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 환상문학전집 11
필립 K. 딕 지음, 이선주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12월
평점 :
품절


봄비가 장맛비처럼 내린 하루다.  

2019년 지구에도 매일 비가 내린다. 일본 신주쿠의 어느 거리처럼 보이는 '천사의 도시' LA는 오래된 고철의 도시다. 빗방울에 오래된 녹이 묻어내릴 것 같다. 리틀리 스콧 감독의 영화<블레이드 런너>에 대한 이야기다. 



워쇼츠키감독의 <매트릭스>가 나오기 이전까지 SF팬들이 가장 사랑하는 영화 중에 한편이 바로 <블레이드러너>였다. 이 영화의 원작이 바로 그 유명한 필립 K 딕의 소설<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이다. 영화와 소설은 전체적인 스토리라인에서는 유사한 부분들이 있지만 결코 같지 않다. 원작자 필립 K 딕의 상상력도 뛰어나지만 거기에 새로운 옷을 입혀 원작을 뛰어넘는 제2의 작품을 만들어낸 리틀리 스콧 감독의 능력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행여 이 작품을 아직 못본 젊은 세대가 있다면 찾아서 봤으면 한다.) 필립 K딕의 원작과 리틀리 스콧 감독의 영화를 단순 비교하면 무엇이 더 낫다고 말하기 힘들 정도다. 원작에 없는 내용과 설정들이 새로 영화에 등장하고 또 원작에서 매우 중요한 장면들이 영화에서는 삭제된다. 예를 들어 영화<블레이드러너>에서 가장 멋진 룻거 하우거와 해리슨 포드의 마지막 옥상씬은 소설에 없다. 오늘처럼 비가 내리는 날이다. 4년이란 운명을 다 채운 리플리컨트 로이는 영화사에 길이 남을 마지막 대사를 빗물 속에 남긴다.  

"난 당신들,인간들은 믿지 못할 것을 보아왔어. 오리온좌 곁에서 불타던 전함, 탄호이저 게이트 근처에서 어둠 속을 가로지르는 C-빔의 불빛들도 보았지. 모든 순간들은 시간 속에서 사라지겠지. 빗 속의 내 눈물처럼..... 이제 가야할 시간이야."  

이런 장면은 리틀리 스콧감독의 독창적인 것이다. 원작에서 안드로이드 로이는 영화의 영웅적 애수를 닮은 죽음을 선보이지 않는다. 영화의 죽음이 그리스 영웅의 죽음을 연상시킨다면 원작에서 그 죽음은 오히려 아킬레우스의 칼에 몸을 베인 이름 없는 트로이 병사처럼 처리된다. 

"릭은 로이 배티를 쏘앗다. 총을 맞자 키 큰 로이 배티의 사체가 철쩍 날 듯이 뛰더니 바닥으로 떨어졌고, 잘 깨지는 재질의 부품을 잔뜩 모아 만든 것 같은 그의 몸이 와르르 부서져 내렸다" 

이 장면만 보면 영화가 물론 더 흥미롭다. 그렇기 때문에 필립 K 딕의 원작은 별 볼일 없는 것일까? 절대 그렇지가 않다. 주제의식에 대한 집중방식과 형상화의 유형이 다를 뿐이다. 영화는 "인간이란 무엇인가?"의 문제를 추격당하는 리플리컨트의 행위를 통해 직접적으로  질문하고 있다면 소설은 이 문제를 추격자이자 주인공인 데커드라는 대상을 통해 끈덕지게 성찰하고 있다. 소설 속에 마지막 명장면이 없다면 대신 안드로이드 갈란드를 은퇴시키고 나서 벌어지는 사냥꾼 필 레시와 데커드의 장면이 있다. 매우 흥미로우며 철학적인 질문들을 담고 있는 장면들인데 영화 속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일시적 협조관계에 있는 필 레시와 데커드는 상대방도 자기도 안드로이드일지 모른다는 불신 속에 인간/안드로이드에 대한 정체성 질문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둘은 모두 기억이 조작된 안드로이드들은 자기가 안드로이드인지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는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안드로이드라면 처형에 있어서도 사무적이리 무감각한 데커드는 오히려 안드로이드의 특징을 갖고 있는 것 아닌가? 안드로이드는 영혼을 가지고 있는가? 기계에 지나지 않는 안드로이드에게 감정이입을 할 수 있을까? 기계에 부분적으로 감정이입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인간적인 특징이 아닌가? 이 장면에서는 안드로이드에 대한 정체성 뿐 만이 아니라 주인공인 인간 데커드의 정체성마저도 균열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한다.    


 

영화와 소설의 차이점은 이외에도 여럿 등장한다. 소설 속에 중요한 장치인 '머서주의'나 '전기동물'같은 것들은 아예 영화 속에 언급되지 않는다. 필립 K딕은 인간/비인간의 정체성부터 시작해서 궁극적으로는 그 질문을 '생명', '생' 과 같은 범주까지 끌고 가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데커드가 안드로이드를 처지하고 도달한 지점은 결국 '생'이라는 주제였다. 일종의 '생의 유일성'과 '생명의 불꽃'에 대한 범신론적 깨달음같은 것이다. 영화에서도 그 문제를 궁극적으로 유인해내기는 하지만 소설에 비해서 슬쩍 묻힌다. 리틀리 스콧의 영화 마지막은 몇 가지 버전이 있는데 디렉터스 컷의 경우 리플리컨드 레이첼과 데커드가 함께 달아나는 씬으로 이루어진다. 물론 레이첼도 도망한 리플리컨트이기 때문에 추격당해야하는 신세이다. 하지만 경찰서 소속의 가프는 선물이라도 되는 듯이 그녀를 놓아준다. 가프의 은빛학이 그녀의 아파트앞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결국 도망치더라도 그 끝은 '죽음'이다. 물론 영화에서는 또다른 질문이 중요한 토론 쟁점이 되기도 했다. 데커드는 안드로이드인가? 라는 점말이다. 리틀리 스콧은 열린 대답을 내놓았지만 리플리컨트쪽에 힘을 싣는 인터뷰를 했었다. 인간이든 리플리컨트든 결국 시간의 차이가 존재할 뿐 '죽음'이라는 것을 피해 갈 수 없다. 결국 소설이나 영화는 공히 '죽음' 이라는 것을 통해 '생'의 정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즉 죽는 모든 것은 '생'이다. 그것이 인간이든 안드로이드든 두꺼비든. 하지만 죽지 않는것. 영원한 생명은 이미 '생명'이 아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가장 비인간적이며 비자연적이다. 영원한 생명만큼 영원한 악몽도 없을 것이다. 

영화말고 소설 속에 나오는 몇 가지 아이디어들은 사회적인 의미로 읽히기도 한다. 예를 들어 2021년(소설은 2021년 1월 3일 하루동안 일어난 일이다.) 지구는 디스토피아적이다. 미래사회는 배제를 중심으로 한 인간종의 구분이 이루어진 인종주의적 사회다. 이것은 피부색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지구는 핵전쟁의 낙진으로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되었다. 필립 K딕이 이 소설을 쓴 시점은 1960년대 후반이다. 혁명의 시대이자 또 핵공포의 시대였다. 인류는 이제 4부류로 구분된다. 화성이라는 식민지 개척을 위해 지구를 떠난 사람들,  지구에 남겨진 자들, 그리고 그 중에 낙진피해가 심해져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버린 '특수자'들, 그리고 인간은 아니지만 노예인 안드로이드. 화성은 지구를 버리고 지구인은 특수자를 배제한다. 그리고 인간은 안드로이드를 부품으로만 취급한다. 전통적인 의미의 계급적 메타포처럼 보이는 설정이다. 

필립 K딕의 원작에는 시대적인 그림자가 묻이 있는데, 앞서 말한 핵전쟁의 공포같은 것이 1차적이다. 그와 함께 지금의 작가라면 전혀 다르게 그렸을 문제들이 자본의 문제들이 이 소설에서는 시대적 한계로 드러난다. 필립 K 딕의 시대는 일종의 '정치의 시대'였다. 사회의 여러 힘들이 쟁투를 벌이고 있었고 그것의 타도대상이든 조절대상이든 공적인 권력에 대한 가능성이 결코 포기되지 않았던 시대이다. 최소한 그 시대에 자본은 아직 사회적 권력이나 정치권력에 복속되거나 아니면 최소한 조절의 대상이 되던 시절이다. 이 소설에서는 거대자본으로 안드로이드를 만드는 로젠연합이 등장한다. 이 기업의 기술력은 인간과 구별이 거의 불가능한 안드로이드를 만드는 곳이다. 당연히 우주식민지 건설에 있어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곳이다. 그런데 이 곳에서 만든 넥서스 6가 문제가 생겼다. 일종의 하자가 생긴건데 이렇게 되면 넥서스 6의 기술은 폐기되게 된다. 기업 입장에서 막대한 피해이자 식민지 건설에서도 거대한 피해를 보게된다. 그런데 그 기술이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를 파악하러 경찰서 소속 프리랜스 인간사냥꾼 데커드가 달랑 기계 하나 들고 찾아간다. 경찰서장도 넌지시 이 방문의 의미를 이야기하긴 하지만 여전히 단일한 공권력이 이런 전지구적 자본을 견제할 수 있다는 믿음같은 것이 깔려있다. 이런 것을 빼놓고도 데커드 혼자 로젠연합이라는 거대기업에 대응하는 방식은 어쨋거나 개연성이 너무 떨어지는 설정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몇 몇 장치들, 머서주의나 감정이입기 같은 것은 물론 SF적인 상상력이기는 하지만 마치  '이데아와 시뮬라르크'가 미래세계를 배경으로 결합된 것과도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머서주의라는 것이 결국은 TV 화면앞의 장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데커드는 머서와 오히려 합일을 시도한다.이 기계는 인류의 총체적 소통기계인 셈이다. 자기의 경험과 타자의 경험이 감정이입기와 머서를 통해 이루어진다. 우리에게 자율적이라는 감정마저도 조절되고 관리될 수 있는 사회인 것이다. 이런 식의 전개는 디스토피아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1984'식의 통제사회의 다른 버전이다. 비릿한 소통이며 파국적인 소통의 가능성에 대한 형상화이다. 거기에는 일종의 네크로필리아적인 욕망이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Mors certa , vita incerta 

...이 책에서 싫었던 거...너무 친절하게 주인공의 반응과 심리를 '작은 따옴표'로 설명해주려는 장르적인 서술 의지...마지막에 와서 사건을 종결을 위해 기아 변속을 과감히 한 것..책 좀 더 두꺼워지면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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