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꼽 창비시선 286
문인수 지음 / 창비 / 200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다. 그렇다. 깃털같은 가벼움이며 진흙뻘 같은 육중함이다.  

 시는 아폴론의 눈길 피한 위대한 패잔병이다. 젊은 신의 눈길을 피한 시는 화살처럼 날카롭고 예리하다. 뜨겁다.성마르다. 그들은 성에 굶주린 전쟁터의 군인들 마냥 가슴에 대고 검붉은 인두를 꺼내든다. 불에 달군 인두다. 아니 아직 채 마르지 않은 이름모를 이의 피가 묻은 칼이다. 상처에 더 깊이 살을 밀어넣는다. 그것은 칼이다.또 살이다. 시는 남은 모든 육체성을 그대로 대상에 전한다. 그 때 우리는 잠시 고개를 들어 허공을 바라볼 수 밖에 없다. 불같은 고통이 빠져나갈 수 있는 시간을 기다릴 수 밖에 없다. '왼쪽 가슴 아래께'  온 깊은 통증은 여전히 쑤신다. 

문인수의 <배꼽>은 그렇다. 나는 작년에 이 시집을 여러번 펼쳐 읽었다. 하지만 리뷰를 쓸 수 있는 날까지 기다리다가 한 해를 훌쩍 넘겼다. 장마철에 읽은 시집을 다음해 장마가 시작되는 날 다시 편다. 아마 리뷰를 쓰지 못한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하나는 시를 읽는 내 능력의 부족함일 것이다. 시인의 꾹꾹 눌러쓴 언어적 제련에 비교될 수 밖에 없는 자괴감때문일 것이다. 하나는 개념어로 펼쳐낼 수 없는 시의 직접성 때문이다. 시나 아포리아를 다시 글로 옮길때 마다 느끼는 내가 느끼는 묘종의 불편함이 있다. 그것은 비재현의 문법을 가진 음악을 글로 옮길때 느끼는 것과 유사하다. 물론 언어의 옷이라도 걸치고 있는 시나 아포리아가 낫긴 하다만. 이런 것들에 리뷰를 쓴다거나, 언어의 힘을 빌어 정리를 하고 나면 정들었던 물건들을 재활용센터에 보낼때 느끼는 만족감과 허탈함 같은 것들이 동시에 떠오른다. '탁탁탁 정리 끝. ok. 다음' 

문인수의 <배꼽>은 정말 여러번 곱씹어 읽어도 아깝지 않을 시집이다. 볼 때 마다 허공 한 구석을 보게 만든다. 읽을 때 마다 새어나오지 못하는 가라진 음성을 들어야 한다.  

 뇌성마비 중증 지체.언어쟁애인 마흔 두살 라정식씨가 죽었다./자원봉사자 비장애인 그녀가 병원 영안실로 달려갔다.조문객이라곤 휠체어를 타고 온 망자의 남녀친구들 여남은 명뿐이다....(중략) 

떠먹여주는 사람 없으니 밥알이며 반찬, 국물이며 건더기가 온데 흩어지고 쏟아져 아수라장 난장판이다./ 그녀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이정은 씨가 그녀를 보고 한껏 반기며 물었다. 

#@$&*&.......? (선생님 저 욱을 때도 아주실 거죠?)/ 그녀는 더이상 참지 못하고 왈칵,울음보를 떠트렸다. $^&##@#%^%^&&(정식이 오빤 좋겠다. 죽어서-)   <이것이 날개다> p84-85

시인에게는 '잃어버린 세계'와 '폐허가 된 현재' 를 쇠사슬처럼 연결하고 있는 증표가 바로 '배꼽'이다. 배꼽이 없는 사람이 없듯이 우리 모두는 '얼룩말 가죽'같은 법원 앞 횡단보도를 아랑곳없이 건너는 '생사의 숱한 기로를 이제 흐릿하게 지우기도 하는' 모성의 세계가 있었다.  

저 할머니 이제/ 법이란 법 다 졸업한 '무법자'일까,신호등/빨간 불빛 따위 아랑곳없이/무인지경의 횡단보도에들어선다.까마득한/.....시꺼먼 길바닥이/문득 흰 젓 먹은 듯 고요하다. 풍금처럼 흐르는 모법이 있다.    <얼룩말 가죽> 중에서 p22-23  

모성의 세계, 우리가 잃어버린 세계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을 그의 어머니를 형상화한 <뻐꾸기 소리>,<조묵단전>등에 반복되어 나타난다. 개인적으로 몇 해전 돌아가진 할머니의 작은 은비녀를 기억하는 나는 아흔 일곱에 미장원에 가서 파머를 한 작가의 어머니와 그리고 한 세기를 짊어져온 잘라진 머리 칼 속의 비녀를 '탈골'이라고 더듬는 대목에서 정말 '헉'이란 소리가 나왔다...시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다.  

... 단단한 비녀! 아 (  )탈골이다. <조묵단전> 비녀뼈 p99 

 작가는 두고 온 세계에 대한 일종의 우수같은 것이 있다. 그리고 그가 고개를 돌려 눈길을 보내는 곳에는 '웅크리고 있는','흉가'가 된 세상이 있다.  

삼켜버리고 싶은 과거는 맛이 없다.대개/거칠고 쓴데,저기/들어가 웅크리는 슬픔은 또/누구인지.언제/ 둥근 종소리 날까,/ 그렇게 깊이 날고 전소되겠다/  <흉가> p30 

마을 뒤, 산 밑에 오래 버려진 송산서원에서/ 나는 폐허에게 묻는다.이쯤에서 그만/풀썩 무너지고 싶을까./ 이것저것 깨묻는다.  <송산서원에게 묻다> p102 

작가에게 두 세계가 같은 고향을 같고 있다는 것을 상징하는 단어가 '배꼽'이다. 어머니와 아들이 '배꼽'을 통해 연결되는 것이다. 땅에 사는 인간이라면 누구다 다 가지고 있는 '배꼽'. 사실 아이의 비릿한 탯줄을 자르기 전까지 나는 단 한번도 '배꼽'의 효용과 그 위대한 상징적 징표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았다. 내가 스무번은 넘게 읽었을 '배꼽'과 관련된 아이의 동화책에는 그 상징적 징표에 대해 아주 명료하게 정의한다. 대충 기억에 의존해서 말해보자면'배꼽'은 '우리가 알에서 태어나거나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의 표시'이며 '엄마와 아빠의 사랑의 증표'라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배꼽'을 만들거나, '배꼽'을 자르는 역할을 할 수는 있지만 연결의 시간을 후대와 갖지 못한 것은 모든 남성의 영원한 빈틈이다. (나는 나의 어머니와만 배꼽으로 연결될 뿐 나의 아들이나 딸과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위대한 여성이여!) 

외곽지 야산 버려진 집에/ 한 사내가 들어와 매일 출퇴근한다/전에 없던 길 한가닥이 무슨 탯줄처럼/꿈틀꿈틀 길게 뽑혀나온다// 그 어떤 절망에도 배꼽이 있구나/ 그 어떤 희망에도 말 걸지 않은 세월이 부지기수다/...... 사내는 아직 웅크린 한 채의 폐가다. <배꼽>p 47 

이제 어떤 해소가 남아 있는가? 세계는 그렇게 사랑으로부터 이미 멀길을 떠나왔고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저 폐허의 집뿐이다. 이것은 열혈 청년의 비판의 도마 위에 올라야 하는 허무주의인가 비관주의인가? 차라리 철지난 낭만주의와 저속한 낙관주의가 더 가식과 자기 기만,자기 협잡 은 아닐까? 작가는 '송산서원'처럼 '대답하지 않는다.'  

차들이 검은 비닐봉지 하나를 연신 치고/달아난다/ 비닐봉지는 힘없이 떳다 가라앉다 하면서/찢어질 듯 커다란 아가리를 벌리지만 도통/소리가 없다. 연속으로 들이닥치는 무서운 속력 앞에/뒤에,두둥실/ 왠 허공이 저리 너그러운지.   <비닐봉지>p26   

오랜 세월 그리 심하게/몸을 비틀고 구기고 흔들어 이제 비로소 빠져나왔다, 다/왔다, 싶은 모양이다.이 고요한 얼굴/ 일그러뜨리며 발버둥치며 가까스로 지금 막 펼친 안심/창공이다. <이것이 날개다> p85 

"오늘 아침엔 경운기 시동이 참 잘 걸리네요."/ "그래,기분이 좋구만."/ 별다른 뜻이 없어도 오래 아프게 된 말/ 송사에 답사. 상가엔 꼭 상복을 입은 이별장면,별사가 따로 있다. <경운기소리> p19 

지금은 쓸쓸한 춘궁, 그래도 봄날은 올 것이며/씹어먹어도 먹어도/굽은 등 떠밀며 또 봄날은 갈 것이다. <동백 씹는 남자> p87 

작가는  다시 묻는다. 존재의 한 파편을 언뜻 바라본 자로서 다시 한 번 자신에게 사람들에게 묻는다. 마치 최승호의 시<북어>를 연상시키는 <도다리>란 시다. 

대형 콘크리트 수조를 자세히 들여다 보니/ 아, 겨우 알겠다/ 흐린 물 아래 도다리란 놈들이 납작납작 붙은 게 아닌가/......당신의 비애라면 그러나/바닥을 치면서 당장,솟구칠 수 있겠느냐,있겠느냐  <도다리>p32 

문인수의 <배꼽>은 -상투적이지만- '절창'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은 시들이 '물 반 고기 반' 처럼 득실거린다. 독거노인의 모습을 그린<꼭지>, "죽는 거시 낫겄어야,참말로" 라는 '절창'으로 끝나는 '절창'을 담고 있는 <만금이 절창이다>, '극약 같이 짧은 시'만 쓴다는 서정춘 시인에 대한 시들.시끌벅적한 생명을 노래하는 <녹음>,<봄>등등....어느 하나 '탈골'시켜서는 안될 시들이 가득하다.  

한해 딱 한 권의 시집만 읽기로 작정한 이가 있다면 문인수의 <배꼽>은 목록에 들어가도 부족함이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