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씨 451 환상문학전집 12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박상준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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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씨 451>의 세계는 평화롭다. '평화롭다'는 것이 핵심이다.모두 행복하다. 이게 핵심이다. 이 둘은 동서양과 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이 가장 원하는 미래상이 아니던가. 여덞가지 어려움(불교에서 말하는 '팔고')의 세상 속에 고립무원으로 던져진 인간에게 '평화와 행복'만큼 간절한 것이 어디있겠는가? 그래서 <화씨 451>의 세상은 표면적으로 평화롭고 또 행복하다.  

그런데 

이 사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거기에 있다. 

"이 좋은 평화와 행복은 어디서 만들어지는가?" 라는 질문이 봉쇄되고 억압되는 한에서만 만들어지는 위선적인 평화와 행복이기 때문이다. 배부른 돼지는 용납되지만 배고픈 소크라테스는 권력에 의해 차단당한다. 의문을 갖는 행위, 다르게 생각하는 행위, 즉 철학하는 행위 자체를 아예 막는데 디스토피아적 세계의 묘미가 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질문하지 않는다.' 

방화수 몬태그에게 이웃집 사는 소녀 클라리세가 이런 말을 한다. 

"제가 질문을 하면 그냥 생각 없이 금방 대답을 하시고, 대답을 생각해 보려고 걸음을 멈추거나 하시진 않았거든요." 그리고 뭔가 어리벙벙해하는 그에게 사울이 바울되는(여기엔 이견이 있다.원래 두 이름을 동시에 썻다는) '사건' 이라 할 만한 질문을 던진다.  

 "아저씬  행복하세요?"  몬태그는 비로소 존재와 세계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원자화된 개인에서 타자에 대해,관계에 대해 비로소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는 <화씨 451>이 시작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회의의 거미줄 속에 있는 걸린 사람이된다. 방화-기계로서의 몬태그는 책 전체에서 보자면 그다지 길게 나오지 않는다. 그에게 존재에 대한 의심은 클라리세를 만나기 1년전 공원에서 만난 파버 노인과의 조우에서부터 내재해있었다. 클라리세를 만난 후 1년전 기억이 환기된 것은 그 안에 이미 회의의 씨앗이 자라고 있었다는 증거이며 소설의 흐름상  '방화-기계' 몬태그에 대해 그다지 길게 할애할 필요가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몬태그는 방화서에 배치된 로봇개(수배자 정보를 맹목적으로 쫓도록 만들어진 기계동물)에게 불편함을 느끼며 그 도구를 통해 '도구화된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유비한다. 

"우리들이 저놈(로봇개)에게 기억시켜 놓은 거라곤 그저 쫓고 사냥하고 죽이는 일뿐이지요. 저놈이 아는 게 그것뿐이라면 우리가 부끄러워 할 일입니다."  

 몬태그의 '흔들림'은 그래서 중요하다.이것은 일종의 '본원적 경험',즉 존재 자체를 근본적으로 흔드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몬태그를 직접적으로 변화시킨 일은 클라리세의 실종과 분서 과정에서 책과 함께 분신한 어느 노파와 관련된 사건이다. 이런 체험은 몬태그를 더 이상 주입된 세계에 머물 수 없게 만든다.  한나 아렌트식으로 이야기하자면 '무세계성'이 '사건'을 통해 '세계에 대한 자각'으로 변모한 것이다. 

 몬태그가 로봇개와의 유비를 통해 예시했듯이 <화씨451>의 세계는 '억압가설'에 토대를 두고 있다. 권력 집단 내지는 권력의 중심 같은 것은 소설 끝까지 드러나지 않는다. 푸코의 말처럼 권력은 그저 힘으로 관계속에 작용하고 있으며 어느 곳에나 임재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그런 권력의 말단 대리인은 소설 속 갈등의 구현을 위해 존재한다. 많은 것을 알고 있음직한 방화서장 비티이다. 그런데 비티라는 캐릭터는 상당히 많은 부분이 신비에 쌓여 있다. 내러티브적이라기 보다는 시적이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영화적이라기 보다는 연극적 인물로 더 적합하다. 비티와 몬태그의 대화 장면들은 마치 헤롤드 핀터의 희곡 속 상황같다. 그가 각색한 영화<추적>속의 마이클 케인과 주드로의 대화장면 같기도하다. 소설 속에서는 노련하며 냉소적인 비티가 늘 이긴다.  

 '물처럼 존재하는' 권력의 집행기구를 찾긴 힘들어도 소설 속에서 드러나는 억압 구조를 찾긴 그다지 어렵지 않다. 레이 브래드버리가 직조한 소설 속 세상은 가시적인 두 개의 억압 장치 안에서 작동한다. 이 뒤에 권력 기구가 숨어있다. 먼저 하나는 거대 외연을 싸고 있는 '전쟁의 공포'이다.('전쟁'은 디스토피아 세계의 감초다.) 푸코식으로 말하자면 '전쟁의 정치화' ,즉 전쟁이 늘 낮은 구름 위에서 일상을 장악하고 있는 곳이 <화씨451>의 세계이다. 폭격기가 수시로 굉음을 내며 하늘을 가르는 데도 도시 속 사람들은 무감각할 만큼 나른하다. 또다른 장치때문이다. 마치 아도르노의 문화산업론을 구현한 듯한 것이 브래드버리가 예견한 미래상이다. 입체 벽멱 TV와 난무하는 정보 속에서 사람들은 감각적인 쾌락 안에서만 살아갈 뿐이다. 인민의 아편 TV가 되시는 것이다.(브래드버리는 후기에 실린 인터뷰에서도 영화<물랭루즈>와 TV CF를 예로 들며 0.5초의 짧은 컷트의 자기장 속에 빨려 들어가는 수동적 대중들의 비존재성을 지적하고 있다. ) 몬태그의 부인인 밀드레드는 전형적인 TV피플로 등장한다. 그녀에게 세계는 TV와의 매개없이는 불가능하다. 현대문명에 비판적인 영화감독들이 좋아하는 60년대 도시 외곽의 중산층 부인처럼 무미건조한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 그녀다. 그러면서도 행복해하고 이어질 드라마의 귀추에 생의 행복을 투사하는 존재다. 하지만 그녀는 그다지 행복하지 않다. TV와 수면제를 빼놓고 그녀는 아무런 관계적 만족감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브래드버리는 소설 초반부터 수면제라는 소품을 통해 그녀가 누리고 있다는 만족감이 사실은 왜곡된 형태임을 보여준다.(진정 행복한 사람은 수면제를 먹지 않는다.!!)   

 <화씨 451>에서 브래드베리가 보여주는 미래 세계에 대한 상상력은 사실 50년전의 것이다 보니 올드패션하다. 또한 구성이나 인물들의 관계에서도 무언가 성긴 구멍들이 있다.사실 SF소설을 많이 본 것은 아니지만 스토리의 급진적 진행에 비해 얼개가 성긴 경우가 종종 있어보인다. 예를 들어 악역으로 등장하는 비티 서장의 경우 해박한 그의 이야기로 또 하나의 작품을 만들 수 있을 만한 캐릭터이다. 그런데 이 소설에는 그에 대한 전후 설명이 부족하다.( 연극 대본 작업에서 작가 역시 이부분을 다시 첨가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올드패션한 설정도 살펴보자. 작가의 상상력 역시 그 시대의 범주 안에서 움직인다는 것을 어느 정도는 인정해야만 한다. 핵전쟁이 등장하고 불로 책을 소각하고, 헬기가 수색하고 하는 장면들은 완벽한 미래상이라기 보다는 가까운 실현가능성이 있는 사실성에 바탕을 둔 상상적인 글쓰기이다. 66년 프랑소와 트뤼포가 만든 영화처럼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오래된 미래'같은 미래상이다. 스티븐 다라폰트감독이 <화씨 451>을 영화화한다고 하는데 각색 과정에서 미래세계를 그린다면 이와는 분명히 다를 것이다. 아마 하늘로 자동차가 날아다니고 소각 대상인 책은 종이 책에만 국한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이 소설의 가치를 떨어뜨리지는 않는다. 브래드버리의 <화씨 451>은  미래 세계를 그리고 있지만 사실은  우화적으로 현실을 그리고 있는 SF 소설의 거대한 지류와 합류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화씨451>에서 중요한 주제는 통제되는 미래상이라기 보다는 인류 역사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그런 전체주의적 질서와 통제 권력의 억압, 그리고 그에 따라 왜곡되는 인간성과 사회상의 측면이기 때문이다. 

물론 미래상에 대해서도 사실적인 의미에서 재미있는 요소들이 있다. 여러가지가 있지만 미디어에 대한 것을 좀 보자. 브래드베리는 '책의 소각'이 단지 물질적 소각만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즉 현재의 우리도 몬태그처럼 책을 물리적으로 태우고 있지는 않지만 '분서'행위를 하는 문화 속에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세익스피어의 <햄릿>을 한 장으로 요약 정리할 수 태도 , 그리고 그것을 바쁜 세상에, 알아야 할 것 많은 세상에 합리적이라고 믿는 태도,이 역시 '분서'와 같은 것이다.결국 책의 그 내밀함과 접촉하여 소통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브래드버리가 당대의 다이제스트식 출판문화를 꼬집고 싶었던 듯 하다. 이는 악역으로 나오는 비티 서장의 입을 통해 역설적으로 표현된다. 

" '햄릿에 대한 모든 정보를 제공해 드립니다.' 해서 보면 기껏해야 한 페이지 정도 설명해 놓은 게 다가 되었지. 그러면서 광고엔 이렇게 나오고, 이제 당신은 모든 고전들을 완전히 통달할 수 있습니다. 읽으십시오!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이 되십시오. 알겠나? 보육원을 나와서 대학을 들어갔다가는 다시 보육원으로 돌아가는 거네. 지난 5세기가 넘는 기간 동안 사람들의 지적인 문화형태라는 건 그런 식어었네"   

반대로 TV는의 향응이다. 통제권력의 이데올로기적 장치구실을 하고 있다. 소설에서 보여지는 TV 프로그램은 크게 쌍방향 소통형 프로그램과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다. (조지 오웰의 <1984> 버전 텔레비젼보다 진일보한 형태라고 할까?) 하나는 린디와 이웃 집 여인들을 꼼짝달싹 못하게 만드는 프로그램인데, 대략 추측컨데 시청자의 피드백이 반영되는 드라마 같은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런 상상은 50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도 브래드버리의 상상력만큼 구현되지는 않았지만 그런 TV 실험들과 징후들은 한 두가지씨 보이곤 한다. 리얼리티 쇼는 몬태그의 추격씬을 생중계하는 방식으로 구현된다. 마치 영화<트로먼쇼>의 야생버전처럼 어떤 에피소드 하나 정도를 생중계하는 방식은 요즘 기술로도 가능하다. 한때 미국에서 바람난 남편부인잡는 프로그램이 인기가 있었던 적이 있다. 

브래드베리는 전쟁을 통한 디스토피아의 전체적인 붕괴를 새로운 희망의 전제조건으로 그린다. 지배집단에 대한 대중적 저항의 가능성 자체가 미비한 상황 속에서 전면적 파괴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어보인다. 마치 나치 독일의 철저한 패망 이후 재건이 가능했던 것 처럼 말이다. 이것 역시 브래드버리가 가진 한계의 한 측면이 될 것이다. 브래드버리가 새로운 미래의 맹아로 그린 '북피플들'은 제 때에 저항하지 못한 지식인들이 주류다. 그들에게는 후회와 미래에 대한 가능성만이 잔존할 뿐인다. 그런면에서 그들은 '분서'의 공모자는 아니어도 협조자들인 셈이다. 지식인 파버의 자탄에서도 드러나듯이 '시대의 후퇴'를 방관했던 업은 결국 그들에게도 돌아왔다. 브래드버리의 혜안 중에 뛰어난 점은 권력과 이 들이 서로를 간섭하지 않으며 병존하려 했다는 점에 있다. 권력의 입장에서는 완전한 발본색원 자체는 애초 불가능하기 때문에 파편화된 개인으로 존치시키는 편이 나았고 실기한 지식인 그룹들은 양팔을 잃은 장수처럼 소수의 유목민이 되어 세대 유전을 통한 지식의 전수만을 먼 미래를 위해 남겨둘 수 밖에 없는 수동적 존재로 남게 되었다. (어떤 중핵만 건드리지 않는 다면 무엇과도 공존할 수 있는...') 지식인 파버와 방화수 몬태그의 저항을 위한 대화는 통속적이긴 하지만 '지식인-대중'의 상호관계에 대한 브래드버리식의 비유다. 몬태그식의 '이성없는' 급진적 행동주의가 갖는 위험과 '행동없는' 관조적 이성주의가 갖는 문제를 거의 대놓고 보여준다. 물론 브래드버리식의 상호작용을 통한 변증법적 타협의 길도 슬쩍 흘린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대놓고... 그렇다고 사회주의 소설처럼 구호조로 꺼내지는 않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미국적 세련됨이라고 해야하나..

<화씨451>은 '분서'에 대한 이야기지만 사실 '분서될 수 없는' 책의 위대함에 대한 예찬이다. 우리에게 도서관만 있다면 다시 인류 문명을 세울 수 있다는 말처럼 인류의 위대한 지적 전통에 대한 브래드버리의 숨은 애정이 배어있다. 물론 인류는 도서관에 다 적혀있어도 같은 실수를 여러차레 반복할테지만 말이다. 다시 영화화가 곧 된다고 하니 수 년 안에 스크린으로 만나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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