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도살장
커트 보네거트 지음, 박웅희 옮김 / 아이필드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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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으로 커트 보네커트의 팬이 되었다. 영화를 찾아 보게 만든다. 글렌 굴드가 음악을 담당하기도 했다. 장르의 클래식을 넘어 언젠가 고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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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성의 사내 필립 K. 딕 걸작선 4
필립 K. 딕 지음, 남명성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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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대체역사물에 있어서 클래식이다. 실제와 가상의 역사가 절합되는 부분은 미묘한 페이소스가 있다. 식민성의 문제를 외부의 시선으로 고찰할 수 있게 한다. 후반부로 가면서 템포를 놓치는 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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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된 사나이 - 새번역판 그리폰 북스 6
알프레드 베스터 지음, 김선형 옮김 / 시공사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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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와르와 정신분석의 직접적 만남. 무의식의 세계에는 시공간이 없다. 그 실재와 접촉하는 일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박찬욱감독이 베스터를 왜 좋아하는지 알 수 있다. 영화화하고 싶은 욕망을 추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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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착해질 때
서정홍 지음 / 나라말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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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이란 늘 순간이다. 오늘 아침 강변을 걸으며 본  보라빛 작은 제비꽃...  경남 합천에 사는  농부 시인 서정홍을 먼 발치서 보았다. 아이의 유치원에서 마련한 아버지 교실에서였다. 문장의 첫 단어를 한 두번 더듬는 그의 어투와 58년 개띠의 서리 맞은 은빛 머리칼이 생생하다.  리뷰는 결국 그 소소한 인연이 만든 것이다.     

 몸살 기운이 채 가시지  않았지만 약속은 지켜야했다. 첫째 아이 예찬이는 유치원 교실에서 놀았다. 아내랑 둘째 재원이랑 맨 뒷자리 앉은뱅이 의자에 앉았다. 농부 시인 서정홍은 아버지들이 이렇게 많이 모인 자리는 머리털 나고 처음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의 강의는 예상했던 '바람직한 아버지의 상' 과는 다른, 주로 생태주의적 가치에 대한 것이었다. 때로는 과격한 말로 때로는 웃음 섞인 말로, 땅과 자연, 이웃과 가치로운 삶의 문제를 자신의 귀농 경험과 섞어서  이야기했다. 감동적이지는 않았다. 대단한 각성도 없었다.<녹색평론> 한권만 펼쳐봐도 다 알 수 있는 이야기, 머리로는 수 십번도 더 이해했던 이야기. 인간과 자연이 더불어 사는 삶....

 말문이 트여 잠시도 쉬지 않는 둘째 재원이의 이야기를 듣다가 멀리서 온 농부의 이야기를 듣다가 하면서 두어시간이 지나갔다.

 농부는 합천 가는 마지막 버스를 타야 한다며 일어섰다. 양복 입은 아버지들도 하나 둘 자리를 떳다. 유치원 교무실에는 나름 유명한 출판사에서 낸 산문집과 처음 들어보는 출판사에서 낸 그의 시집이 조신하게 놓여 있었다. 7000원,5000원의 꼬리표를 달고서. 책 좋아하는 사람의 기본적 습성은 종이 냄새를 맡으면 표지라도 한번 보거나 최소한 한번 쯤 열어보는 시늉이라도 한다는 것이다. 책이라는 것에 대한  예의 같은 것. 개인적 습성에 더하여, 마지막 버스 놓칠까 시계를 훔쳐보던 가난한 농부에 대한 예의까지 겹쳣다.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시집 <내가 가장 착해질 때>를 주머니에 넣고 돌아왔다.  

 아이들을 재웠다. 새로 들여온 시집을 아무데나 펼쳤다. 

'아...' 글자 읽는다는 짐승의 오만함이여... '선생님, 그 정도는 이미 다 아는 내용이라구요' 라는 식의 그 잘난 벽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한 편 두 편 세 편. 시 하나 하나가 가슴에 남는 스냅사진처럼, 또는 펑펑 울리지는 않지만 돌아와서 앉으면 눈물 고이게 하는 영화의 작은 장면들 같았다.  벤야민식의 '충격'인 셈이다. 충격이 반드시 몰고오는 내면의 붕괴 역시도. 미학적으로 거창한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미력한 나머지 책과 글 속에 깊이 허우적 거리고 있던 즈음이어서 강한 '환기'와도 같은 것이었다. 좋은 인연이란 이런 것이리라.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내가 가장 착해질 때>라는 시다.  

이랑을 만들고/ 흙을 만지며/ 씨를 뿌릴 때/ 나는 저절로 착해진다.  

나는 내가 착해지지 않는 이유를 알게 된다. 언제 흙을 만지며 씨를 뿌려본 적이 있었지? 지난해 마지못해 나가서 흐지부지하다가만 한살림 공동 텃밭? 집에 기르던 작은 물고기의 주검들만해도 그렇다. 처음에는 고운 티슈에 싸서 아들과 함께 아파트 화단에 묻어주었다.'좋은데로 가세요'라고 기도하면서. 그런데 십 여 마리 보내고 나서는 이제 휴지에 싸서 예찬이 모르게 종량제 봉투에 넣는다. 하지만 아이들도 눈치 채고 있을 것이다. 물고기의 죽음에는 관심을 보이지만 그 주검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더 이상 묻지 않는다. 그런 내가 도대체 '생명'에 대해 뭘 읽고, 뭘 느끼고, 뭘 알고 있다는거지?  

<이른 아침> 

감자밭 일구느라/괭이질을 하는데/땅속에서 개구리 한 마리/툭 튀어나왔습니다// 

날카로운 괭이 날에 한쪽 다리가 끊어진 채 나를 쳐다봅니다.// 

하던 일 멈추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하루 내내/ 밥도 먹히지 않았습니다./물도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농부는 마을에서 청년 회장을 한다고 했다. 그 날도 부산까지 강의하러 가면 마을 어르신들이 걱정이 태산이라고 했다. 십여가구 사는 산골에는 이웃이 119이고 응급대원이기 때문이란다. 지난 번에도 강의하러 멀리 간 사이 이웃의 나이 많은 어르신이 위급한 상황이 되서 아내 혼자 마산으로 창원으로 늦은 시간에 헤메었었다고. 농부는 자기에게 예수님과 부처님은 그 산골 마을에 사는 이웃집 할머니들이라고 했다. 평생을 가난과 시름 속에 살았고 온몸에 안아픈 구석이 없지만 또 해마다 봄이 되면 검정고무를 무릎에 대고 기어다니면서 씨를 뿌리는 사람들. 그의 시에는 그가 예수처럼 부처처럼 여기는 시골마을의 할머니들이 할아버지들이 많이 등장한다. '농사는 힙으로 짓는게 아니여 '라는 덕산 할아버지, 겨울 햇살 아래 낡은 포대를 기우는 인동할매, 큰 병이 스무가지나 된다고 겁주는 의사의 말에 찬조출연해준 서른가지의 병을 가지고도 일한다는 수동할매, '낮에 죽더라도 자식들 퇴근하고 나서 알려주라던' 혼자 앉아서 돌아가신 생비량 할머니, 무 열뿌리 훔쳐간 도둑이 누군지 알아도 모른척 해주는 단성 할머니. 다 예수고 부처인데 농부가 어찌 그들의 단잠을 방해할 수 있겠는가.    

<완행버스 안에서> 

안의 장날, 완행버스 안에서/ 고사리 취나물 들고 이고/ 숨 가쁘게 올라온 샘골 할머니와/나는 같은 자리에 앉았습니다. 

할머니는 앉자마자/ 금세 코를 골았습니다./나물 냄새보다 더 진한/ 땀 냄새와 함께/헝클어진 머리가/내 어깨에 닿았습니다. 

봄나물 뜯느라/ 해보다 먼저 일어나고/ 언덕으로 무덤 사이로/ 이리저리 헤메고 다녔을/ 할머니를 생각하면/ 내 어깨가 너무 작습니다. 

할머니 단잠을 깨울까 봐/ 나는 숨조차 쉴 수 없습니다.


사랑? 연대?  글로 배운 사랑은 '접촉'을 두려워한다. 모든 혐오는 접촉에 대한 혐오라는 말을 내가 이해하는 바는 그렇다. 그럴싸한 변명을 둘러대더라고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나도 역시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한다면 만질 수 있다. 예수가 문둥병자를 치료한게 사랑이 아니라 예수가 그를 만지신게 사랑이다. 하지만 글로 배운 사랑은 만질 줄을 모른다. 흙을 만지지 않아서 그런것이다. 햇빛을 만지지 않아서 그런 것이다. 농부는 내게 계속 질책한다.  

농부의 시집<내가 가장 착해질때>에는 그 외에도 가난 속에 반짝이던 아름다운 순간들, 또 아내와 가족에 대한 감사와 믿음을 일기투의 평범한 문체로 쓴 글들이 여러편 실려있다. 가난한 집에 들어와 애지중지 모았던 상품권을 훔쳐간걸 보다가 모두 도둑의 편이 되어가는 가족들. 외식하기 전에 아이들 밥을 먹이고 나가던 아내, 고열에 생사의 고비를 넘는 순간 통장에 모아놓은 3만 7천원을 양로원에 가져다 주라던 열살 무렵의 아들, 울며 불며 곡을 하다가도 언제그랫냐는 듯 향불과 조문객들 먹을거리를 챙기는 고모, 누가 버린 쌀을 가지고 강정을 만들어온 처제등등.. 

물론 가난한 날의 아름다운 추억과 살가운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안에는 뼈골빠지게 살아도 힘들기만한 농민들의 모습이, 웃음을 잃지 않으려 하지만 한편으로 씁슬해질 수 밖에 없는 장면들이 들어있다. 더 끌고 올라가면 생태문제나 농정 문제까지도 가지고 갈 수 있는 문제들이다. 하지만 이것은 시다. 농부의 말마따나 쉬운 시이다. 하고싶은 말은 많겠지만 농부는 그저 담담히 자신의 눈에 비친 바를 자기의 언어로 풀어낼 뿐이다. 강의 중에 몇차레에 걸쳐 농부는 자신의 직업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직업이라고 했다.   

<농사일지2> 

"바쁜 논밭일 다 제쳐 놓고,일당 오만 원 짜리 산성 보수 작업하러 간 우리 신랑, 오늘 품삯 받아 오면 얼마나 좋을까"  

 지을 사람 없어서 내버려둔 산밭 개간하여, 고추 모종 함께 심던 희연이 엄마가 뜬금없이 던진 그 말에, 나뭇가지에 앉아 놀던 새들은 그 마음 아는 듯 울어댄다. 

그렇지, 그렇고 말고. 농촌 살림살이에 돈 오만 원이 뉘집 똥개 이름이 아니지, 그 돈이면 글자 배우고 싶다는 큰 딸 희연이 공책도 사 주고, 안의 장날 고등어라도 몇 마리 사서 고된 일에 지친 신랑 돌아오면 저녁 밥상 구워 올릴 텐데...... 

 희연이 엄마 소박한 꿈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고,노랑나비 너울너울 춤을 추고
 

 아득한 이야기들도 있지만  시집 <내가 가장 착해질때>가  아름다운 것은 '존재의 골다공증'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도시의 이름난 여류,남류 시인들, 비평가들과 그 친한 친구들이 남발해대는 뼈 숭숭 뚫린 시어들과는 굵기가 다르다. 마치 장기간 입원하고 나온 환자들 같은 시들이 칭송받는 시대가 아니던가?  존재의 심연을 헤메다 익사 직전 건져낸 시어들.그것들 중에도 분명 소의 정수리를 때린 것들이 있을게다. 하지만 농부의 시는 다르다. 마치 니체의 춤을 추는 현자처럼 태양 아래 춤을 춘다. 고추밭 사이에서 막걸리를 마시고, 정자 나무 아래 이름도 모르고 먹는 팥빙수를 먹는다. 참꽃을 보다가 괭이자루 던지고 하루 퍼질러 앉아 쉬기도 하며 말이다.  

<모심는날> 

환갑 진갑 다 지난 밀양아지매/모심다가 흙 묻은 손 씻지도 않고/ 논두렁 가에서 오줌을 눈다 

오줌 누는 소리/ 어찌나 시원하게 '들리는지/ 함께 모심던 아지매들/한바탕 웃어 대는데/밀양아지매/당당하게 한마디 내뱉는다. 

"이년들아, 너거는 똥구녕도 없나? 웃기는 와 웃어 쌓노. 오줌만큼 좋은 거름이 어디 있다꼬." 

논 개구리 한 마리가/ 밀양 아지매 하얀 엉덩이를/ 가만히 바라보는 한낮 

산골 마을 다랑논에서 부르는/ 정겨운 노랫소리/ 봄바람에 실려 어디론가 흘러가고.... 

나는 최근에 이렇게 아름답게 봄풍경을 묘사한 시를 보지 못했다. 봄바람처럼 시원하다.
  

이렇게 긴 리뷰를 쓰게 된 것도 결국 그 먼발치에서 본 인연때문이다. 그리고 이 정도의 수고로움은 좋은 시를 길러 주신 분에 대한 내 예의이다.  

농부는 그의 시<시를 읽다가>에서 이렇게 말한다. '책방에서 사천 원 주고 산 오래된 시집 속에 배우고 깨칠 게 하도 많아 사만 원 주고 사도 아깝지 않겠구나 싶다. 그럴 때는, 문득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찾아온다. 그 마음 그대로 시인에게 전화를 걸어 시인이 쓴 짧은 시 한 편 읽어 드리고 싶다' 라고 말이다. (농부는 김남주 시인의 '옛 마을을 지나며'를 인용한다.)

 내가 농부 시인에게 다시 돌려드리고 싶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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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내세 민음사 모던 클래식 7
러셀 뱅크스 지음, 박아람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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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녁이 하는 일이란/ 천지간에 어둠을 깔아 놓은 일/ 그걸 거두려고 이튼 날의 아침해가 솟아오르기까지/ 밤은 밤대로 저를 지키려고 사방을 꽉 잠가둔다." 

                                                                         김명인,<천지간>중에서 

상실은 사람을 부유(遊)하게 만든다.  상실을 경험한 사람은 언제 터질지 모를 거대한 고무풍선에 몸을 맡긴 것과 유사하다. 대부분은 운명의 여신이 다른 대상을 찾아 우리를 시큰둥해하며 내려놓을 때까지 묵묵히 올라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삶의 일정 부분은 운명의 여신들의 몫이라는 것을 수용하기까지 꽤나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어떤 이들은 삶은 다른 '너머' 를 만들지 않는다는 평범한 진실을 얻기도 한다. 하지만 깨달음조차 우리의 인식과 실천에 항구적인 항체를 만들지 못하는 것 같다. 누군가를 잃는다는 것은 매번 이름을 바꾸어 달고 또 다른 처방전을 요구하는 변종 바이러스같다. 

  
  아이들이 모여 산다는 '달콤한 내세'는 없다. 아니 역설적인 형태를 취해야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달콤한 내세'는 '쓰디쓴 현세'를 심장이 찟기는 통증만큼이나 강하게 인정하는 순간에 도착할 수 있는 상태이다. '젓과 꿀이 흐르는' 피안을 연상시키기도 하는 '천국'이니 '이데아'니 하는 류의 '내세' 따위는 없다. 그것은 도착적이며 기만적인 환상이다. 삶 너머는 아무것도 없다. 그 너머의 것은 애써 상상해보려해도 불가지의 영역일뿐이다. 불가지의 영역은 헤아려서 안되는 것이 아니라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뿌리 뽑힌 존재론적 조건에 대해 우리는 비극적 전망 밖에 할 수 없는 것일까?  애초부터 죽음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그에 충실히 비극적 삶이어야 할까?  존재의 조건이 존재의 양식에 그대로 반영된다는 생각은 즉물적이며 허무주의적이다. 우리는 오히려 부서진 채 -니체의 말처럼- 춤을 출 수 있다.    



 "우리 모두, 그러니까 나와 니콜, 사고에서 살아남은 아이들과 살아남지 못한 아이들. 우리 모두는 이제 완전히 다른 마을 사람들이 된 것 같았다. 우리는 달콤한 내세에서 외딴 마을을 구성하고 사는 것 같았다."  러셀뱅크스,<달콤한 내세> P299 

   눈 덮인 뉴욕 북부의 시골마을, 평소와 다름없던 그날, 아이들을 태운 버스가 추락한다. 다수의 아이들이 사망한다. (소설은 실화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사적 정의감인 '분노'로 자신의 업을 정당화하는 합리적인 변호사 미첼 스티븐슨. 그는 이 사건의 원인 규명과 배상을 위해 희생자들의 부모들을 만나러 다닌다. 단순히 운전자의 과실이 아니라 도로의 상태나 안전 시설등의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시 당국과 교육 당국에 막대한 배상을 목적으로 소송을 할 요량이다. 비교적 순탄하게 소송에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고 생각하는 시점에 사고 생존자 니콜 버넬을 만난다.   



  소설은 사건을 중심으로 삶과 죽음의 문제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동시에 마을 공동체의 가려진 모습도 중요한 축으로 삼고 있다. 아톰 에고이안의 영화에서 니콜은 마지막 대사를 통해 '각자의 규칙에 따라 살아가는' 이라는 방식으로 삶과 죽음의 경계를 구분한다. 죽은 자들은 육체적으로, 그리고 영혼까지 이제 '다른 세계'의 마을 사람이 되었다. 각자의 '달콤한 내세' 속에 존재하게 된다.  

그러나 '삶과 죽음'을 이원론적으로 나눌 수는 없다. 우리라는 공통의 현존재들은 삶의 시작과 동시에 죽음을 부여안고 사는 존재들이다.  마을 공동체가 죽음을 조금의 잔여도 남기지 않고 삶의 한 부분으로 끌어 안고 가는 모습에서 죽음을 삶의 일부라고 여기지만 결국은 타자의 것으로 인정해버리는 통속적인 깨달음의 것과는 다른 차원을 만난다.  마을 공동체 전체와 그 구성원들이 죽음 자체를 삶의 지워지지 않는 문신으로서, 존재의 기본적 전제로 안고 가는 것이다. 죽음의 뼈를 그대로 드리운 채 삶을 이행하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 삶의 본질로서의 죽음을 온전히 이해한 것이다. 이와는 다른 방식으로 소송이라는 법률적 절차를 통해 죽음의 직간접 원인에 대해 대속할 수 있는 대상을 찾는 방식이 변호사 미첼의 것이었다. 하지만 소설은 그 반대방향을 향한다.  

소설 속 희생자의 유족이자 베트남 참전군인인 빌리 안셀이 사건 이후의 삶을 '베트남전'의 트라우마와 비유하는 장면이 있다. 이것은 빌리 안셀의 개인적 경험에 의한 것이지만 결국 마을 전체에도 해당하는 것이다. 즉 마을 전체가 이제 아이들의 죽음을 통해 '죽음을 통해 삶을 영위하는' 방식과 대면해야하는 요청에 맞닥드린 것이다.  영화 속 아톰 에고이안은 이런 죽음을 통한 삶의 영위라는 과제를 오래된 유럽의 구전설화인 '피리부는 사나이'를 통해 상기시킨다. 피리부는 사나이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아 사라져 버린 아이들의 세계에 사는 마을의 사람들은 어떤 존재적 변화를 겪어내고 강요받은 삶과 대화할 것인가.  

     
  사건을 추적하는 과정은 평온한 마을 공동체의 이면과 삶의 다층적인 변부들을 보여준다.  우화적인 사회소설이 추구하는 추악한 공동체의 위선 같은 것과는 크게 상관없다. 물론 무탈한 마을 공동체 안에 도덕적인 흠결 등이 있고 그것이 사건의 중대한 반전을 쥐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소설이 마을이 가진, 평범한 사람들이 가진 도덕적 일탈을 고발하거나 집어내기 위해서 씌여진 것은 아님에 틀림없다. 근친상간의 트라우마는 사건 진행의 숨은 열쇠이며 사건의 방향을 변모시키는 매우 중대한 계기가 된다. 그것은 결국 사고 피해자인 니콜과 돌로레스 그리고 마을 주민들의 삶을 다른 방향으로 이끄는 계기가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삶의 봉합과 새로운 지속을 위한 사건 전개상의 도구이지 그것이 공동체의 도덕성과 숨겨진 개인의 성적 음험함등을 고발하기 위한 지표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소설 속에는 얼음길에 미끄러져 세상을 등진 아이들 말고도 사실 숨은 아이가 하나 더 있다. 변호사 미첼의 딸이다. 영화는 소설에 비해 이 역할에 비중을 좀 더 많이 둔다. 그리하여 '변호사 미첼-딸/ 마을주민-희생된 아이들' 이라는 이중 구조가 연결된다.  영화 첫 장면도 변호사 미첼과 딸의 대화부터 시작된다. 미첼의 딸 조이는 부모의 이혼,마약과 방탕한 생활 등으로 이미 부모와는 척을 지고 있는 상태다. 오로지 마약을 구매하기 위한 돈이 필요할때만 뉴욕의 변호사인 아빠에게 읍소한다. 이 영화에서는 그런 조이의 어린 시절의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비춰진다. 영화 포스터의 스틸화면으로도 알려진 그 이미지이다. 미첼의 과거 회상 장면인 것 같기도 하고 지금처럼 뒤죽박죽이 되기 이전의 어떤 평화로운 상태에 대한 이미지인 것 같기도 하다. 아톰 에고이안은 아예 소설에 등장하지 않는 딸의 친구와의 비행기 속 만남이라는 씬을 설정하여 변호사 미첼이 또 다른 방식으로 딸아이를 '내세'로 보낸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게끔 한다. 소설과 영화 둘 다 딸의 HIV양성반응이라는 전화장면을 통해 파국적이지만 단 한번의 기회가 될 수 있는 모종의 재회를 암시한다. 

  

 앞서 이야기했던 영화 포스터로도 쓰인 평화로운 장면은 변호사 미첼의  인상적인 일화를 담고 있다. 앞으로 소설이나 영화를 보게될 사람들을 위해 일종의 예의로 남겨두는 것이 좋을 성 싶다. 그 일화 속에는 소설 전체를 지배하는 '삶/죽음' 에 대한 은유가 담겨있다. 영화 속에서 버스가 추락하고 난 이후 다음에 등장하는 컷트도 바로 그 장면이다.  소설 속에서 미첼이 이야기 했던 그 경계선에서의 섬뜩한 '명쾌함'이란...참으로 ...(소설 속에만 이 '명쾌함'이란 단어가 나오는데...미첼이 들고 있던 소독한 면도날도 어쩔 수 없는 '명쾌함'이란 단어가 주는 예리함보단 날카롭진 못했을 것이다. 거기서 가장 적절하며 필요했던 단어가 바로 그 '명쾌함'이었다니 그것을 찾아낸 작가에게 경의를) 이 책은 어쩌면 '죽음의 그 명쾌함'에 대한 역설적 오마주, 그 절대적 불가능성에 대한 오마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러셀 뱅크스의 <달콤한 내세>는 사실 아톰 에고이안의 영화<달콤한 내세>를 보고 난 이후 찾아 읽게 되었다. 영화가 좋을 경우만 하는 짓이다. 세간의 평가처럼 비교적 원작에 충실한 영화였다. 러셀 뱅크스의 소설은 사건의 진행과 주인공들의 사건 전후의 일상,그리고 사건과 관련된 내면의 움직임등을 각 장마다 다른 화자의 목소리를 통해 직접적으로 입체화한다. 반면 아톰 에고이안은 주로 미첼 변호사의 시선과 생존자의 증언을 병치 시키고 있다. 대신 효과적인 교차편집과 인서트편집을 통해 사건을 둘러싼 내밀한 정서들을 표현한다. 매체는 다르지만 둘 다 매우 뛰어난 스토리텔러들임에는 틀림없다.   

  죽음이나 죽음을 통한 상실은 매일 분만실에서 신생아가 세상 빛을 보듯 발생한다. 병원에서, 차도 위에서, 쓸쓸한 여관방에서. 상실의 문턱을 넘어서기란 결코 쉽지 않지만 또 영원히 함께 하기도 마땅치 않다. 애써 그것을 떼어내려하는 것도 작위적이며 또한 지나치게 그것에 묻혀있어도 부자연스럽다. 결국 부서진채로 다시 삶을 영위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할 수 있느냐고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 계속 물을 수 밖에 없다. 거대한 슬픔은 그런 질문을 정당화 해준다. 그리고 언젠가 행복이란 것은 결국 과거의 것을 쓸어담으며 오는 것은 아니라는 진부한 진실과 만날 때까지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우리는 계속 그 질문과 대면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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