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찬란한 태양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 / 현대문학 / 200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지난 해를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은 '아프간 선교단체 피랍' 사건이었다.9.11 테러 주범으로 오사마 빈 라덴을 지목한 미국의 부시정권은 '초록은 동색'이라고 아프간 탈레반 정권을 겨냥하여 폭격을 감행했다.탈레반은 쫓겨 났고 미국의 폭격을 감싼 '인권외교'는 빛을 발휘했다.그 틈새 시장을 그냥 봐 넘길 '한국 기독교'가 아니다.어쨋거나 아프간 피랍 사건은 세상의 한 구석으로 잊혀질뻔한 아프가니스탄의 비극을 다시 한 번 떠올리게 했다.

소설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은 아프가니스탄의 비극적인 역사를 관통하는 여러 종류의 삶을 그리고 있다.그 중심에는 '여성 수난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두 아프간 여성이 있다.소설은 비참한 출생의 비밀을 갖고 있는 마리암의 역사로 부터 시작해서 자존감 있는 라일라의 역사로 넘어온다.그리고 이 둘은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동일한 역사와 남성의 폭력 하에 놓이게 된다.적대적인 상황 속에서 만나게 되는 이 두 여인은 결국 새로운 생명과 인간의 자긍심이라는 가치 아래 만날 수 있게 된다.

소설<천 개의 찬란한 태양>이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이유는 어떠한 상황 하에서도 놓치 않는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소설의 결말에 이르기 까지 두 주인공 마리암과 라일라가 겪는 여성으로서의 고통은 참담하다.역사의 폭력에 시달려야하고 가정 내의 폭력에도 저항하지 못한다.저항은 언제나 더 큰 무력으로 잠재워질 뿐이다.이 책은 나보다 아내가 먼저 읽었다.그녀를 위한 크리스마스 선물이었기 때문이다.지난 해 말 이 책을 읽던 아내는 때론 분노하고 때론 눈물지으며 책을 봤다.아프가니스탄의 역사에서 여성이 당해야 했던 슬픔에 대한 '여성으로서의 공감'이었을 것이다.그런 면에서 보면 이 책은 역사의 가해자들(침략자거나 남성이거나 종교이거나 거대담론..)로 부터 수탈당하고 학대받는 여성들에 대한 '페미니즘'소설로 읽힐 만도 하다.특히 이 책에 대해 깊이 공감하는 여성들이 많다는 것은 두 주인공의 역사가 우리 역사에 있어서 피해자로서  '여성잔혹사'와 그다지 멀지 않다는 기억때문 일 것이다.거기에 '어머니'라는 보편적 가치가 소설의 장치로 등장한다. 적대적 관계 상황에 놓인 두 주인공 마리암과 라일라를 하나로 만들고 연대감을 심어주는 것은 '모성'이다.라일라가 불가피한 선택을 한 것도 또한 마리암이 숙연하게 만드는 희생을 한 것도 모두 '모성'의 위대함이다.인류의 유전자 속에 깊이 아로새겨진 '모성'이라는 '위대함'은 공간적 차이와 역사적 이질감에도 불구하고 깊은 감동을 준다.

또한 이 책은 영화를 연상시키는 듯이 씌여졌다.영화적이란 것은 좋게 말하자면 장면 장면의 스피드가 빠르다는 것이다.한 장 한 장 마다 새로운 사건과 새로운 가능성의 단초가 보인다.그리고 극적인 전환도 빠르게 이루어진다.헐리우드식 영화 기법에 익숙한 독자들의 구미를 맞출만한 구성의 스피디함이다.그렇기때문에 꽤 두꺼운 분량임에도 빨리 읽힌다.평이한 문체와 알기 쉬운 스토리도 물론 한 몫한다.구성은 빠르기도 하지만 그다지 복잡하지도 않다.인물의 심리를 묘사하는데 몇 장씩 씌지도 않는다.또한 과거 현재를 넘나들면서 어느 시간대에 있는지 헷갈리게 하지도 않는다.주인공의 시점을 수시로 바꾸어서 앞장을 넘겨보게 하지도 않는다.그저 두 개의 선분이 한 점에서 만나고 하나로 수렴된다.마치 다큐멘터리의 구성을 보듯이 그렇게 직선적이고 연대기 순으로 스토리가 전개된다. 

 나는 이 책을 보면서 문득 이 작품의 영화 대본작업을 할 때-영화로 만들어진다고 한다-그다지 어려운 각본 수정 작업 가능하리라 생각이 들었다.얼핏 생각하면 마치 영화 제작을 상정해 두고 소설을 만든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영화적'이다.결말 역시 '해피엔딩'으로 마감하여 대다수의 독자에게 만족감을 준다.(비극적이거나 무한히 열려있는 결말은 얼마나 독자를 불편하게 하는가!!)

'영화적'이란 것은 사실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이 작품은 헐리우드에서 무척 좋아할만한 소재이다.헐리우드는 스펙터클한 오락물.폭력물만 만들어내는 공장이 아니다.헐리우드는 다양한 소재를 다양한 그릇에 담아낼 줄 안다.그런 면에서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은 헐리우드산 휴머니즘 영화의 소재로 그럴싸하다.물론 이 책도 그렇지만 '인권'이란 부분에 강한 스폿라이트를 줄 것이고 '휴머니즘'과 '위대한 희생'에 촛점을 맟줄 것이다.이 '헐리우드식 프로세스'에 빠져 있는 부분들이 있다는 것은 결국 독자가 읽어내야 하는 부분이다.

최근에 나온 영화 <찰리 윌슨의 전쟁>은 미국 하원의원이 소련의 아프간 침공을 막기 위해 아프간 정부와 무장단체들에 무기를 지원하는 내용이다.인권탄압과 문명파괴의 대명사,종교근본주의자 탈레반 역시 미국과의 밀월관계가 지속되었던 시절이 있었다.소설은 다분히 '인권'이란 보편적 주제로 세계에 호소한다.그리고 소설에서 '미국'의 역할은 거의 끝부분에만 등장한다.약간의 우려 셖인 목소리로 말이다.궁극적으로는 탈레반이라는 '큰 악'을 쫓아내고 평화를 이끌어낸 '차악'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고 있다.미국에서 이 소설이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미국의 대외관계에서 나타난 '정치적 죄의식'에 대한 눈가림이거나 (또는 무지이거나 ) 미국민들이 '보편적'으로 인권에 대한 의식이 타국민에 비해 뛰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 좋은 소설을 그렇게 정치적으로 삐딱하게 읽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다.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의 '아프간 여성 억압사'에 같이 아파하고 가해자들에게 분노하는 것이면 족하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그런 면에서 나도 아프고 공감하고 분노하고 울먹였다.)그저 그 가해자들의 목록에서 '미국'도 빠질 수 없다는 정도 까지만 이야기하자.

마지막으로 나는 일본에서 만든 한 다큐멘터리를 말하고 싶다.그전에 영화 <천상의 소녀>(영어제목 오사마)를 이야기하는 것이 순서겠지만.이 영화는 2003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관객상을 받았던 영화다.칸느와 골든글러브에서도 상을 받았다.탈레반 이후 아프간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장편영화였다. 나는 영화<천상의 소녀>를 보지 못했다.대신 몇 년전 일본 출장길에서 나는 그 영화 제작 과정을 가지고 만든 NHK의 다큐멘터리를 보았다.(영화 제작에 일본NHK가 펀딩했기때문이다.) 다큐멘터리는 세디그 바디막 감독의 시선에서 시작한다.촬영 종료 후 다시 현장을 찾아다니면서 "왜 이 영화를 찍었는지" "어떻게 주인공을 선정하게 되었는지" "아프간의 어떤 모습을 그리고 싶었는지"...등등을 이야기한다. 주인공 마리나를 선정하게 된 장면은 인상적이었다.슬픔과 분노를 동시에 담고 있는 얼굴을 찾고 싶었다고 했다.전쟁 고아들과 빈민굴을 뒤지면서 수 천명을 캐스팅하기 위해서 만났다.그러던 중 주인공이 될 마리나를 본 것이다.감독은 바로 '이 아이다'라고 계시를 받듯이 그녀를 만났다고 했다.이 주인공은 전문배우가 아니었다. 아픈 아빠와 엄마를 대신해서 일주일째 밥을 굶으며 거리를 뒤지고 다니던 아이였다.감독은 그 아이에게서 '슬픔과 분노' 그리고 그 뒤편에 이런 비참함 상황에 어쩔줄 몰라하는 '자긍심'을 담고 있는 눈을 보았다고 했다.다큐멘터리에서 본 그녀는 정말 그랬다.

다큐멘터리는 영화 촬영 장면 중간 중간 길거리 캐스팅된 거지 아이들이 엑스트라비를 받기위해 몰려드는 것부터 영화와 현실의 아프간의 모습을 동시에 비춰주고 있었다.

이 다큐멘터리의 압권은 마지막 장면이었다.영화 촬영은 끝났다.아이는 몇 주간의 배우로서의 역할을 접어야했다.그녀는 약속했던 돈 보다 조금 더 많은 돈을 두 손에 쥐어들었다.성인 남자가 6개월동안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라고 했다.그녀는 인터뷰에서 '영화 찍는 동안 태어나서 처음으로 인간으로서 대접받았다.'라고 울먹였다.아이는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는 장면에서 어른스럽고 속깊어 보이던 아이가 울기시작했다.감독과 다른 스탭들도 모두 울먹였다.아이는 다시 현실로 돌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다큐멘터리는 이 영화가 그해 유수의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한다.(이 다큐멘터리도 세계적인  TV프로그램 페스티벌에서 상을 받았다.) 그리고 다큐멘터리 촬영이 끝나고 6개월이 흐른 시점에  제작팀은 다시 마리나를  찾는다.마리나는 어떻게 되었던 학교를 다니려고 한다고 말한다.짧은 만남이후 다시 마리나는 무너진 담과 벽돌들 사이로 사라진다.카메라는 그 장면을 무려 3분 가까이 롱테이크로 보여준다.아이는 가면서 두 서너번 뒤를 돌아보고 손을 흔든다.카메라는 그녀가 회색빛 잔해들 사이에서 작은점이 될 때까지 계속 OFF버튼을 누르지 않는다.제작진은 그 때 마리나가 울고 있었다고 말한다.

다큐멘터리의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영화를 찍고.. 다큐멘터리를 찍고..그리곤 다시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갑니다.직장에 나오고 일을 하고 친구를 만나 농담을 하고 술잔을 기울이고...그리고 언제 우리가 그런 일들을 했었는지 잊어버립니다.

하지만 그곳에서....삶은 계속됩니다.그래서 그 마지막 장면을 그렇게 날것 그대로 넣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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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밤바 2008-02-11 07:59   좋아요 0 | URL
예전에 '현대 세계와 글로벌 시각'이라는 교양 과목을 들을 때가 생각나네요. 그때의 우리도 세계의 분쟁과 빈곤 문제를 다루면서 다른 학생들과 교수님이 최대한 공감할 수 있도록 많은 자료와 사례들을 다루었었죠. 더 많은 공감이 더 높은 학점을 보장해 주기 때문에 꽤나 많은 시간과 토의를 거쳐 발표자료를 만들었습니다. 수업의 듣는 학생들에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하면서 까지 저희의 발표 내용을 역설하였지만 그 발표 후 세계의 빈곤과 분쟁 문제는 오히려 수능 치고 난 후의 참고서 마냥 지긋지긋한 것이 되었습니다.

불현듯 이것을 학점에 종속되게 만든 학교 시스템과 사회적 문제로 쉽사리 치환하며 스스로에게 정당성을 부여했던 날들이 자기기만으로 느껴지네요. 물론 팀전님의 글이 그러한 치졸함을 반성하게 된 계기의 전부일 수는 없지만 좋은 자극제가 된 것 같네요. 사회 문제에 관심을 많이 두면서도 그 문제가 불러일으킨 감정적 미안함이나 심리적인 고통은 다 타인의 탓인냥 치부했던 일련의 행각들이 농도 옅은 햇살 아래에서 부끄럽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한다' 라는 약간은 진부한 드라마 대사에 사랑 대신 다른 어떤 말을 집어 넣으면 너무나도 가슴 절절한 행동 서약서가 될 법도 합니다. 장하준 교수가 지승호씨와 인터뷰한 책에서 언급한 '선한일과 악한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 편한일과 그렇지 않을 일이 있을 뿐이다' 라는 말도 생각나네요.^^

드팀전 2008-02-12 10:40   좋아요 0 | URL
^^ 무자년이지요.새해 복많이 받으시고...좋은 일이 많이 생기는 시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절름발이 늑대에게 경의를
바스코 포파 지음, 오민석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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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늑대가 심장을 한 웅큼 물어 뜯었다.황금빛 누런 이빨 사이로 너덜 너덜해진 심장의 살점이 보인다.더러운 입 주변으로 선홍빛 붉은 피가 그대로다.

후텁지근한 야생동물의 콧김. 100년 동안 닫혀있던 창고의 쾌쾌함을 일시에 쫓는다...번뜩인다.그 야생 동물의 회색 빛 털이...번뜩인다... 화살촉보다 날카로운 눈빛.

우아하다....모욕당한 절름발이 늑대는....

<절름발이 늑대에게 경의를> 앞에 잠시 움찔하며 한 두걸음 뒷걸음질 친다.

1.모욕당한 절름발이 늑대여/그대의 굴로 돌어가라/가서 잠들라 /짖는 소리가 얼음으로 변하고/저주의 말이 녹슬고/횃불들이 흔한 사냥 때문에 죽을 때까지/모두가 빈손으로/자신 속으로 떨어져/절망 속에 자기 혀를 깨물 때까지.............(중략).....나는 네발로 기어 그대 앞으로 간다/그리고 그대의 은총 속에서 울부짖는다/마치 그대의 위대한 초록 시대 속으로 들어가듯이/

그리고 나는 내 오래된 절름발이 신,그대에게 기도한다/그대의 굴로 돌아가라고

번역된 시를 본다는 것은 낯선 이국 땅에서 처음 보는 문자로 된 도로 표지명을 보는 기분을 준다.시가 바닥을 구르며 울부짖는 소리가 외국시를 볼 때 나를 불편하게 만든다.시들은 그렇게 외친다. "네가 알고 있는 그런 느낌이 아니라고...그런 정서가 아니라구.." 모든 번역이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시의 번역은 정말로.

요즘 같은 겨울에 어울리는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의 마지막 구절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어데서 흰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어떻게 '내리고'가 아닌 '나리고'의 미묘함을 번역할 것인가..'어디서'가 아닌 '어데서'의 그 소박함을 잡아낼 것인가...어떻게 눈 덮인 오늘 밤을 '엉엉'이 아니라 '응앙응앙' 울릴 것인가..

절대적인 관점에서 말하자면 불가능하다.바스코 포파의 <절름발이 늑대에게 경의를>을 읽고 감탄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을 쿡쿡 찌르는 것을 찾을 수 있다면 그런 연유에서이다.이 책은 영역본을 토대로 만들어졌다.그것이 영어로 씌여졌던 세르비아어로 씌여졌던 둘 다 모르는 내게는 마찬가지 감정을 준다.

바스코 포파.그의 시는 친절하지 않다.초현실적인 상상력과 상징주의적 표현들이 늑대 부러진 이빨처럼 불편하다.첫번째 연작 시로 등장하는 <작은상자>다.

작은 상자는 젖니를 갖고 있다/그리고 짧은 길이와/좁은 넓이와 작은 공허/그 밖의 모든 것을 갖고 있다/작은 상자는 계속 자란다/한때 상자가 들어있던 벽장이/이제 상자 안에 들어와 있다...(중략)....이제 그 작은 상자 안에/축소된 전 세계가 있다/당신은 그것을 쉽게 주머니 안에 넣을 수도 있고/쉽게 훔칠 수도 쉽게 읽어버릴 수도 있다/

작은 상자를 조심하라...

이어지는 <작은상자의 죄수들>들 중 한 구절이다.

작은 상자를 열어라/우리는 상자의 바닥과 뚜껑과/열쇠 구멍과 열쇠에 키스한다/온 세상이 그대 안에 짓밣힌 채 누워 있다/세상은 자기 자신을 제외한/모든 것을 닮아 있다/그대의 맑은-하늘 어머니조차/이 사실을 더는 모르리.....

도대체 '작은 상자'란 무엇인가?  몇 가지 단어들이 차창 밖 사람들처럼 휙 스치고 지나간다.추천의 글에서 정현종 시인은 영국 시인 테드 휴즈의 <시란 무엇인가?>를 인용한다.그 책 앞머리에 <작은상자>를 '시'에 대한 메타포로 인용하고 있다고 한다.그렇다면 휴즈나 정현종 시인처럼 '작은 상자'는 정말 '시'의 비유이기만 할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시인들처럼 '작은 상자' 대신 '시'라는 말을 넣고 보면 그럴 듯 하게 들리는 것은 사실이다만...그런데 그것만이 아닐게다...

바스코 포파의 시선집에는 7편의 연작시가 실려있다.그 중에서 <흰조약돌>은 강한 시각적 인상을 남긴다.

그것은 머리도 팔다리도 없이/나타난다./호시탐탐 미친 맥박으로/시간의 뻔뻔스러 발걸음과 더불어/움직인다./정열적으로 모든 것을 껴안아/움켜쥔다.

달의 눈썹으로 미소 짓고 있는 하얗게 반들거리는 처녀시체.

이어지는 <조약돌의 심장>이라는 시다.앞의 시가 마지막 연에서 충격적인 수축의 강렬함을 남겼다면 이 시는 초현실주의적 영화기법을 이용한 이완과도 같다.수축과 이완이라는 다른 리듬을 갖고 있지만 서로 다른 색깔의 강렬함은 같다.이 두 시는 앞 뒷장 사이에 바로 붙어 있다.

그들은 돌의 심장을 열어보았다/심장 속에 뱀이 한마리/꿈도 없이 실타래처럼 잠들어 있었다/....(중략).....그들은 멀리서 쳐다보았다.뱀은 지평선을 돌아 제 몸을 감더니 계란처럼 지평선을 먹어버렸다.....(중략).....그들은 서로 쳐다보며 씩 웃었다/그들은 서로에게 윙크를 했다.

바스코 포파의 시선집은 낯선 경험과 낯선 시각으로 생각을 이끈다.이것은 일종의 환기다.환상을 통해 환상 너머와 대면하게 하는 방식이다.우리의 현존재 너머에 있는 그 무엇,또는 우리가 두고 온 오래된 기억 너머의 무엇이다.그것들을 환기 시키기 위해 자기증식을 넘어 자기를 포괄해버리는 작은 상자가 나온다.영원을 들여다 보는 조약돌이 등장한다.더러운 이빨을 드러내는 회색빛 늑대의 야생성도 그런 차원에서 경의의 대상이 된다.

포파의 시는 쉽지 않다.하지만 1월의 어느날 아침, 창문을 열었을 때 얼굴을 때리는 차가운 바람처럼 영혼의 통점들을 자극한다.자코메티의 조각품들과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떠올리게 하는 시들 몇 줄 적으며 끝낸다.

이제 우리 무엇을 하리/좋았어 .이제 우리는 저녁으로 골수를 먹으리/우린 점심으로 골수를 먹었지/텅 빈 느낌이 나의 내장을 괴롭히네/그러니 음악을 만들자고/우리는 음악을 좋아하잖아/개들이 오면 우린 무엇을 해야하지/개들은 뼈다귀를 좋아하잖아/우리는 개들의 목구멍에 걸려 음악을 사랑하리. ..... <태초 이후>

무슨 일인가/살이 눈 같은 살이/나에게 달라 붙는 것 같았어/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마치 골수가 내 속을 흘러 지나가는 것 같았어/뼛 속까지 시린 어떤 골수가/ 나도 모르겠어/모든 것이 다시 출발하는 것 같았어/어떤 무서운 시작과 함께

당신은 무엇인지 알까/당신이 짖을 수 있을까 ......   <달빛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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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8-01-18 23:38   좋아요 0 | URL
궁금증....
보통때처럼 알라딘 리뷰쓰기를 했는데...
첫 화면에는 분명 작성당시의 작은 글자로 보입니다.그런데 잠시 로딩이 끝나고 나서 완료화면 뜨면 한글문서 작업한 것처럼 12포인트 정도의 큰 글자로 보입니다.왜일까요? 예전에 한글로 작업하고 붙여넣기를 하면 그렇게 큰 포인트로 나오던데...
오늘은 그렇게 한 것도 아니거든요.
또한 해결방법은?

프레이야 2008-01-19 09:39   좋아요 0 | URL
'암스테르담'에 이어 이 책도 보관함으로 실어갑니다. 꾸벅^^
이 글자 크기가 읽기엔 좋으네요.

드팀전 2008-01-19 12:32   좋아요 0 | URL
^^...
오늘은 괜찮은데요..이상한것이 컴퓨터 세상이라니까요.
 
일리아스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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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해의 마지막 책을 고를 때는 망설이게 된다.마치 어물전에서 놓인 고등어를 고르며 이것 저것 들었다 놓았다 하는 것 처럼.올해 역시 다르지 않았다.쌓여 있는 책들 속에서 머뭇 머뭇 거리는 시간이 길어졌다.책들이 아우성이었다.마지막 구명정에 타려는 것 처럼 제 각각 자기가 승선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어이..시끄러워.' 귀를 막고 소리들을 떨쳐냈다.결국 삼 천년 가까이 묵직하게 앉은뱅이 의자에 앉아 있었을 <일리아스>를 마지막 구조자 명단에 올렸다.아킬레우스와 헥토르가 득의만만하게 킬킬 거렸다.

 올 연말은 무척이나 방학이 그립다.생각해보니 흔히 고전이라고 알려진 책들을 본 것은 주로 방학 때였다.<삼국지>,<수호지>,<사기>,<플루타크 영웅전>,<그리스 로마 신화>. 내가 처음으로 <일리아드/오딧세이>를 본 것도 겨울 방학 때였다.긴 시간이 지나 천병희 교수의 두꺼운 <일리아스>를 펼쳐드니 아무런 마음의 부담이 없었던 방학 때가 사무치게 그립다.쉬는 시간 학교 휴게실에서 사먹던 야채 호빵에 대한 그리움처럼 말이다.방학이 있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방학 때도 결코 만만치 않다고 말한다.내게는 엄살로 보인다.'우리 것만 좋은' 게 아니라 방학은 직장인들의 영원한 로망이다.법적으로 주어진 휴가도 눈치보며 써야하는 직장인들에게는 말이다.

 그리스 서사시는 결국 신과 영웅들의 이야기이다.사실 트로이 전쟁은 신들의 전쟁에 가깝다.신들이 두는 체스판의 말들처럼 영웅들이 울다 웃다 한다.그렇다고 인간이 아무런 숭고함이나 자유의지도 없이 목줄 매단 강어지 마냥 종속된 존재들만은 아니다.그들은 때로 신을 위협하기도 하고 운명에 초연하기도 하다.초연함이야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생의 모순의 인지부조화를 극복하는 최고의 방법 아니던가.여기에 등장하는 영웅들은 요즘의 시각으로 보자면 상투적 모습이다.조금 좋게 말하자면 부여된 역할에 대한 완전성이다.물론 이들도 실수를 하고 질투와 미망에 사로잡힌다.그거야 신들도 마찬가지다.그러나 필멸의 인간임에도 영웅들은 끝까지 영웅성이라는 고고함을 잃지 않는다.

주인공 아킬레우스만 보자.신으로부터 선택받은 이 인간은 오만방자 천하무적이다.그리스인이든 트로이인이든 그가 최강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이 인간은 아가멤논의 모욕에 완전히 삐쳐서 동족들의 죽음은 나몰라 한다.결국 불끈하고 창을 들고 일어서는 것도 파트로클로스라는 친구이자 시종의 부고를 듣고 난 다음이다. 아킬레우스의 사적 분노는 또 오바의 극치를 이루어 신들로 부터도 경계를 받는다.뛰어나지만 막무가내 같은 이 인간은 야수와 인간의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철학자 김상봉 교수는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에서 이를 인간이 가진 다양성을 총체적으로 완성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한다.아킬레우스의 극단적 성향은 또 하나의 인간에 대한 전범이 되는 것이다.

 아킬레우스를 비롯해서 <일리아스>에 나오는 거의 모든 영웅들은 죽음이라는 필멸의 운명 자체를 두려워 하지 않는다.아폴론에게 속은 감이 있지만 아킬레우스에게 죽임을 당하는 헥토르 역시 자신의 죽음을 앞에 두고도 두려워 하지 않는다.이들에게 운명은 거역할 수 없는 어떤 것이기에 그것이 예정에 따라 집행되길 기원할 뿐이다.때로는 운명의 여신은 선택지를 준다.예를 들어 아킬레우스는 운명을 선택할 수 있었다.그러나 그는 편안한 길 보다는 짧고 길이 남을 자신의 운명을 선택한다.결국 그것도 다 예정된 제 팔자일지 모른다.재미있는 것은 영웅들에게 정해져 있는 운명이라는 것이 신들 조차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데 있다.신들의 초월성을 넘는 운명이라는 것이다.그리스 서사시의 영웅들은 그 초월성 앞에서 운명을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고 의연하게 대처한다.김상봉 교수는 정신의 힘으로 죽음의 공포를 극복함으로써 죽음을 초월하는 영원한 가치에 닿는 것이라고 설명한다.사실 대개의 모든 영웅신화들과 최근의 영웅스토리 영화들까지 이와 유사한 정서를 담고 있다. <일리아스>는 모든 그것들의 원형이 되며 수 천년 전 그리스인들이 지향했던 신과 다르지 않은 인간 정신의 고고함을 담아내고 있다.

 <일리아스>의 가장 명장면은 사실 아킬레우스와 헥토르의 대결도 아니고 헥토르와 아이아스의 기사도 정신도 아니다.마지막에 있는 프리아모스 왕이 헥토르의 시신을 찾으러 간 장면이 첫 손에 꼽힐 만하다.

 언젠가 집에 갔을 때 아버지와 케이블 TV에서 하는 영화<트로이>를 보게 되었다.영화를 보시던 아버지가 그 장면에서 "야..저 왕이 진짜 멋있구만.."이라고 짧게 말씀하셨다.아마 대부분 그랬을 것이다.영화<트로이>에서는 명배우 피터 오툴이 세상의 가장 큰 비극을 겪은 프리아모스 왕 역 맡았다.이 장면은 영화에서는 그 과정이 짧게 그려진다.그러나 <일리아스>에서는 아킬레우스가 헥토르의 시신을 질질 끌고 다니는 장면에서 거대한 슬픔에 울부짖는 프리아모스의 모습이 묘사된다.그의 울음과 절규가 들리는 듯 하다.책에서는 헤르메스의 도움과 아킬레우스의 어머니 테티스 여신의 조언이 큰 역할을 한다.물론 영화<트로이>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영화 <트로이>와 <일리아스>의 가장 큰 차이점은 '신의 존재'와 '신의 부재'의 차이이다.영화에서의 '신의 부재'를 좋게 봐준다면 -또한 일리아스를 읽는 한 독법으로도 가능한-신의 존재가 인간들에게 내재된 것으로 이야기를 풀었다는 것이다.그리스 서사시의 신은 분명히 인간성의 한 측면으로서 읽힐 수 있기때문에 무리한 해석은 아닐것이다.단지 생태와 북어의 차이 같이 영화<트로이>와 서사시<일리아스>가 차이가 있다.(북어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생태의 싱싱함이 늘상 한 수 위다.)어쨋거나 트로이를 두고 양편으로 갈라서서 싸우는 신들의 모습을 만날 수 없으니 영화로서는 포기해야 했던 부분이 너무 많았을 것이다.(그런데 사실 내게 영화 <트로이>의 가장 큰 문제는 시각의 독재성 때문에 생긴 것이다.책을 읽다가 아킬레우스가 나오면 왜 금발의 브레드 피트가 떠오르고 파리스가 나오면 왜 올란도 볼룸이 들판을 뛰어다니냐 말이다.그 허튼 영상이 식탁 위를 찾아다니는 파리때처럼 잦아서 읽는 내내 힘들었다.)

프리아모스의 슬픔은 아킬레우스의 마음을 움직인다.우리는 삶의 여러 부문을 두고 갈등할 수 있으며 또한 폭력과 반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나는 '위선적인 공감' 보다는 '위악적인 갈등'이 훨씬 선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자가 무난하게 묻어가는 무임승차를 도모하는 반면 후자는 요즘은 부정되기도 하지만 변증법적인 결과물들을 낳아서 세상을 움직인다.'갈등'을 한센병 환자처럼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또한 늘상 통합과 화해를 강조할 필요도 없다.세상에는 함께 있을 수는 있으나 섞일 수 없는 것들이 있는 법이다.이를 '관용'과 '화해'의 정신으로 억지로 묶어 놓으려는 갸륵한 마음은 때로는 진실을 허위로 덮거나 폭력이 될 수 있다.오히려 더 중요한 것이 프리아모스와 아킬레우스의 공감과도 같은 신의 피조물로서의 '측은지심'이다.서로 적이 될 지언정 인간임을 망각하지 않는 야수가 아닌 '인간'의 마음 말이다.실제 있었던 이야기였는지 누가 꾸며낸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한국전쟁과 관련된 우화가 생각난다.

학도병으로 아들을 보낸 어머니가 있었다.어느 춥고 무서운 밤, 집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어머니가 두려워 하며 문틈으로 보니 거기에는 거지꼴을 하고 꽁꽁 얼어붙어 있는 북한군이 서있었다.그는 추위와 배고픔에 떨고 있는 낙오한 소년병이었다.어머니는 그를 두려워 하지 않고 따뜻한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했다.그리고 다음 날 그들을 쫓아온 군인들도 돌려보냈다.며칠을 쉰 다음 그 소년병은 본대를 찾아서 북으로 올라갔다.그는 어머니에게 어떻게 자신의 아들의 적일 수도 있는 나를 살려주고 진짜 어머니처럼 잘 대접해 주었느냐고 물었다.어머니는 처음에 무섭기도 하고 내 아들을 해코지하는 자들이라고 생각했지만 조금 있다 그 마음을 풀게 되었다고 말했다.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내 아들이 행여 자네처럼 북쪽 어딘가에서 낙오되어 추위와 배고픔에 떨고 있다면 내가 이렇게 자네에게 해준 것 처럼 자네의 부모나 또 아니면 그 누군가가 그렇게 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자네를 돌봤다네...조심해서 올라가게나" 라고 말이다.

 이것이 인간의 마음 아닌가? 다음 날 '적을 숨겨준 부역자' 라고 어머니를 끌고가서 고문하는 것은 무엇이될까?  (또 이렇게 이야기하면 '북한' 좋게 말한다고 하실 분이 있으니 그 반대도 마찬가지라는 점을 밝힌다.) 전쟁이기때문에 반인륜적인 학살도 명령에 의해 수행하는 것이 인간인가 저항권을 주장하며 불복하는것이 인간인가? 개인의 선택과 사회적 선택이 늘 같은 과정과 결과를 낳을 수는 없다.하지만 한 해를 마감하는 이 시점에 수 천 년 동안 수 억 만명의 마음을 움직였을 <일리아스>를 읽으며 먹고 사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도 도움도 되지 않는 그런 생각을 해본다.

추신> 한 해 동안 여러분 감사했습니다.제 날카로움에 베이신 분들께도 사과와 감사를 드리구요.좋은 글로 저를 1센티씩 키워주신 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또한 제가 물렁 물렁 해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던 제 주변을 둘러싸고 일어났던 사회적,역사적 상황들에게도 감사를 표합니다.강철이 단련되는 것은 모루 위에서라는 말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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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7-12-25 01:39   좋아요 0 | URL
올 한해 참 우울한 한해였던것 같네요. 특히나 그 피날레가...
하지만 절망은 희망을 위해 반드시 거칠수밖에 없는 통과의례이기도 하죠.
올 한해 정리 잘 하시고 내년에 희망을 가지며 우리 만나요.
(근데 방학이 나름 힘들다고 하는건 엄살 맞아요. ㅎㅎ 제게는 책을 그래도 맘껏 읽을 수 있고 여행도 갈 수 있고 아이들과도 많은 시간을 보낼수도 있는 황금같은 날인걸요. 이번 겨울에는 책 말고도 공부가 좀 더 필요할 것 같아 연수도 두가지나 신청해놓았는걸요. 우리나라 불화의 이해 하고 미술상담치료법 하고... 만만치는 않지만 이렇게 뭔가 새로운 공부를 할 수 있는것도 방학이니 방학이 있어 행복한거죠. 대한민국이 이런 인간다운 생활과 인간다움의 재충전을 위한 휴가라는 개념이 생기는 날이 오기는 할까요? 대한민국 모든 노동자가 최소 일년에 한달정도의 휴가는 자유롭게 가질 수 있는 그날이 올때까지 열심히 살고 열심히 싸워야죠... )

드팀전 2007-12-25 10:53   좋아요 0 | URL
대선때문에 그렇게 우울해할 필요까지야...오래전 부터 예상했던 거 잖아요.전 최소한 최장집 교수 말처럼 그것도 민주정치 체제하에서는 나올 수 있는 카드라고 생각해요.오히려 그걸 막겟다고 무리하게 달려들다가 더 민주적 가치들을 손상시킬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여당은 야당이 되어서 이제 견제의 정치를 잘 하시고 의석수 유지도 힘들어보이는 민노당은 절차탁마하면서 한국 정치가 돌이킬 수 없는 선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해야겠지요.
방학 잘 보내세요.

ghwngo 2008-01-30 08:43   좋아요 0 | URL
리뷰보다 추신이 더 멋있군요. 1센티의 성장 부분이요. ^^* 책 따라 처음 들어와본 블로그인데, 정말 읽을거리가 풍성해서 너무 좋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시구요.^^*
 
오이디푸스 왕 안티고네 외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1
소포클레스 외 지음, 천병희 옮김 / 문예출판사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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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장 인부들이 옹기 종기 모여있다.수명이 다한 나뭇가지를 드럼통에 담아 놓고 차가운 입김을 데운다.며칠 전까지만 해도 붉은 가을이었다.그러나 오늘 아침은 동장군의 척후병에게 일격을 당했다.TV 속에서 사람들이 종종 걸음을 치며 출근길을 서두른다.까치들 같다.삶을 위한 종종걸음이 안타깝기도 하면서 한편으로 숭고하기도 하다.누군가 그랬다.비오는 날 우산 속으로 숨어드는 사람들을 보면 인간이 뭐 별거 있다 싶어 가여워진다고..차가운 날씨에 코트 속으로 자라처럼 목을 움추린 어느 집 가장의 출근길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아버지가 그런 말씀을 하셨다.

"나는 운명을 믿지 않았다.젊은 날에는 더 그랬다.내가 무언가 하면 어떻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지금도 그 생각에 큰 변화는 없단다.그런데 이제 나이가 들어서 인지 내 삶을 돌아볼 나이가 되서 그런 것인지 요즘은 인간이 어쩔 수 없는 운명이란 것이 있다라는 생각이 든다.아무리 피해가려 해도 피할 수 없는 것.물론 자잘한 것들은 인간의 노력으로 어떻게 바꿀 수 있다지만 큰 그림까지는 손 대지 못하는 것 아닐까 하는"

나는 이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알지 못하는 아버지의 삶과 그리고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삶을 생각했다.그리고 나 역시 '운명' 이란 것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 것인지 고민했다.'운명'에 대해서 아마 아버지와 크게 다르지 않은 길을 택할 것이다.단지 차이가 있다면 조금 더 젊은 지금의 내가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 한 숟가락 더 힘을 싣고 있다는 정도 일 것이다.그렇다고 내가 무슨 '숙명론자'이거나 하지는 않는다.'숙명론'이란 것이 결국은 세계에 대한 패배의식으로 작용하는 보수적인 이데올로기로 작용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인간이 모든 것을 이해하고 그의 의지에 따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유아적인 환상일 뿐이다.중요한 것은 '운명'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 비극이 했던 것럼 '운명에 대한 태도'를 떠올려 보는 것이다.

우리들의 운명은 행복한 길도 놓아 줄 것이다.그러나 우리들의 마음자락을 부여잡고 있는 것은 언제나 '슬픔에 대한 운명'이다.정호승 시인이 "나는 다시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섰다 " 라고 노래한 것은 시인과 우리의 삶이 '슬픔의 도상'에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한다는 자기성찰이다.여기서 말하는 '슬픔'은 '부족'에서 오는 '슬픔'이 아니다.철학자 김상봉은 그리스 비극이 이야기하는 '존재론적 슬픔'과 대비하여 그런 슬픔을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그림자'라고 말한다.만약 그것이 슬픔의 정체라면 그런 슬픔을 문학의 이름으로 퍼뜨리는 것이 얼마나 혐오스러운 일인지 개탄하고 있다.

<오이디푸스왕,안티고네>를 제대로 읽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물론 줄거리 자체를 이야기하라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이 책을 보지 않고도 이미 줄거리들은 전부 알려져 있다.또 운문형태가 아닌 소설 형식으로 이 이야기들은 많이 보급되어 있다.아동판,청소년판 등등 해서 어린 아이들도 이 책을 읽는다.요즘은 그리스 신화의 인기때문에 아마 만화판도 나와 있지 않을까 싶다.결국 이 진부하지만 위대한 텍스트에서 무엇을 공감하고 끌어 낼 수 있는가 이 책 읽기의 요체이다.그 작업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피아노 음악 이야기를 잠깐 하면 좋을 듯 하다.

모차르트...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는 무척 아름답다.체르니 상급반 정도되면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들을 칠 수 있다.음표도 많지 않고 엄청난 기교를 요구하지도 않는다.동네 피아노 학원 담너머로도 들을 수 있는 곡이다.그런데 실제 연주가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모차르트야말로 연주하기 힘들다고 말한다.쉽지만 그것은 천상의 소리를 닮아 있기때문이다.어느 유명한 음악가가 말했다는 '질주하는 슬픔'을 잡아낸다는 것이 보통의 내공가지고는 쉽지 않다는 것이다.세계적인 피아니스트들이 말년이 되어 모차르트에 돌아가는 것은- 물론 그들의 늙은 몸이 고난도의 기교를 요구하는 낭만파 음악에 적당하지 않기도 하겠으나-그런 이유가 있기때문이다.그리스 비극을 읽는다는것은 모차르트를 듣는 것과 비슷하다.모차르트의 느린 악장같다.땅이 꺼지는 슬픔이지만 무너질 수 도 없는 그런 운명이 있다.

나는 <오이디푸스왕.안티고네>을 읽고 계속 마음이 먹먹하다.비극의 주인공들이 겪은 슬픔은 다른형태로 변주되어 우리들의 삶에도 눈물을 뿌리고 있다.자신의 완고함으로 자식을 읽은 크레온의 아픔은 유괴되어 살해당한 아들의 영결식장에서 '내가 허락하지 않았는데 너희들이..."라고 마지막 헤어짐을 허하지 못하는 아버지의 절규와 닮아 있다.살아 있는 모든 것들 중에서 가장 처참하게 무너지는 오이디푸스의 슬픔은 어떠한가.'눈물없이 볼 수 없는'이라는 통속적인 표현이 왜 통속적일 수 밖에 없는지 확인시켜주는 운명의 짖궂음 아닌가.

물론 아이스퀼로스와 소포클레스의 비극에 단지 운명과 인간의 존재론적 고민에 대해서만 말하지는 않는다.이들의 비극에는 공동체의 윤리와 개인의 윤리사이의 갈등,또 논쟁을 뜻하는 비극의 안틸로기아적인 주제들이 등장한다.그리스 비극의 사회적 의미와 질문들은 사실 지금 현재에도 적용할 수 있다.안티고네의 결정에 대해 지금의 우리들은 어떤 답을 줄 수 있을 것인가?

베트남에서 군인들은 민간인들을 대량학살했다.약탈,방화,강간 등등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섬멸작전을 수행했다.대개는 명령에 의한 것이어서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고 변명을 댓다.그러나 같은 공간에서도 그렇게 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있다.명령이라도 인간의 존중을 파괴하는 명령은 거부할 수 있다는 저항권의 개념을 알고 잇었던 사람들이다.아니 그건 이후에 알았다 하더라도 인간성이 우선한다는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던 사람들이다.물론 그들의 목소리는 작고 또 잊혀졌다.

크레온의 결정은 국가의 명령이고 안티고네의 저항은 인간성에 바탕을 둔 양심의 소리이다.당신은 언제나 당신의 양심의 소리륻 들을 수 있는가? 당신은 조직과 다수의 명령보다 당신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가? 그리스 비극은 묻고 있다.아주 많은 것들을...가슴은 여전히 먹먹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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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7-11-19 16:57   좋아요 0 | URL
비극은 너무 슬퍼요. 바보같은 소리 같지만, 비극 앞에 '운명'이란 말이 붙으면 정말 너무 슬프고 화나지 않나요.
그래도 안티고네의 목소리 같은 것이 있으니 희망이 있다...라고 할수 있을까요?

드팀전 2007-11-19 18:21   좋아요 0 | URL
슬퍼도 어쩔 것입니까..오는 것은 오게 마련이던데.인간이 할 수 있는것이 슬픔에 대한 자세밖에 없을때도 있지 않습니까..그게 비극이네요.
 
우리들의 하느님
권정생 지음 / 녹색평론사 / 1996년 12월
평점 :
절판


새로운 리뷰공간을 하나 만들어야 하는 건 아닐까 생각한다.타이틀은 <화장실에서 본 책들>이 좋을 듯 하다.아이와 와이프에게서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화장실이다.요즘은 그것도 매번 그렇지는 않다.뽈뽈뽈 기어다니는 아이가 화장실 반투명 유리창에 와서 드륵 드륵 긁어댄다.중요한 볼 일에 지장이 생긴다.

이 책을 화장실에서 펼치고 있을 때 권정생 선생은 돌아가셨다.훌륭하신 분을 화장실에 모시고 와서 한 켠에서 망자에 대한 모독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그러나 이내 권정생 선생의 글을 읽는 데 가장 좋은 곳이 화장실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주 당당하고 힘차게 읽어 내려갔다.(보던일도 잘 볼 수 있고 당당함은 역시 좋다.)권정생 선생이 아픈 몸을 부여잡고 쓴 불후의 명작 <강아지똥>을 생각해보면 나의 화장실론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다만 한가지 아쉬운 게 있다면 나의 응가를 똥개가 먹는게 아니라 정화조가 먹는다는 것이다.권선생님이 걱정했던 파리 하수도처럼 말이다.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그 맨홀들에 소중한 나의 응가들이 투척된다.그렇다면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가.바로 똥개다.(아 그 많던 똥개는 어디로 갔을까? where all the 똥개s have gone? 영어 쓸라니까 안된다.흐롱) 산책로에서 만나는 강아지들은 전부 인간화의 탈을 쓴 강아지이다.두렵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예쁘지도 않다.살이 피둥 피동 올라서 숨 쉬기도 힘들어보이는 시추부터 탱크탑을 입은 푸들까지..그러고 보니 다들 외국종이다.

<우리들의 하느님>에서 권정생 선생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으로서 현재 한국 기독교와 예수쟁이들을 꼬집는다.한마디로 정리하면 오강남 선생의 말처럼 '너희들이 믿는 그런 예수는 없다'라고 할 수 있다.권정생 선생이 믿는 예수는 세상의 모든 생명을 사랑하는 자,남을 위해 자신을 버리는 자,약한 사람들을 보듬는 자로서 예수이다.그런 예수는 매주 주변 교통을 지옥으로 만드는 대형교회에 있지 않다.또 교회 신축에 쓰라고 수 천만원을 희사하는 부자 교인들 사이에 있지 않다.남보다 우리 아들이 잘 돼기만을 바라는 어머니의 마음 속에 있지 않다.나와 내 가족만 잘먹고 잘살게 해달라는 곳에,입으로만 이웃이라고 외치는 장소에 예수를 갖다 놓은 것이 진짜 신성모독이다.이문재 시인은 '삶의 모델로서 예수를 존경할 뿐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나와 비슷한 생각이다.자신의 삶에 있어서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지도 그 의미의 본 뜻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기독교 목사입네 기독교 신자입네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퍼주기'란 말이 있다.배고파서 국경넘다가 죽어자빠지고 일부는 몸팔아서 자식 끼니를 때우는 북녘 이웃에게 도움을 주는 것을 표현하는 말이다.물론 정치적으로 복잡한 그물망이 얽혀있다.하지만 그것 때문에 한국의 기독교계가 이런 논리에 쉽게 동조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한국의 기독교는 국가주의,팽창주의,보수주의의 기게가 되어 있다.

(교회안에서) 목사: 예수께서 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신도들:아멘

(교회밖에서 조중동을 보다가) 목사,신도들 : 북한 정권때문이군.일단 어떻게 쓰일지 모르는데 퍼주면 안돼지.북한놈들은 하여간 믿을 수가 없어.

가끔 채널 돌리다 기독교TV에서 목사들이 침튀기며 강의하는 것을 본다.어찌나 유치한지.저걸 듣고 감동먹는게 이해가 안된다.그런데 목사님 말씀이라며 주워섬긴다.고개까지 끄덕이며..

'이승엽 선수가 잘하는 것..박지성 선수가 잘하는 것...우리 교회가 들불처럼 한반도에 퍼지는 것..다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아끼시고 선택하셔서....'

이걸 들으러 교회에 가야 한다면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시간에 귀를 썩여서 죄송한 일일뿐이다.

권정생 선생은 자연과 하나되는 인간 삶의 복원을 꿈꾼다.그 중심에는 농사일에 대한 애정이 담겨있다.농업이야 말로 하늘과 땅,그리고 인간 이렇게 삼자가 관계 맺는 공간이다.그러나 인간 세상이 산업화되면서 농업은 저기 뒤켠으로 밀린다.농부의 마음이 뒤로 밀려 간다는 것은 자연과 함께 숨쉬는 인간이 인간성으로 부터 소외된다는 뜻이다.(못되게 이야기하면..권정생 선생을 좋아한다며 농업 생존권을 앗아가는 한미FTA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있다면- 권정생 선생과 대치되는 길 위에 있는 사람이다.) 권정생 선생은 문득 문득 전근대시대의 농경사회를 그리워한다.이것은 분명 현실 지평에서 퇴행적이다.역사적으로 우리 사회가 아무리 문제가 많더라도 인정 많았던 농경사회문화로 돌아갈 수는 없다.그저 한 개인과 개인의 삶에 작은 변화를 이끌고 또 이런 작은 변화들을 도모하는 길에서 정신적인 구심점으로 작용할 수는 있을 것이다.과거를 돌아보며 현재 우리가 잃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일깨우려는 의도로 읽으면 될 듯 하다.

사람은 무엇을 알고 믿느냐 보다 어떻게 그걸 따랐느냐에 따라 후대에 평가를 받는다.여기에도 물론 제기할 수 있는 문제는 많다.하지만 권정생 선생은 낮은 자로서 낮은 곳에서 낮은 사람들과 함께 사셨다.그가 서있는 땅이 옳바랐고 그가 믿었던 하늘이 옳바랐고 그가 옳바랐다면 다른 차이쯤이야 어찌되던 상관이 없다.

대단한 사회적 명성을 누린 것도 아니고 돈과 명예가 높았던 것도 아니다.그럼에도 그 분이 돌아가신 후 그의 누옥에는 조문객이 이어진단다.그 분의 마음이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전수되었으면 한다.

강아지똥 처럼 사신 권정생 선생.. 지금쯤 민들레 홀씨가 되어 천지간을 여행 다니실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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