼 아이러니하다. 

 누구나 다 알고 있듯이 독일은 패망한다. 그러면 리자와 디테는 이제 어떻게 될까? 그리고 그 사이에 유전적으로 우수하며 과학적으로 개량된 혈통의 아이는 어떻게 될까?  하여간 내게 이 희비극의 결말 부문이 주는 청각적 자극과 그로 인한 상상력은 나중에도 이 책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진격해 오는 탱크 소리 '쿵쿵쿵'과 끊임 없이 못 박는 소리 '쿵쿵쿵' 이라니... 솔직히 나는 그 청각적 효과가 너무도 강해서 이 책을 덮고 난 이후에도 책이 '쿵쿵쿵'거리는 것 같았다. 작가도 디테도 못질 이후에 대해서는 언급을 과감하게 삭제해 버렸기 때문에...그 침묵의 효과가 청각적 이미지를 더 긴 잔향으로 남긴다. 이정도 까지만...  

 물론 이 책에서 좀 어색한 부분도 있다. 인물 개인의 심경변화에 중요한 사건이 되는 부자들의 수용소 '비둘기' 장면-일종의 존재론적인 발견-이나 벌목하는 곳에서 만난 불문과 교수와의 만남-일종의 인문학적 발견- 같은 것들은 극적 전환 대목이 된다. 그런 두 번의 계기 후에 변하게 된 디테의 모습은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무언가 좀 급작스러운 것 같다. 또는 인생을 깨달은 자들이 닿게 되는 예의 '수도승'과도 같은 삶이 통상적인 느낌을 주기도 한다. 배경 마저 눈 덮인 인적 없는  산골이 되다 보니 더욱 그렇다. 호사스로운 호텔리어의 삶과 눈 덮인 수도자의 삶이 극적 대비를 이루게 되어 효과적이기는 하다만 말이다.  

 소설은 희극과 비극을 종횡무진하지만 작가는 결말부분에서 눈덮인 겨울 산속에 인동초를 하나 피운다. 설원을 뚫고 온 마을사람들말이다. 그들은 와서 별 일을 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그 장면이 없었다면 책장은 분명 쓸쓸히 덮여 졌을 것이다. 사람을 '겪어야','영접해야만' 만 했던 늙은 디테에게, '아비니시아황제'를 모셨던 바로 그 디테에게, 사람이 '찾아오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흰 눈 처럼 쓸쓸하지만 그렇게 해피앤딩인 셈이다. 

 그런데 혹시 사람들 떠난 바닷가에서 한가롭게 햇빛쬐는 몽돌들, 그 포옹 사이로 바닷물 빠지는 소리 들어 보셨나요? 이 소설에서는 그런 소리가 납니다. ^ ^ ;  

p.s) 제목에 나오는 '프레드릭'이 누구냐구요?  햇빛을 모으는 프레드릭이에요. 엄마들은 많이 아실껄요.그건 제가 제일 좋아하는 동화책 주인공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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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씨 451 환상문학전집 12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박상준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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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씨 451>의 세계는 평화롭다. '평화롭다'는 것이 핵심이다.모두 행복하다. 이게 핵심이다. 이 둘은 동서양과 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이 가장 원하는 미래상이 아니던가. 여덞가지 어려움(불교에서 말하는 '팔고')의 세상 속에 고립무원으로 던져진 인간에게 '평화와 행복'만큼 간절한 것이 어디있겠는가? 그래서 <화씨 451>의 세상은 표면적으로 평화롭고 또 행복하다.  

그런데 

이 사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거기에 있다. 

"이 좋은 평화와 행복은 어디서 만들어지는가?" 라는 질문이 봉쇄되고 억압되는 한에서만 만들어지는 위선적인 평화와 행복이기 때문이다. 배부른 돼지는 용납되지만 배고픈 소크라테스는 권력에 의해 차단당한다. 의문을 갖는 행위, 다르게 생각하는 행위, 즉 철학하는 행위 자체를 아예 막는데 디스토피아적 세계의 묘미가 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질문하지 않는다.' 

방화수 몬태그에게 이웃집 사는 소녀 클라리세가 이런 말을 한다. 

"제가 질문을 하면 그냥 생각 없이 금방 대답을 하시고, 대답을 생각해 보려고 걸음을 멈추거나 하시진 않았거든요." 그리고 뭔가 어리벙벙해하는 그에게 사울이 바울되는(여기엔 이견이 있다.원래 두 이름을 동시에 썻다는) '사건' 이라 할 만한 질문을 던진다.  

 "아저씬  행복하세요?"  몬태그는 비로소 존재와 세계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원자화된 개인에서 타자에 대해,관계에 대해 비로소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는 <화씨 451>이 시작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회의의 거미줄 속에 있는 걸린 사람이된다. 방화-기계로서의 몬태그는 책 전체에서 보자면 그다지 길게 나오지 않는다. 그에게 존재에 대한 의심은 클라리세를 만나기 1년전 공원에서 만난 파버 노인과의 조우에서부터 내재해있었다. 클라리세를 만난 후 1년전 기억이 환기된 것은 그 안에 이미 회의의 씨앗이 자라고 있었다는 증거이며 소설의 흐름상  '방화-기계' 몬태그에 대해 그다지 길게 할애할 필요가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몬태그는 방화서에 배치된 로봇개(수배자 정보를 맹목적으로 쫓도록 만들어진 기계동물)에게 불편함을 느끼며 그 도구를 통해 '도구화된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유비한다. 

"우리들이 저놈(로봇개)에게 기억시켜 놓은 거라곤 그저 쫓고 사냥하고 죽이는 일뿐이지요. 저놈이 아는 게 그것뿐이라면 우리가 부끄러워 할 일입니다."  

 몬태그의 '흔들림'은 그래서 중요하다.이것은 일종의 '본원적 경험',즉 존재 자체를 근본적으로 흔드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몬태그를 직접적으로 변화시킨 일은 클라리세의 실종과 분서 과정에서 책과 함께 분신한 어느 노파와 관련된 사건이다. 이런 체험은 몬태그를 더 이상 주입된 세계에 머물 수 없게 만든다.  한나 아렌트식으로 이야기하자면 '무세계성'이 '사건'을 통해 '세계에 대한 자각'으로 변모한 것이다. 

 몬태그가 로봇개와의 유비를 통해 예시했듯이 <화씨451>의 세계는 '억압가설'에 토대를 두고 있다. 권력 집단 내지는 권력의 중심 같은 것은 소설 끝까지 드러나지 않는다. 푸코의 말처럼 권력은 그저 힘으로 관계속에 작용하고 있으며 어느 곳에나 임재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그런 권력의 말단 대리인은 소설 속 갈등의 구현을 위해 존재한다. 많은 것을 알고 있음직한 방화서장 비티이다. 그런데 비티라는 캐릭터는 상당히 많은 부분이 신비에 쌓여 있다. 내러티브적이라기 보다는 시적이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영화적이라기 보다는 연극적 인물로 더 적합하다. 비티와 몬태그의 대화 장면들은 마치 헤롤드 핀터의 희곡 속 상황같다. 그가 각색한 영화<추적>속의 마이클 케인과 주드로의 대화장면 같기도하다. 소설 속에서는 노련하며 냉소적인 비티가 늘 이긴다.  

 '물처럼 존재하는' 권력의 집행기구를 찾긴 힘들어도 소설 속에서 드러나는 억압 구조를 찾긴 그다지 어렵지 않다. 레이 브래드버리가 직조한 소설 속 세상은 가시적인 두 개의 억압 장치 안에서 작동한다. 이 뒤에 권력 기구가 숨어있다. 먼저 하나는 거대 외연을 싸고 있는 '전쟁의 공포'이다.('전쟁'은 디스토피아 세계의 감초다.) 푸코식으로 말하자면 '전쟁의 정치화' ,즉 전쟁이 늘 낮은 구름 위에서 일상을 장악하고 있는 곳이 <화씨451>의 세계이다. 폭격기가 수시로 굉음을 내며 하늘을 가르는 데도 도시 속 사람들은 무감각할 만큼 나른하다. 또다른 장치때문이다. 마치 아도르노의 문화산업론을 구현한 듯한 것이 브래드버리가 예견한 미래상이다. 입체 벽멱 TV와 난무하는 정보 속에서 사람들은 감각적인 쾌락 안에서만 살아갈 뿐이다. 인민의 아편 TV가 되시는 것이다.(브래드버리는 후기에 실린 인터뷰에서도 영화<물랭루즈>와 TV CF를 예로 들며 0.5초의 짧은 컷트의 자기장 속에 빨려 들어가는 수동적 대중들의 비존재성을 지적하고 있다. ) 몬태그의 부인인 밀드레드는 전형적인 TV피플로 등장한다. 그녀에게 세계는 TV와의 매개없이는 불가능하다. 현대문명에 비판적인 영화감독들이 좋아하는 60년대 도시 외곽의 중산층 부인처럼 무미건조한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 그녀다. 그러면서도 행복해하고 이어질 드라마의 귀추에 생의 행복을 투사하는 존재다. 하지만 그녀는 그다지 행복하지 않다. TV와 수면제를 빼놓고 그녀는 아무런 관계적 만족감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브래드버리는 소설 초반부터 수면제라는 소품을 통해 그녀가 누리고 있다는 만족감이 사실은 왜곡된 형태임을 보여준다.(진정 행복한 사람은 수면제를 먹지 않는다.!!)   

 <화씨 451>에서 브래드베리가 보여주는 미래 세계에 대한 상상력은 사실 50년전의 것이다 보니 올드패션하다. 또한 구성이나 인물들의 관계에서도 무언가 성긴 구멍들이 있다.사실 SF소설을 많이 본 것은 아니지만 스토리의 급진적 진행에 비해 얼개가 성긴 경우가 종종 있어보인다. 예를 들어 악역으로 등장하는 비티 서장의 경우 해박한 그의 이야기로 또 하나의 작품을 만들 수 있을 만한 캐릭터이다. 그런데 이 소설에는 그에 대한 전후 설명이 부족하다.( 연극 대본 작업에서 작가 역시 이부분을 다시 첨가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올드패션한 설정도 살펴보자. 작가의 상상력 역시 그 시대의 범주 안에서 움직인다는 것을 어느 정도는 인정해야만 한다. 핵전쟁이 등장하고 불로 책을 소각하고, 헬기가 수색하고 하는 장면들은 완벽한 미래상이라기 보다는 가까운 실현가능성이 있는 사실성에 바탕을 둔 상상적인 글쓰기이다. 66년 프랑소와 트뤼포가 만든 영화처럼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오래된 미래'같은 미래상이다. 스티븐 다라폰트감독이 <화씨 451>을 영화화한다고 하는데 각색 과정에서 미래세계를 그린다면 이와는 분명히 다를 것이다. 아마 하늘로 자동차가 날아다니고 소각 대상인 책은 종이 책에만 국한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이 소설의 가치를 떨어뜨리지는 않는다. 브래드버리의 <화씨 451>은  미래 세계를 그리고 있지만 사실은  우화적으로 현실을 그리고 있는 SF 소설의 거대한 지류와 합류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화씨451>에서 중요한 주제는 통제되는 미래상이라기 보다는 인류 역사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그런 전체주의적 질서와 통제 권력의 억압, 그리고 그에 따라 왜곡되는 인간성과 사회상의 측면이기 때문이다. 

물론 미래상에 대해서도 사실적인 의미에서 재미있는 요소들이 있다. 여러가지가 있지만 미디어에 대한 것을 좀 보자. 브래드베리는 '책의 소각'이 단지 물질적 소각만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즉 현재의 우리도 몬태그처럼 책을 물리적으로 태우고 있지는 않지만 '분서'행위를 하는 문화 속에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세익스피어의 <햄릿>을 한 장으로 요약 정리할 수 태도 , 그리고 그것을 바쁜 세상에, 알아야 할 것 많은 세상에 합리적이라고 믿는 태도,이 역시 '분서'와 같은 것이다.결국 책의 그 내밀함과 접촉하여 소통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브래드버리가 당대의 다이제스트식 출판문화를 꼬집고 싶었던 듯 하다. 이는 악역으로 나오는 비티 서장의 입을 통해 역설적으로 표현된다. 

" '햄릿에 대한 모든 정보를 제공해 드립니다.' 해서 보면 기껏해야 한 페이지 정도 설명해 놓은 게 다가 되었지. 그러면서 광고엔 이렇게 나오고, 이제 당신은 모든 고전들을 완전히 통달할 수 있습니다. 읽으십시오!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이 되십시오. 알겠나? 보육원을 나와서 대학을 들어갔다가는 다시 보육원으로 돌아가는 거네. 지난 5세기가 넘는 기간 동안 사람들의 지적인 문화형태라는 건 그런 식어었네"   

반대로 TV는의 향응이다. 통제권력의 이데올로기적 장치구실을 하고 있다. 소설에서 보여지는 TV 프로그램은 크게 쌍방향 소통형 프로그램과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다. (조지 오웰의 <1984> 버전 텔레비젼보다 진일보한 형태라고 할까?) 하나는 린디와 이웃 집 여인들을 꼼짝달싹 못하게 만드는 프로그램인데, 대략 추측컨데 시청자의 피드백이 반영되는 드라마 같은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런 상상은 50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도 브래드버리의 상상력만큼 구현되지는 않았지만 그런 TV 실험들과 징후들은 한 두가지씨 보이곤 한다. 리얼리티 쇼는 몬태그의 추격씬을 생중계하는 방식으로 구현된다. 마치 영화<트로먼쇼>의 야생버전처럼 어떤 에피소드 하나 정도를 생중계하는 방식은 요즘 기술로도 가능하다. 한때 미국에서 바람난 남편부인잡는 프로그램이 인기가 있었던 적이 있다. 

브래드베리는 전쟁을 통한 디스토피아의 전체적인 붕괴를 새로운 희망의 전제조건으로 그린다. 지배집단에 대한 대중적 저항의 가능성 자체가 미비한 상황 속에서 전면적 파괴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어보인다. 마치 나치 독일의 철저한 패망 이후 재건이 가능했던 것 처럼 말이다. 이것 역시 브래드버리가 가진 한계의 한 측면이 될 것이다. 브래드버리가 새로운 미래의 맹아로 그린 '북피플들'은 제 때에 저항하지 못한 지식인들이 주류다. 그들에게는 후회와 미래에 대한 가능성만이 잔존할 뿐인다. 그런면에서 그들은 '분서'의 공모자는 아니어도 협조자들인 셈이다. 지식인 파버의 자탄에서도 드러나듯이 '시대의 후퇴'를 방관했던 업은 결국 그들에게도 돌아왔다. 브래드버리의 혜안 중에 뛰어난 점은 권력과 이 들이 서로를 간섭하지 않으며 병존하려 했다는 점에 있다. 권력의 입장에서는 완전한 발본색원 자체는 애초 불가능하기 때문에 파편화된 개인으로 존치시키는 편이 나았고 실기한 지식인 그룹들은 양팔을 잃은 장수처럼 소수의 유목민이 되어 세대 유전을 통한 지식의 전수만을 먼 미래를 위해 남겨둘 수 밖에 없는 수동적 존재로 남게 되었다. (어떤 중핵만 건드리지 않는 다면 무엇과도 공존할 수 있는...') 지식인 파버와 방화수 몬태그의 저항을 위한 대화는 통속적이긴 하지만 '지식인-대중'의 상호관계에 대한 브래드버리식의 비유다. 몬태그식의 '이성없는' 급진적 행동주의가 갖는 위험과 '행동없는' 관조적 이성주의가 갖는 문제를 거의 대놓고 보여준다. 물론 브래드버리식의 상호작용을 통한 변증법적 타협의 길도 슬쩍 흘린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대놓고... 그렇다고 사회주의 소설처럼 구호조로 꺼내지는 않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미국적 세련됨이라고 해야하나..

<화씨451>은 '분서'에 대한 이야기지만 사실 '분서될 수 없는' 책의 위대함에 대한 예찬이다. 우리에게 도서관만 있다면 다시 인류 문명을 세울 수 있다는 말처럼 인류의 위대한 지적 전통에 대한 브래드버리의 숨은 애정이 배어있다. 물론 인류는 도서관에 다 적혀있어도 같은 실수를 여러차레 반복할테지만 말이다. 다시 영화화가 곧 된다고 하니 수 년 안에 스크린으로 만나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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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뒷세이아 - 그리스어 원전 번역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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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이타카를 마음에 두라/네 목표는 그곳에 이르는 것이니/그러나 서두르지는 마라/ 비록 네 갈 길이 오래더라도/ 늙어져서 그 섬에 이르는 것이 더 나으니/ 길 위에서 너는 이미 풍요로워졌으니 이타가가 너를 풍요롭게 해 주길 기대하지 마라. .... 콘스탄티노 카바피의 시<이타카>중

카바피의 시는 <오뒷세이아>를 이야기하고 있으며 또 인생을 이야기하고 있다. 언젠가 이 시를 보고 <오뒷세이아>라는 텍스트의 안팎이 이야기하는 것을 이처럼 잘 함축한 시도 드물것이라고 생각했다. 트로이를 떠난 오뒷세우스가 이타케까지 돌아오는 데 20년이 걸렸다. 그리고 그 시간은 내가 <오뒷세이아>를 다시 발견한 시간과도 거의 비슷하다. 이젠 말하기도 쑥스러운 나의 10대 시절에 이 책은 '기이한 모험집'이었다. 그러나 먼 바다를 돌다가  나이 40 줄에 이르러 보니, 지난 시절 상상력을 붇돋우던 독성 강한 기담은 예전만큼 강한 자극을 주지는 않는다. 그 대신 남루해진 오뒷세우스에게서, 또는 신과 같은 오뒷세우스에게서 삶의 그림자가 끌고온 향기들을 맡게 된다. 오뒷세우스의 모험담이 흥미롭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그것은 오래 묵힌 밀주처럼 진득하다. 두 번의 <오뒷세이아> 사이에 나는 아들에서 아버지가 되었고,-그것도 두 아이의,- 젊은 시절의 고민들을 채 해결하지도 못하고 또 다른 시간이 만든 짐들만 어깨에 얹고 있다. 지난 시간이 가져다 준 서당개 생활에서 주워들은 풍월들, '길 너머를 그리워하다' 결국 '길 위에서 죽고 말것'이라는 평범한 깨우침 정도를 얻었을까. 

벤야민은 낯선거리에서 풍경의 원근법이 무너짐을 이야기한다. 거리감의 상실은 사물들을 2차원 도상 위로 올려놓기 때문에 쉽사리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낯선 도시에서 몇 개월 살아본 사람은 이런 경험을 이해할 것이다. 동서남북조차 모호하고 매일 가는 길인데도 무엇 하나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한 일주일 쯤 지나고 나면 비로서 사물들이 하나씩 독자적인 소리를 내고 한데 엉겨붙어 있던 사물들이 하나씩 자기 영토를 확인시켜준다. 같은 영화를 두번 이상 보면 이제 줄거리말고, 구성이나 음악,대사, 미장센들을 보게 되고 또 상징적 은유들을 찾아보게 된다. 그래서 사실 요즘은 새로운 책을 읽는 게 아니라 과거에 본 책들을 다시 한 번 더 읽을까 하는 생각도 문득 문득 든다.  

마흔에 읽은 <오뒷세이아>에서 가장 눈에 들어 온 것은 구성이다. 역자 해제에 의하면 <일리아스>,<오뒷세이아>는 '트로이 서사시권'의 8권 중  2번째,7번째 서사시에 해당한다. 하지만 다른 모든 시들을 앞도할 만큼의 분량과 내용이다. 그만큼 중요하며 흥미롭다는 반증이 될 것이다. 특히 이 서사시들은 구비전승 과정을 통해 내용적 풍부성이 확보된 것이 확실하다. 호메로스를 단일인물인지 집단의 총체적 인물이지 두고 논쟁이 있었다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 일것이다. 그 사실이 어떻든 간에 <오뒷세이아>의 구성이 가진 '압축성과 입체성'은 '시대의 연마'를 거쳐서 이룩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 23장에서 호메로스의 우수성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호메로스는 앞에서 말한 것을 되풀이하자면 이점에서 다른 시인들보다 월등히 뛰어났다. 그는 트로이 전쟁이 시작과 결말이 뚜렷이 존재하는 하나의 전체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다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그는 전체에서 한 부분만을 다루었으며 그 밖의 사건들은 그저 에피소드로 쓰고 있다." 

호메로스의 뛰어난 점은 바로 단일한 사건을 중심으로 한 압축성에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오뒷세이아>를 한 문장으로 말할 수 있는가?  생각보다 쉽다. '한 남자의 귀향이야기' 가 그것이다. 신의 미움을 받아 고생 고생하다가 집에 돌아왔으나 다른 남자들이 아내를 탐하고 집안을 거덜내고 있다. 계략을 짜서 이들을 처단한다. <오뒷세이아>가 이 내용이다. 물론 각자의 에피소드들이 기발한 상상력으로 뇌를 자극하고 인간의 운명과 고난에 맞서는 용기로 감동을 자아내고는 있지만 이 중심적인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런 드라마전개의 중심축에 탁월함을 부여하는 것이 구성의 입체성이 아닐까 싶다. 시간의 도치와 압축. 영화용어로 치자면 플래쉬백의 적극적 활용으로 극적인 탄력을 높이는 것이다. 

<오뒷세이아>는 크게 세부분으로 구성되었다고 보면 된다. 하나는 처음부터 4권까지 텔레마코스이야기, 5권부터 13권까지 오뒷세우스의 귀향이야기 그리고 이하 이타케에서의 복수극이다. 4권까지 '텔레마토스 이야기' 에서는 오뒷세우스의 아들이 주인공인데 이를 통해 전후 사정들을 소개하고,또 미래의 갈등을 미리 보여준다.물론 오뒷세우스는 이때 바닷가에 있을테니 이를 전혀 모른다. 5권부터 오뒷세우스가 등장하는데, 시작은 신들의 회의로부터다. 제우스가 칼립소로 부터 오뒷세이아를 풀어주기로 결정하는 과정이 나오는데 오뒷세우스를 방해하는 포세이돈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벌이진다.이 장에서는 모든 이야기가 명백히 3인칭 시점으로 서술되고 있다. 이 시점은 다음 장에서 바뀐다.  6권은 이타케를 앞둔 마지막 도착지인 파이아케스족의 나라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영화편집으로 보자면 텔라마코스의 씬과 거의 교차편집되는 장으로 거의 동시간대 벌어진 일어거나 조금 후에 일어난 장면인 셈이다. 이렇게 현재의 시간들을 교차하는 형태로 붙여놓으며 6권까지 현재 상태의 갈등요소들을 재현한다. 하나는 완성되지 못한 귀향, 그리고 고향에서 벌어지고 있는 난장판. 오뒷세우스만 모르지 독자들은 이미 신탁의 내용을 통해 그가 고생끝에 이타케에 도착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즉 독자들을 극의 파국 직접까지 도입부에서 끌고와서 긴장감을 높여놓는 것이다. 그게 뭐가 대단하냐고? 그렇다. 지금봐선 요즘 TV드라마에서 초보작가나 연출가들도 쓸 수 있는 구성이다. 그런데 이런 구성이 기원전 8세기에 만들어졌다면- 판본에 따라 차이가 있을 것이고 이런 형태로의 완성은 아마 더 후가 아니었을까 싶긴하지만- 이 작가를 우리가 평범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제 호메로스는 오뒷세우스의 귀향을 앞두고 다시 서사시를 거꾸로 돌려서 회고하는 방식으로 향하는 전환점을 만든다.  7권부터 시작되는 오뒷세우스의 고난들이 그 이야기이다.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오뒷세우스는 이타케에 도착한다. 후반부의 복수극이 시작되면서 페렐로페의 구혼자들에게 마지막 한방을 먹이기 위한 잠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후반부 '복수극'에서도 호메로스는 '지연의 효과'도 적극적으로사용한다. 마이클 티어노의 <스토리텔링의 비밀>에서는  알프레드 히치콕의 말을 이렇게 인용한다. 

 "영화 속에서 테이블 밑에 있는 폭탄이 갑자기 터진다면 좋은 영화가 아니다." 즉 갑자기 복수가 시작되고 문제가 해결되어 버리면 독자들이나 관객들은 멍해지는 것이다. 만약 오뒷세우스가 이타케에 도착해서 아이기스를 두른 아테네의 도움으로 일거에 구혼자들을 제거해버렸다면 어떻게 될까? <오뒷세이아>는 분명 반쪽 서사시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복수는 지연되어야 한다.'라는 말이 쉽게 이야될 것이다. 이런 '지연의 효과'를 위해서는 먼저 독자는 음모를 알지만 극중 인물들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어야한다. <오뒷세이아>에서는 텔레마코스와 오뒷세우스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복수의 준비'에 대해 까맣게 모르고 있다.  

구혼자들은 자신이 곧 죽게 될 것이라는 것도 모른 채 걸인으로 변한 오뒷세우스를 모욕하는 장면이 있다. 독자들은 '이런 바보같은 곧 죽게될 운명인데' 라고 연민과 함께 작중인물의 어리석음을 책하게 된다. 이게 무얼 의미하는가? 별거 아니다. 이미 텍스트에 깊이 빠져 버린 독자를 의미한다. 모욕의 정도가 높아질 수록 독자의 복수에 대한 쾌감은 비례한다. 그런데 이런 드라마작법은 인류학적인 공통 유산에서 나온 것 같다. (서사 구조라는 것 이야기다.)   

 우리의 전통 소설<춘향전> 또는 판소리<춘향가>를 떠올려 보자. 이몽룡이 과거 급제를 하고, 짐짓 거지 행세를 한다. 오뒷세우스도 아테네의 도움으로 걸인으로 변신한다. 오뒷세우스가 두 가지 목적으로 -하나는 누설 시 복수의 좌절 우려와 식솔들의 충성 여부 확인- 거짓 행세를 한 것 처럼 이몽룡은 '공무 집행'과 '춘향의 진정성'의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끝까지 자신의 신분을 숨긴다. 또한 오뒷세우스가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화살의 시험을 거치는 것 처럼 이몽룡은 '금준미주 천일혈'로 시작하는 시 한 소절로 마지막 한 방을 예비한다. 이런 복수의 전조 앞에 몇 몇 눈치빠른 이들은 줄행랑을 치며,어떤 이들은 그런 징후조차 부인하고 결국은 '이빨로 흙을 물게 된다'  

결국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오뒷세이아>는 오랜시간 사랑을 받을 수 있을 만한 완성된 구조를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오뒷세이아>의 주인공 오뒷세우스라는 인물에 대하야 이야기를 해보자. 그는 간계와 지혜가 아테네에 버금갈 만큼의 지략가이며 전사이다. <삼국지연의>의 여포나 장비가 아니라 주유 정도 되겠다. 아킬레우스를 트로이 전쟁에 불러들인 것도, 트로이 목마를 고안한 것도 그의 지혜이다.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에서 그의 첫번째 대사는 의미심장하여 눈여겨 볼만한다. 칼립소가 제우스의 명령을 받잡고 오뒷세우스를 풀어주겠다고 했을 때 그가 처음으로 뱉은 말이다. 

"여신이여! 그대는 나를 보내줄 생각이 아니라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게 분명하오."  

이게 무슨 뜻일까?   

 이 말에서 나는 오뒷세우스가 상징하는 알레고리의 가장 중요한 한 대목을 본다. 그것은 '의심'이다. '오뒷세우스는 의심하는 인간'이다. 물론 텍스트의 맥락 상 보면 '신들의 장기판'에서 놀아나던 인간이 신들의 장난질을 못믿는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오뒷세이아>에서 최초로 그가 뱉어낸 이 말은 '의심하는 인간'으로서의 신들의 세계를 의심하는, 그래서 결별하려는 '의심'으로 읽어내면 큰 울림을 갖는다. 

이렇게 <오뒷세이아>를 '탈신화화를 목표로 하는 계몽의 알레고리' 로 읽어낸 이들이 20세기 가장 음울한 책이라는 <계몽의 변증법>의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이다. 그들은 <오뒷세이아>를 '주체가 신화적 힘들로부터 도망쳐 나오는 도정" 이라고 말한다. 

오뒷세우스가 얼마나 주체적으로 영리한 지는 뗏목을 떠다닐 때 그를 불쌍히 여긴 레우코테아의 충고를 그대로 따르지 않고 창조적으로 변용하는데서도 보여진다. 그녀는 뗏목을 버리라고 말하는데 그는 다 듣고 나서 이렇게 말한다. 

"아아 괴롭구나! 그녀가 나더러 뗏목을 떠나라고 명령하니...나는 아직은 그 명령을 따르지 않을 거야. 나의 피난처가 될 것이라고 그녀가 말한 땅은 아직은 멀리서 볼 수밖에 없으니까"  

물론 오뒷세우스는 신들에 의탁한다. 그렇지만 그 자신의 지혜와 재능을 적절히 조합해내는 것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필연적 운명을 수용하고 거기에 이성이라는 능력을 통해 운명의 거센 풍파를 헤쳐나가는 것이다. 운명을 거부하지 않느며 운명에 맞서는 용기가 바로 그리스적 용기라는 것을 보여주는 듯 하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세이렌'과 관련된 우화를 통해 오뒷세우스의 '도구적 이성'과 자본 아래 '소외'되는 자본가와 노동자를 알레고리로 읽고 있는 유명한 글을 남긴다. 그들은 오뒷세우스로부터 '시민적 개인'의 탄생을 소급해서 읽어내는 것이다. 그들에 따르면 오뒷세우스는 생존의 본능을 위해 자연을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반복적 현상으로 인식하고 이를 인간의 이성적 능력으로 지배하려는 근대적 개인의 원형이 되는 것이다. 물론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목적은 이렇게 지배적인 '자기동일성'에 근거한 '근대적 이성'과 '도구적 이성'을 '반성'과 '성찰'을 통해 다시 계몽하려는 의도였다. 그들이 '계몽하지 않는 계몽'에서 무서운 폭력을 바라본것은 그들이 겪었던 나치의 정신을 근대적 이성이 언제라도 불러들일 수 있는 최종적 기점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오뒷세우스의 모험담은 초반부에 나오는 이야기다. 오뒷세우스가 포세이돈의 미움을 받게 되는 중요한 장면이기도 하다. 즉 오뒷세우스의 '하마르티아'(비극적 고통을 만들어내는 과오)인 셈이다. 이런 고통은 엄밀하게 말해서 개인의 잘잘못과는 무심하게 발생하곤 하는데 그리스인들은 그런 존재의 불가해적 운명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여간 어찌 어찌 하여 오뒷세우스의 전함들은 퀴클롭스들이 사는 섬에 도착한다. 그곳에는 거대한 퀴클롭스들이 양을 키우며 살고 있다. 오뒷세우는 외교적 방법을 택하다가 전우들을 잃는다. 우선 오뒷세우스는 크게 '참는다.'. 그리스의 중요한 덕목이라는 '절제' 를 여러번 다짐한다. 고통을 감내하기 위해 눈물을 참던 그마저도 전우를 잃어야한다는 대목에서 눈물을 머금지만 그래도 그는 '참는다'. 그리고 어떤 신의 도움도 받지 않고 기다림 속에서 나온 자기 지혜를 바탕으로 퀴클롭스에게 포도주를 먹인다. 폴리페모스가 묻는다. 

 "너는 자진하여 그것을 한잔 더 주고 네 이름을 말하라.".....오뒷세우스는 "내이름은 '아무도아니'요" 라고 답한다. 

비트겐슈타인의 말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언어는 사고를 위장한다. 의복의 외적 형식으로부터 그 바탕에 놓여 있는 사고의 형식을 추론하는 것은 그만큼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의복의 외적 형식은 몸의 형식을 드러내도록 의도된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목적을 위해서 의도된 것이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논고> 

오뒷세우스의 저 대답은 다른 퀴클롭스들로 하여금 그를 비존재화시켜버리는 위력을 발휘한다. 오뒷세우스의 '아무도아니요' 라는 대답은 단순한 기지라고 하기에는 거의 혁명적이다. 아도르노는 오뒷세우스의 여정이 '이성의 자기동일화'를 위한 과정이라고 했다. 그 안에는 이미 '랑그와 빠롤'의 자기 분리 마저도 포함하는 이성의 포용적 간특함이 들어있다. 삼류독자로서 나는 오뒷세우스의 대답이 중요한 정치적 파괴력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아무도 아니요'를 몇 년 전에 본 영화<브이 포 벤테터>의 마지막 장면과 연계시킬 때 쉽게 그려진다. 모든 이들이 '아무도 아닌' 것이 되는 순간-영화에서는 동일한 브이의 가면을 쓰고 광장에 나타난다-  거대한 퀴클롭스들을 무너뜨릴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상상이다. 오뒷세우스의 여행이 자극하는 상상은 종류도 다양하니 그 정도를 하나 더 추가한다고 고전의 바다가 넘치거나 범람하지는 않을게다. 정치적 해방의 가능성은 지난 시절의 강박적 회귀나 또는 찬란한 반짝임에 대한 자기 상찬에서 나오지는 않을 듯 하다. 그것은 그저 '내가 자청한 고난'이며 아무도 사랑하지 않은 자의 '뼈아픈 후회'일 뿐이다. 그날은 '사건'이라 할 만한 절박이라는 조건 속에서 '아무것도 아닌것' 에서 나올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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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꼽 창비시선 286
문인수 지음 / 창비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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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다. 그렇다. 깃털같은 가벼움이며 진흙뻘 같은 육중함이다.  

 시는 아폴론의 눈길 피한 위대한 패잔병이다. 젊은 신의 눈길을 피한 시는 화살처럼 날카롭고 예리하다. 뜨겁다.성마르다. 그들은 성에 굶주린 전쟁터의 군인들 마냥 가슴에 대고 검붉은 인두를 꺼내든다. 불에 달군 인두다. 아니 아직 채 마르지 않은 이름모를 이의 피가 묻은 칼이다. 상처에 더 깊이 살을 밀어넣는다. 그것은 칼이다.또 살이다. 시는 남은 모든 육체성을 그대로 대상에 전한다. 그 때 우리는 잠시 고개를 들어 허공을 바라볼 수 밖에 없다. 불같은 고통이 빠져나갈 수 있는 시간을 기다릴 수 밖에 없다. '왼쪽 가슴 아래께'  온 깊은 통증은 여전히 쑤신다. 

문인수의 <배꼽>은 그렇다. 나는 작년에 이 시집을 여러번 펼쳐 읽었다. 하지만 리뷰를 쓸 수 있는 날까지 기다리다가 한 해를 훌쩍 넘겼다. 장마철에 읽은 시집을 다음해 장마가 시작되는 날 다시 편다. 아마 리뷰를 쓰지 못한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하나는 시를 읽는 내 능력의 부족함일 것이다. 시인의 꾹꾹 눌러쓴 언어적 제련에 비교될 수 밖에 없는 자괴감때문일 것이다. 하나는 개념어로 펼쳐낼 수 없는 시의 직접성 때문이다. 시나 아포리아를 다시 글로 옮길때 마다 느끼는 내가 느끼는 묘종의 불편함이 있다. 그것은 비재현의 문법을 가진 음악을 글로 옮길때 느끼는 것과 유사하다. 물론 언어의 옷이라도 걸치고 있는 시나 아포리아가 낫긴 하다만. 이런 것들에 리뷰를 쓴다거나, 언어의 힘을 빌어 정리를 하고 나면 정들었던 물건들을 재활용센터에 보낼때 느끼는 만족감과 허탈함 같은 것들이 동시에 떠오른다. '탁탁탁 정리 끝. ok. 다음' 

문인수의 <배꼽>은 정말 여러번 곱씹어 읽어도 아깝지 않을 시집이다. 볼 때 마다 허공 한 구석을 보게 만든다. 읽을 때 마다 새어나오지 못하는 가라진 음성을 들어야 한다.  

 뇌성마비 중증 지체.언어쟁애인 마흔 두살 라정식씨가 죽었다./자원봉사자 비장애인 그녀가 병원 영안실로 달려갔다.조문객이라곤 휠체어를 타고 온 망자의 남녀친구들 여남은 명뿐이다....(중략) 

떠먹여주는 사람 없으니 밥알이며 반찬, 국물이며 건더기가 온데 흩어지고 쏟아져 아수라장 난장판이다./ 그녀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이정은 씨가 그녀를 보고 한껏 반기며 물었다. 

#@$&*&.......? (선생님 저 욱을 때도 아주실 거죠?)/ 그녀는 더이상 참지 못하고 왈칵,울음보를 떠트렸다. $^&##@#%^%^&&(정식이 오빤 좋겠다. 죽어서-)   <이것이 날개다> p84-85

시인에게는 '잃어버린 세계'와 '폐허가 된 현재' 를 쇠사슬처럼 연결하고 있는 증표가 바로 '배꼽'이다. 배꼽이 없는 사람이 없듯이 우리 모두는 '얼룩말 가죽'같은 법원 앞 횡단보도를 아랑곳없이 건너는 '생사의 숱한 기로를 이제 흐릿하게 지우기도 하는' 모성의 세계가 있었다.  

저 할머니 이제/ 법이란 법 다 졸업한 '무법자'일까,신호등/빨간 불빛 따위 아랑곳없이/무인지경의 횡단보도에들어선다.까마득한/.....시꺼먼 길바닥이/문득 흰 젓 먹은 듯 고요하다. 풍금처럼 흐르는 모법이 있다.    <얼룩말 가죽> 중에서 p22-23  

모성의 세계, 우리가 잃어버린 세계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을 그의 어머니를 형상화한 <뻐꾸기 소리>,<조묵단전>등에 반복되어 나타난다. 개인적으로 몇 해전 돌아가진 할머니의 작은 은비녀를 기억하는 나는 아흔 일곱에 미장원에 가서 파머를 한 작가의 어머니와 그리고 한 세기를 짊어져온 잘라진 머리 칼 속의 비녀를 '탈골'이라고 더듬는 대목에서 정말 '헉'이란 소리가 나왔다...시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다.  

... 단단한 비녀! 아 (  )탈골이다. <조묵단전> 비녀뼈 p99 

 작가는 두고 온 세계에 대한 일종의 우수같은 것이 있다. 그리고 그가 고개를 돌려 눈길을 보내는 곳에는 '웅크리고 있는','흉가'가 된 세상이 있다.  

삼켜버리고 싶은 과거는 맛이 없다.대개/거칠고 쓴데,저기/들어가 웅크리는 슬픔은 또/누구인지.언제/ 둥근 종소리 날까,/ 그렇게 깊이 날고 전소되겠다/  <흉가> p30 

마을 뒤, 산 밑에 오래 버려진 송산서원에서/ 나는 폐허에게 묻는다.이쯤에서 그만/풀썩 무너지고 싶을까./ 이것저것 깨묻는다.  <송산서원에게 묻다> p102 

작가에게 두 세계가 같은 고향을 같고 있다는 것을 상징하는 단어가 '배꼽'이다. 어머니와 아들이 '배꼽'을 통해 연결되는 것이다. 땅에 사는 인간이라면 누구다 다 가지고 있는 '배꼽'. 사실 아이의 비릿한 탯줄을 자르기 전까지 나는 단 한번도 '배꼽'의 효용과 그 위대한 상징적 징표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았다. 내가 스무번은 넘게 읽었을 '배꼽'과 관련된 아이의 동화책에는 그 상징적 징표에 대해 아주 명료하게 정의한다. 대충 기억에 의존해서 말해보자면'배꼽'은 '우리가 알에서 태어나거나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의 표시'이며 '엄마와 아빠의 사랑의 증표'라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배꼽'을 만들거나, '배꼽'을 자르는 역할을 할 수는 있지만 연결의 시간을 후대와 갖지 못한 것은 모든 남성의 영원한 빈틈이다. (나는 나의 어머니와만 배꼽으로 연결될 뿐 나의 아들이나 딸과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위대한 여성이여!) 

외곽지 야산 버려진 집에/ 한 사내가 들어와 매일 출퇴근한다/전에 없던 길 한가닥이 무슨 탯줄처럼/꿈틀꿈틀 길게 뽑혀나온다// 그 어떤 절망에도 배꼽이 있구나/ 그 어떤 희망에도 말 걸지 않은 세월이 부지기수다/...... 사내는 아직 웅크린 한 채의 폐가다. <배꼽>p 47 

이제 어떤 해소가 남아 있는가? 세계는 그렇게 사랑으로부터 이미 멀길을 떠나왔고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저 폐허의 집뿐이다. 이것은 열혈 청년의 비판의 도마 위에 올라야 하는 허무주의인가 비관주의인가? 차라리 철지난 낭만주의와 저속한 낙관주의가 더 가식과 자기 기만,자기 협잡 은 아닐까? 작가는 '송산서원'처럼 '대답하지 않는다.'  

차들이 검은 비닐봉지 하나를 연신 치고/달아난다/ 비닐봉지는 힘없이 떳다 가라앉다 하면서/찢어질 듯 커다란 아가리를 벌리지만 도통/소리가 없다. 연속으로 들이닥치는 무서운 속력 앞에/뒤에,두둥실/ 왠 허공이 저리 너그러운지.   <비닐봉지>p26   

오랜 세월 그리 심하게/몸을 비틀고 구기고 흔들어 이제 비로소 빠져나왔다, 다/왔다, 싶은 모양이다.이 고요한 얼굴/ 일그러뜨리며 발버둥치며 가까스로 지금 막 펼친 안심/창공이다. <이것이 날개다> p85 

"오늘 아침엔 경운기 시동이 참 잘 걸리네요."/ "그래,기분이 좋구만."/ 별다른 뜻이 없어도 오래 아프게 된 말/ 송사에 답사. 상가엔 꼭 상복을 입은 이별장면,별사가 따로 있다. <경운기소리> p19 

지금은 쓸쓸한 춘궁, 그래도 봄날은 올 것이며/씹어먹어도 먹어도/굽은 등 떠밀며 또 봄날은 갈 것이다. <동백 씹는 남자> p87 

작가는  다시 묻는다. 존재의 한 파편을 언뜻 바라본 자로서 다시 한 번 자신에게 사람들에게 묻는다. 마치 최승호의 시<북어>를 연상시키는 <도다리>란 시다. 

대형 콘크리트 수조를 자세히 들여다 보니/ 아, 겨우 알겠다/ 흐린 물 아래 도다리란 놈들이 납작납작 붙은 게 아닌가/......당신의 비애라면 그러나/바닥을 치면서 당장,솟구칠 수 있겠느냐,있겠느냐  <도다리>p32 

문인수의 <배꼽>은 -상투적이지만- '절창'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은 시들이 '물 반 고기 반' 처럼 득실거린다. 독거노인의 모습을 그린<꼭지>, "죽는 거시 낫겄어야,참말로" 라는 '절창'으로 끝나는 '절창'을 담고 있는 <만금이 절창이다>, '극약 같이 짧은 시'만 쓴다는 서정춘 시인에 대한 시들.시끌벅적한 생명을 노래하는 <녹음>,<봄>등등....어느 하나 '탈골'시켜서는 안될 시들이 가득하다.  

한해 딱 한 권의 시집만 읽기로 작정한 이가 있다면 문인수의 <배꼽>은 목록에 들어가도 부족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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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 환상문학전집 11
필립 K. 딕 지음, 이선주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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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봄비가 장맛비처럼 내린 하루다.  

2019년 지구에도 매일 비가 내린다. 일본 신주쿠의 어느 거리처럼 보이는 '천사의 도시' LA는 오래된 고철의 도시다. 빗방울에 오래된 녹이 묻어내릴 것 같다. 리틀리 스콧 감독의 영화<블레이드 런너>에 대한 이야기다. 



워쇼츠키감독의 <매트릭스>가 나오기 이전까지 SF팬들이 가장 사랑하는 영화 중에 한편이 바로 <블레이드러너>였다. 이 영화의 원작이 바로 그 유명한 필립 K 딕의 소설<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이다. 영화와 소설은 전체적인 스토리라인에서는 유사한 부분들이 있지만 결코 같지 않다. 원작자 필립 K 딕의 상상력도 뛰어나지만 거기에 새로운 옷을 입혀 원작을 뛰어넘는 제2의 작품을 만들어낸 리틀리 스콧 감독의 능력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행여 이 작품을 아직 못본 젊은 세대가 있다면 찾아서 봤으면 한다.) 필립 K딕의 원작과 리틀리 스콧 감독의 영화를 단순 비교하면 무엇이 더 낫다고 말하기 힘들 정도다. 원작에 없는 내용과 설정들이 새로 영화에 등장하고 또 원작에서 매우 중요한 장면들이 영화에서는 삭제된다. 예를 들어 영화<블레이드러너>에서 가장 멋진 룻거 하우거와 해리슨 포드의 마지막 옥상씬은 소설에 없다. 오늘처럼 비가 내리는 날이다. 4년이란 운명을 다 채운 리플리컨트 로이는 영화사에 길이 남을 마지막 대사를 빗물 속에 남긴다.  

"난 당신들,인간들은 믿지 못할 것을 보아왔어. 오리온좌 곁에서 불타던 전함, 탄호이저 게이트 근처에서 어둠 속을 가로지르는 C-빔의 불빛들도 보았지. 모든 순간들은 시간 속에서 사라지겠지. 빗 속의 내 눈물처럼..... 이제 가야할 시간이야."  

이런 장면은 리틀리 스콧감독의 독창적인 것이다. 원작에서 안드로이드 로이는 영화의 영웅적 애수를 닮은 죽음을 선보이지 않는다. 영화의 죽음이 그리스 영웅의 죽음을 연상시킨다면 원작에서 그 죽음은 오히려 아킬레우스의 칼에 몸을 베인 이름 없는 트로이 병사처럼 처리된다. 

"릭은 로이 배티를 쏘앗다. 총을 맞자 키 큰 로이 배티의 사체가 철쩍 날 듯이 뛰더니 바닥으로 떨어졌고, 잘 깨지는 재질의 부품을 잔뜩 모아 만든 것 같은 그의 몸이 와르르 부서져 내렸다" 

이 장면만 보면 영화가 물론 더 흥미롭다. 그렇기 때문에 필립 K 딕의 원작은 별 볼일 없는 것일까? 절대 그렇지가 않다. 주제의식에 대한 집중방식과 형상화의 유형이 다를 뿐이다. 영화는 "인간이란 무엇인가?"의 문제를 추격당하는 리플리컨트의 행위를 통해 직접적으로  질문하고 있다면 소설은 이 문제를 추격자이자 주인공인 데커드라는 대상을 통해 끈덕지게 성찰하고 있다. 소설 속에 마지막 명장면이 없다면 대신 안드로이드 갈란드를 은퇴시키고 나서 벌어지는 사냥꾼 필 레시와 데커드의 장면이 있다. 매우 흥미로우며 철학적인 질문들을 담고 있는 장면들인데 영화 속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일시적 협조관계에 있는 필 레시와 데커드는 상대방도 자기도 안드로이드일지 모른다는 불신 속에 인간/안드로이드에 대한 정체성 질문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둘은 모두 기억이 조작된 안드로이드들은 자기가 안드로이드인지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는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안드로이드라면 처형에 있어서도 사무적이리 무감각한 데커드는 오히려 안드로이드의 특징을 갖고 있는 것 아닌가? 안드로이드는 영혼을 가지고 있는가? 기계에 지나지 않는 안드로이드에게 감정이입을 할 수 있을까? 기계에 부분적으로 감정이입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인간적인 특징이 아닌가? 이 장면에서는 안드로이드에 대한 정체성 뿐 만이 아니라 주인공인 인간 데커드의 정체성마저도 균열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한다.    


 

영화와 소설의 차이점은 이외에도 여럿 등장한다. 소설 속에 중요한 장치인 '머서주의'나 '전기동물'같은 것들은 아예 영화 속에 언급되지 않는다. 필립 K딕은 인간/비인간의 정체성부터 시작해서 궁극적으로는 그 질문을 '생명', '생' 과 같은 범주까지 끌고 가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데커드가 안드로이드를 처지하고 도달한 지점은 결국 '생'이라는 주제였다. 일종의 '생의 유일성'과 '생명의 불꽃'에 대한 범신론적 깨달음같은 것이다. 영화에서도 그 문제를 궁극적으로 유인해내기는 하지만 소설에 비해서 슬쩍 묻힌다. 리틀리 스콧의 영화 마지막은 몇 가지 버전이 있는데 디렉터스 컷의 경우 리플리컨드 레이첼과 데커드가 함께 달아나는 씬으로 이루어진다. 물론 레이첼도 도망한 리플리컨트이기 때문에 추격당해야하는 신세이다. 하지만 경찰서 소속의 가프는 선물이라도 되는 듯이 그녀를 놓아준다. 가프의 은빛학이 그녀의 아파트앞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결국 도망치더라도 그 끝은 '죽음'이다. 물론 영화에서는 또다른 질문이 중요한 토론 쟁점이 되기도 했다. 데커드는 안드로이드인가? 라는 점말이다. 리틀리 스콧은 열린 대답을 내놓았지만 리플리컨트쪽에 힘을 싣는 인터뷰를 했었다. 인간이든 리플리컨트든 결국 시간의 차이가 존재할 뿐 '죽음'이라는 것을 피해 갈 수 없다. 결국 소설이나 영화는 공히 '죽음' 이라는 것을 통해 '생'의 정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즉 죽는 모든 것은 '생'이다. 그것이 인간이든 안드로이드든 두꺼비든. 하지만 죽지 않는것. 영원한 생명은 이미 '생명'이 아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가장 비인간적이며 비자연적이다. 영원한 생명만큼 영원한 악몽도 없을 것이다. 

영화말고 소설 속에 나오는 몇 가지 아이디어들은 사회적인 의미로 읽히기도 한다. 예를 들어 2021년(소설은 2021년 1월 3일 하루동안 일어난 일이다.) 지구는 디스토피아적이다. 미래사회는 배제를 중심으로 한 인간종의 구분이 이루어진 인종주의적 사회다. 이것은 피부색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지구는 핵전쟁의 낙진으로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되었다. 필립 K딕이 이 소설을 쓴 시점은 1960년대 후반이다. 혁명의 시대이자 또 핵공포의 시대였다. 인류는 이제 4부류로 구분된다. 화성이라는 식민지 개척을 위해 지구를 떠난 사람들,  지구에 남겨진 자들, 그리고 그 중에 낙진피해가 심해져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버린 '특수자'들, 그리고 인간은 아니지만 노예인 안드로이드. 화성은 지구를 버리고 지구인은 특수자를 배제한다. 그리고 인간은 안드로이드를 부품으로만 취급한다. 전통적인 의미의 계급적 메타포처럼 보이는 설정이다. 

필립 K딕의 원작에는 시대적인 그림자가 묻이 있는데, 앞서 말한 핵전쟁의 공포같은 것이 1차적이다. 그와 함께 지금의 작가라면 전혀 다르게 그렸을 문제들이 자본의 문제들이 이 소설에서는 시대적 한계로 드러난다. 필립 K 딕의 시대는 일종의 '정치의 시대'였다. 사회의 여러 힘들이 쟁투를 벌이고 있었고 그것의 타도대상이든 조절대상이든 공적인 권력에 대한 가능성이 결코 포기되지 않았던 시대이다. 최소한 그 시대에 자본은 아직 사회적 권력이나 정치권력에 복속되거나 아니면 최소한 조절의 대상이 되던 시절이다. 이 소설에서는 거대자본으로 안드로이드를 만드는 로젠연합이 등장한다. 이 기업의 기술력은 인간과 구별이 거의 불가능한 안드로이드를 만드는 곳이다. 당연히 우주식민지 건설에 있어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곳이다. 그런데 이 곳에서 만든 넥서스 6가 문제가 생겼다. 일종의 하자가 생긴건데 이렇게 되면 넥서스 6의 기술은 폐기되게 된다. 기업 입장에서 막대한 피해이자 식민지 건설에서도 거대한 피해를 보게된다. 그런데 그 기술이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를 파악하러 경찰서 소속 프리랜스 인간사냥꾼 데커드가 달랑 기계 하나 들고 찾아간다. 경찰서장도 넌지시 이 방문의 의미를 이야기하긴 하지만 여전히 단일한 공권력이 이런 전지구적 자본을 견제할 수 있다는 믿음같은 것이 깔려있다. 이런 것을 빼놓고도 데커드 혼자 로젠연합이라는 거대기업에 대응하는 방식은 어쨋거나 개연성이 너무 떨어지는 설정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몇 몇 장치들, 머서주의나 감정이입기 같은 것은 물론 SF적인 상상력이기는 하지만 마치  '이데아와 시뮬라르크'가 미래세계를 배경으로 결합된 것과도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머서주의라는 것이 결국은 TV 화면앞의 장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데커드는 머서와 오히려 합일을 시도한다.이 기계는 인류의 총체적 소통기계인 셈이다. 자기의 경험과 타자의 경험이 감정이입기와 머서를 통해 이루어진다. 우리에게 자율적이라는 감정마저도 조절되고 관리될 수 있는 사회인 것이다. 이런 식의 전개는 디스토피아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1984'식의 통제사회의 다른 버전이다. 비릿한 소통이며 파국적인 소통의 가능성에 대한 형상화이다. 거기에는 일종의 네크로필리아적인 욕망이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Mors certa , vita incerta 

...이 책에서 싫었던 거...너무 친절하게 주인공의 반응과 심리를 '작은 따옴표'로 설명해주려는 장르적인 서술 의지...마지막에 와서 사건을 종결을 위해 기아 변속을 과감히 한 것..책 좀 더 두꺼워지면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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