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뒷세이아 - 그리스어 원전 번역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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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이타카를 마음에 두라/네 목표는 그곳에 이르는 것이니/그러나 서두르지는 마라/ 비록 네 갈 길이 오래더라도/ 늙어져서 그 섬에 이르는 것이 더 나으니/ 길 위에서 너는 이미 풍요로워졌으니 이타가가 너를 풍요롭게 해 주길 기대하지 마라. .... 콘스탄티노 카바피의 시<이타카>중

카바피의 시는 <오뒷세이아>를 이야기하고 있으며 또 인생을 이야기하고 있다. 언젠가 이 시를 보고 <오뒷세이아>라는 텍스트의 안팎이 이야기하는 것을 이처럼 잘 함축한 시도 드물것이라고 생각했다. 트로이를 떠난 오뒷세우스가 이타케까지 돌아오는 데 20년이 걸렸다. 그리고 그 시간은 내가 <오뒷세이아>를 다시 발견한 시간과도 거의 비슷하다. 이젠 말하기도 쑥스러운 나의 10대 시절에 이 책은 '기이한 모험집'이었다. 그러나 먼 바다를 돌다가  나이 40 줄에 이르러 보니, 지난 시절 상상력을 붇돋우던 독성 강한 기담은 예전만큼 강한 자극을 주지는 않는다. 그 대신 남루해진 오뒷세우스에게서, 또는 신과 같은 오뒷세우스에게서 삶의 그림자가 끌고온 향기들을 맡게 된다. 오뒷세우스의 모험담이 흥미롭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그것은 오래 묵힌 밀주처럼 진득하다. 두 번의 <오뒷세이아> 사이에 나는 아들에서 아버지가 되었고,-그것도 두 아이의,- 젊은 시절의 고민들을 채 해결하지도 못하고 또 다른 시간이 만든 짐들만 어깨에 얹고 있다. 지난 시간이 가져다 준 서당개 생활에서 주워들은 풍월들, '길 너머를 그리워하다' 결국 '길 위에서 죽고 말것'이라는 평범한 깨우침 정도를 얻었을까. 

벤야민은 낯선거리에서 풍경의 원근법이 무너짐을 이야기한다. 거리감의 상실은 사물들을 2차원 도상 위로 올려놓기 때문에 쉽사리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낯선 도시에서 몇 개월 살아본 사람은 이런 경험을 이해할 것이다. 동서남북조차 모호하고 매일 가는 길인데도 무엇 하나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한 일주일 쯤 지나고 나면 비로서 사물들이 하나씩 독자적인 소리를 내고 한데 엉겨붙어 있던 사물들이 하나씩 자기 영토를 확인시켜준다. 같은 영화를 두번 이상 보면 이제 줄거리말고, 구성이나 음악,대사, 미장센들을 보게 되고 또 상징적 은유들을 찾아보게 된다. 그래서 사실 요즘은 새로운 책을 읽는 게 아니라 과거에 본 책들을 다시 한 번 더 읽을까 하는 생각도 문득 문득 든다.  

마흔에 읽은 <오뒷세이아>에서 가장 눈에 들어 온 것은 구성이다. 역자 해제에 의하면 <일리아스>,<오뒷세이아>는 '트로이 서사시권'의 8권 중  2번째,7번째 서사시에 해당한다. 하지만 다른 모든 시들을 앞도할 만큼의 분량과 내용이다. 그만큼 중요하며 흥미롭다는 반증이 될 것이다. 특히 이 서사시들은 구비전승 과정을 통해 내용적 풍부성이 확보된 것이 확실하다. 호메로스를 단일인물인지 집단의 총체적 인물이지 두고 논쟁이 있었다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 일것이다. 그 사실이 어떻든 간에 <오뒷세이아>의 구성이 가진 '압축성과 입체성'은 '시대의 연마'를 거쳐서 이룩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 23장에서 호메로스의 우수성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호메로스는 앞에서 말한 것을 되풀이하자면 이점에서 다른 시인들보다 월등히 뛰어났다. 그는 트로이 전쟁이 시작과 결말이 뚜렷이 존재하는 하나의 전체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다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그는 전체에서 한 부분만을 다루었으며 그 밖의 사건들은 그저 에피소드로 쓰고 있다." 

호메로스의 뛰어난 점은 바로 단일한 사건을 중심으로 한 압축성에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오뒷세이아>를 한 문장으로 말할 수 있는가?  생각보다 쉽다. '한 남자의 귀향이야기' 가 그것이다. 신의 미움을 받아 고생 고생하다가 집에 돌아왔으나 다른 남자들이 아내를 탐하고 집안을 거덜내고 있다. 계략을 짜서 이들을 처단한다. <오뒷세이아>가 이 내용이다. 물론 각자의 에피소드들이 기발한 상상력으로 뇌를 자극하고 인간의 운명과 고난에 맞서는 용기로 감동을 자아내고는 있지만 이 중심적인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런 드라마전개의 중심축에 탁월함을 부여하는 것이 구성의 입체성이 아닐까 싶다. 시간의 도치와 압축. 영화용어로 치자면 플래쉬백의 적극적 활용으로 극적인 탄력을 높이는 것이다. 

<오뒷세이아>는 크게 세부분으로 구성되었다고 보면 된다. 하나는 처음부터 4권까지 텔레마코스이야기, 5권부터 13권까지 오뒷세우스의 귀향이야기 그리고 이하 이타케에서의 복수극이다. 4권까지 '텔레마토스 이야기' 에서는 오뒷세우스의 아들이 주인공인데 이를 통해 전후 사정들을 소개하고,또 미래의 갈등을 미리 보여준다.물론 오뒷세우스는 이때 바닷가에 있을테니 이를 전혀 모른다. 5권부터 오뒷세우스가 등장하는데, 시작은 신들의 회의로부터다. 제우스가 칼립소로 부터 오뒷세이아를 풀어주기로 결정하는 과정이 나오는데 오뒷세우스를 방해하는 포세이돈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벌이진다.이 장에서는 모든 이야기가 명백히 3인칭 시점으로 서술되고 있다. 이 시점은 다음 장에서 바뀐다.  6권은 이타케를 앞둔 마지막 도착지인 파이아케스족의 나라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영화편집으로 보자면 텔라마코스의 씬과 거의 교차편집되는 장으로 거의 동시간대 벌어진 일어거나 조금 후에 일어난 장면인 셈이다. 이렇게 현재의 시간들을 교차하는 형태로 붙여놓으며 6권까지 현재 상태의 갈등요소들을 재현한다. 하나는 완성되지 못한 귀향, 그리고 고향에서 벌어지고 있는 난장판. 오뒷세우스만 모르지 독자들은 이미 신탁의 내용을 통해 그가 고생끝에 이타케에 도착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즉 독자들을 극의 파국 직접까지 도입부에서 끌고와서 긴장감을 높여놓는 것이다. 그게 뭐가 대단하냐고? 그렇다. 지금봐선 요즘 TV드라마에서 초보작가나 연출가들도 쓸 수 있는 구성이다. 그런데 이런 구성이 기원전 8세기에 만들어졌다면- 판본에 따라 차이가 있을 것이고 이런 형태로의 완성은 아마 더 후가 아니었을까 싶긴하지만- 이 작가를 우리가 평범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제 호메로스는 오뒷세우스의 귀향을 앞두고 다시 서사시를 거꾸로 돌려서 회고하는 방식으로 향하는 전환점을 만든다.  7권부터 시작되는 오뒷세우스의 고난들이 그 이야기이다.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오뒷세우스는 이타케에 도착한다. 후반부의 복수극이 시작되면서 페렐로페의 구혼자들에게 마지막 한방을 먹이기 위한 잠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후반부 '복수극'에서도 호메로스는 '지연의 효과'도 적극적으로사용한다. 마이클 티어노의 <스토리텔링의 비밀>에서는  알프레드 히치콕의 말을 이렇게 인용한다. 

 "영화 속에서 테이블 밑에 있는 폭탄이 갑자기 터진다면 좋은 영화가 아니다." 즉 갑자기 복수가 시작되고 문제가 해결되어 버리면 독자들이나 관객들은 멍해지는 것이다. 만약 오뒷세우스가 이타케에 도착해서 아이기스를 두른 아테네의 도움으로 일거에 구혼자들을 제거해버렸다면 어떻게 될까? <오뒷세이아>는 분명 반쪽 서사시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복수는 지연되어야 한다.'라는 말이 쉽게 이야될 것이다. 이런 '지연의 효과'를 위해서는 먼저 독자는 음모를 알지만 극중 인물들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어야한다. <오뒷세이아>에서는 텔레마코스와 오뒷세우스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복수의 준비'에 대해 까맣게 모르고 있다.  

구혼자들은 자신이 곧 죽게 될 것이라는 것도 모른 채 걸인으로 변한 오뒷세우스를 모욕하는 장면이 있다. 독자들은 '이런 바보같은 곧 죽게될 운명인데' 라고 연민과 함께 작중인물의 어리석음을 책하게 된다. 이게 무얼 의미하는가? 별거 아니다. 이미 텍스트에 깊이 빠져 버린 독자를 의미한다. 모욕의 정도가 높아질 수록 독자의 복수에 대한 쾌감은 비례한다. 그런데 이런 드라마작법은 인류학적인 공통 유산에서 나온 것 같다. (서사 구조라는 것 이야기다.)   

 우리의 전통 소설<춘향전> 또는 판소리<춘향가>를 떠올려 보자. 이몽룡이 과거 급제를 하고, 짐짓 거지 행세를 한다. 오뒷세우스도 아테네의 도움으로 걸인으로 변신한다. 오뒷세우스가 두 가지 목적으로 -하나는 누설 시 복수의 좌절 우려와 식솔들의 충성 여부 확인- 거짓 행세를 한 것 처럼 이몽룡은 '공무 집행'과 '춘향의 진정성'의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끝까지 자신의 신분을 숨긴다. 또한 오뒷세우스가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화살의 시험을 거치는 것 처럼 이몽룡은 '금준미주 천일혈'로 시작하는 시 한 소절로 마지막 한 방을 예비한다. 이런 복수의 전조 앞에 몇 몇 눈치빠른 이들은 줄행랑을 치며,어떤 이들은 그런 징후조차 부인하고 결국은 '이빨로 흙을 물게 된다'  

결국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오뒷세이아>는 오랜시간 사랑을 받을 수 있을 만한 완성된 구조를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오뒷세이아>의 주인공 오뒷세우스라는 인물에 대하야 이야기를 해보자. 그는 간계와 지혜가 아테네에 버금갈 만큼의 지략가이며 전사이다. <삼국지연의>의 여포나 장비가 아니라 주유 정도 되겠다. 아킬레우스를 트로이 전쟁에 불러들인 것도, 트로이 목마를 고안한 것도 그의 지혜이다.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에서 그의 첫번째 대사는 의미심장하여 눈여겨 볼만한다. 칼립소가 제우스의 명령을 받잡고 오뒷세우스를 풀어주겠다고 했을 때 그가 처음으로 뱉은 말이다. 

"여신이여! 그대는 나를 보내줄 생각이 아니라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게 분명하오."  

이게 무슨 뜻일까?   

 이 말에서 나는 오뒷세우스가 상징하는 알레고리의 가장 중요한 한 대목을 본다. 그것은 '의심'이다. '오뒷세우스는 의심하는 인간'이다. 물론 텍스트의 맥락 상 보면 '신들의 장기판'에서 놀아나던 인간이 신들의 장난질을 못믿는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오뒷세이아>에서 최초로 그가 뱉어낸 이 말은 '의심하는 인간'으로서의 신들의 세계를 의심하는, 그래서 결별하려는 '의심'으로 읽어내면 큰 울림을 갖는다. 

이렇게 <오뒷세이아>를 '탈신화화를 목표로 하는 계몽의 알레고리' 로 읽어낸 이들이 20세기 가장 음울한 책이라는 <계몽의 변증법>의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이다. 그들은 <오뒷세이아>를 '주체가 신화적 힘들로부터 도망쳐 나오는 도정" 이라고 말한다. 

오뒷세우스가 얼마나 주체적으로 영리한 지는 뗏목을 떠다닐 때 그를 불쌍히 여긴 레우코테아의 충고를 그대로 따르지 않고 창조적으로 변용하는데서도 보여진다. 그녀는 뗏목을 버리라고 말하는데 그는 다 듣고 나서 이렇게 말한다. 

"아아 괴롭구나! 그녀가 나더러 뗏목을 떠나라고 명령하니...나는 아직은 그 명령을 따르지 않을 거야. 나의 피난처가 될 것이라고 그녀가 말한 땅은 아직은 멀리서 볼 수밖에 없으니까"  

물론 오뒷세우스는 신들에 의탁한다. 그렇지만 그 자신의 지혜와 재능을 적절히 조합해내는 것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필연적 운명을 수용하고 거기에 이성이라는 능력을 통해 운명의 거센 풍파를 헤쳐나가는 것이다. 운명을 거부하지 않느며 운명에 맞서는 용기가 바로 그리스적 용기라는 것을 보여주는 듯 하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세이렌'과 관련된 우화를 통해 오뒷세우스의 '도구적 이성'과 자본 아래 '소외'되는 자본가와 노동자를 알레고리로 읽고 있는 유명한 글을 남긴다. 그들은 오뒷세우스로부터 '시민적 개인'의 탄생을 소급해서 읽어내는 것이다. 그들에 따르면 오뒷세우스는 생존의 본능을 위해 자연을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반복적 현상으로 인식하고 이를 인간의 이성적 능력으로 지배하려는 근대적 개인의 원형이 되는 것이다. 물론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목적은 이렇게 지배적인 '자기동일성'에 근거한 '근대적 이성'과 '도구적 이성'을 '반성'과 '성찰'을 통해 다시 계몽하려는 의도였다. 그들이 '계몽하지 않는 계몽'에서 무서운 폭력을 바라본것은 그들이 겪었던 나치의 정신을 근대적 이성이 언제라도 불러들일 수 있는 최종적 기점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오뒷세우스의 모험담은 초반부에 나오는 이야기다. 오뒷세우스가 포세이돈의 미움을 받게 되는 중요한 장면이기도 하다. 즉 오뒷세우스의 '하마르티아'(비극적 고통을 만들어내는 과오)인 셈이다. 이런 고통은 엄밀하게 말해서 개인의 잘잘못과는 무심하게 발생하곤 하는데 그리스인들은 그런 존재의 불가해적 운명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여간 어찌 어찌 하여 오뒷세우스의 전함들은 퀴클롭스들이 사는 섬에 도착한다. 그곳에는 거대한 퀴클롭스들이 양을 키우며 살고 있다. 오뒷세우는 외교적 방법을 택하다가 전우들을 잃는다. 우선 오뒷세우스는 크게 '참는다.'. 그리스의 중요한 덕목이라는 '절제' 를 여러번 다짐한다. 고통을 감내하기 위해 눈물을 참던 그마저도 전우를 잃어야한다는 대목에서 눈물을 머금지만 그래도 그는 '참는다'. 그리고 어떤 신의 도움도 받지 않고 기다림 속에서 나온 자기 지혜를 바탕으로 퀴클롭스에게 포도주를 먹인다. 폴리페모스가 묻는다. 

 "너는 자진하여 그것을 한잔 더 주고 네 이름을 말하라.".....오뒷세우스는 "내이름은 '아무도아니'요" 라고 답한다. 

비트겐슈타인의 말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언어는 사고를 위장한다. 의복의 외적 형식으로부터 그 바탕에 놓여 있는 사고의 형식을 추론하는 것은 그만큼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의복의 외적 형식은 몸의 형식을 드러내도록 의도된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목적을 위해서 의도된 것이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논고> 

오뒷세우스의 저 대답은 다른 퀴클롭스들로 하여금 그를 비존재화시켜버리는 위력을 발휘한다. 오뒷세우스의 '아무도아니요' 라는 대답은 단순한 기지라고 하기에는 거의 혁명적이다. 아도르노는 오뒷세우스의 여정이 '이성의 자기동일화'를 위한 과정이라고 했다. 그 안에는 이미 '랑그와 빠롤'의 자기 분리 마저도 포함하는 이성의 포용적 간특함이 들어있다. 삼류독자로서 나는 오뒷세우스의 대답이 중요한 정치적 파괴력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아무도 아니요'를 몇 년 전에 본 영화<브이 포 벤테터>의 마지막 장면과 연계시킬 때 쉽게 그려진다. 모든 이들이 '아무도 아닌' 것이 되는 순간-영화에서는 동일한 브이의 가면을 쓰고 광장에 나타난다-  거대한 퀴클롭스들을 무너뜨릴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상상이다. 오뒷세우스의 여행이 자극하는 상상은 종류도 다양하니 그 정도를 하나 더 추가한다고 고전의 바다가 넘치거나 범람하지는 않을게다. 정치적 해방의 가능성은 지난 시절의 강박적 회귀나 또는 찬란한 반짝임에 대한 자기 상찬에서 나오지는 않을 듯 하다. 그것은 그저 '내가 자청한 고난'이며 아무도 사랑하지 않은 자의 '뼈아픈 후회'일 뿐이다. 그날은 '사건'이라 할 만한 절박이라는 조건 속에서 '아무것도 아닌것' 에서 나올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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