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리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권택영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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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미성숙이 나를 왜 매혹하는가, 그것은 순수하고 젊고 금지된 요정의 아름다움이 주는 명쾌함 때문이라기보다 많은 것이 약속되지만 거의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음으로 인해 생기는 틈새를 무한한 완전성들이 메꾸어준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안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코 가질 수 없는 분홍 잿빛의 위대함이여.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롤리타> (p 359-360)  

나보코프, 흐흐흐, 당신은 정말 웃긴 사람이야. 내가 만약 단 한 단어로 당신을 타임캡슐 속에 봉인해야 한다면 나는 당신을 그런 기억으로 담아 둘 것 같다. 물론 웃긴다는 말은 여러가지 의미가 있지. 재미있다는 뜻일 수도 있고, '나 원 별것도 아닌게' 하는 식의 싸늘한 미소일 수도 있어. 하지만 당신이 만드는 그것은 이항적인 구분으로는 설명할 수 없어. 그래서 마치 3월 봄바람과도 같아. 3월의 봄바람을 아나? 그것은 따뜻한가?  그렇다면 차가운가? .아니. 어느 것에도 해당하지 않아. 그냥 3월의 봄바람만큼의 웃음이지. 당신이 만드는 웃음은 어느 초등학교 교실의 한 장면을 떠오르게 해. 선생님이 칠판에 무언가 잔뜩 쓰고 아이들에게 질문을 하지. 한 아이가 자신있게 손을 들어, 그런데  소년은 순간적으로 어떤 의심이 들었나봐. 그 의심은 올라가려던 팔을 무의식적으로 잡아당기지.그래서 엄마가 새로 준 점퍼의 팔굽있는 부분이 제대로 펴지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접히지. 당신이 그래. 나는 그 어쩡쩡한 점퍼의 주름과 양눈가에 자신감과 의혹 사이를 진자운동하는 아이의 눈망울을 보듯 당신이 만든 웃음을 바라본다. 당신의 문장안에는 정말 다양한 종류의 웃음이 담겨있어. 미학적이게 웃긴다고 하면 그건 분명 당신의 문장을 두고 하는 말일게야. 물론 당신이 만든 험버트도 아주 흥겹지. 사랑에 조바심난 노친네, 롤리타의 젊은친구들까지 견제하느라 얼마나 애간장이 타겠어. 그리고 또 미성년자 약취유인범과도 변별점을 찾으며 롤리타와 그걸 하려고 하니 얼마나 애써야했겠어. 흐흐흐(아.. 늑대같은 웃음은 아니야? 나는 미성숙한  여자애들은 좋아하지 않아. 애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말이야..) 

어쨋거나 당신이 웃긴건 사실이고,이건 당신을 저평가하는 말은 결코 아니야. 솔직히 고백하건데 나는 뒤늦게 당신을 만났지만 당신에게 완전히 넘어가고 말았어. 지난 해에 헌책방에서 우연히 발견하고 기뻐한,당신이 이국의 언어로 쓴 첫번째 소설 <어느 망명작가의 참인생>과 당신의 자서전인 <말하라 기억이여>도 한달음에 읽고 싶어졌어. 물론 조금 시간은 필요할 거야. 오뉴월에 바람난 개처럼 이것 저것 들추고 싶은 것들이 많아서 그렇지. 내 이런 습성도 좀 고쳐질만도 한데 나이가 들어도 결코 바뀌지가 않는다. 하지만 내일 모레까지 논문을 내야하는 것도 아니고 이번주말까지 맡은부분의 발제를 해야하는 것도 아니니 뭐가 어떻겠어?  봄바람의 향기가 더 짙어질때 당신을 다시 펴보던 코 끝에 입김이 어는 시절에 당신을 다시 집어들던...아무도 개의치 않을텐데. 흐흐. 나는 가끔 책을 읽을때 가장 '자유'로와져서 보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해. 당신이 글을 쓸 때 그랬을 것 처럼 말이지. 

당신의 소설은 묘한 아이러니에 처해졌어. 당신은 '예술은 예술일 뿐'인 사람이잖아. 그런데 당신의 명성을 알린 책<롤리타>는 이제 미디어적인 용어가 되어 버렸어. 어린이 성범죄와 관련된 기사에는 그래서 가끔 당신의 이름이 오르기도 해. 부고기사들 사이에서 오타난 상주의 이름을 보는 것 같지. 흐흐흐. 당신의 <롤리타>는 말이지. 대중들 사이에서 '도덕주의' 법정에 소환된 피고의 모습이었나봐. 물론 초기에 비평들에서 역시 이 부분은 문제가 되었다더군. 당신의 이 작품은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그 때도 수입이 되니 마니, 어디까지가 삭제되었니 무삭제판이니 하는 말이 있었다니까. 물론 당신에게도 책임이 있긴 하지. 사실 강한 주제잖아. 그리고 또 당신의 표현수위도 말이지. 어린 의붓딸에 빠진 홀아비 '험버트 험버트' - 당신은 그를 여러형태로 불러, 나는 그가 스스로를 이렇게 부를 때가 가장 좋아-의 사랑과 관능, 그리고 절제와 욕망 사이의 팽팽한 긴장들을 도대체 어느 누가 당신처렴 표현할 수 있겠어. 당신의 문장 한 줄 한 줄을 큰 소리로 읽고 싶을 정도야. 만약 사랑의 대상이 반인륜적이라는 부분을 제체놓고 본다면 당신은 최고의 연애술사야. 선수란 말이지. 거기에 선수들의 허당짓들까지도 짐짓 아닌척 하면서 슬슬 풀어내는 것까지 더하면 당신은 진짜 프로야. 거기에 보는 이들을 좀 가지고 놀기도 하지. 마치 장날의 약장수가 사설을 풀면서 쪼르르 앉아 있는 아이들을 들었다 놨다 하는 것 처럼 말이지. 인정해야겠군. 나야 말로 당신이란 약장사에 정신줄 놓고 따라가다 해지는 줄 몰랐던 그 꼬맹이라고 말이지.  

물론 당신의 소설에는 천안삼거리 능수버들의 흥겨움과 구절양장 꼬부랑길을 걷는 재미만 있는 것은 아니야. 당신의 <롤리타>는 말이지...음...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말하자면 험버트만큼이나 지적이지. 소설이 시작하면 당신의 험버트는 이미 관상동맥 혈전증으로 죽어있어. 그리고 롤리타- 빌어먹을, 리처드 실러부인이라며...나중에 알았잖아. 당신은 하여간 늘 이런식이지만-도 딴나라사람되어 버린 거지. 당신은 험버트가 남긴 장문의 배심원 증언록으로 이야기를 시작하지? 최소한 사형은 스스로도 너무 과다하다고 믿는 지적인 구대륙의 이 용열한 백인의 자기변명서말이지. 모르지. 지적이며 상냥하고 예의를 아는 신사였으니 유럽식 자존심으로 진실만을 이야기할지도...당신은 군데 군데 당신이 만든 퍼즐을 풀어갈 조각들을 숨겨놓지. 나는 사실 처음부터 당신이 그런 게임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 그래서 까치가 날아가며서 떨어뜨린 감처럼 등장하는 험버트와 롤리타 주변 인물들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지. 물론 그렇다고 당신이 떨어뜨려 놓은 모든 흔적들을 다 수렴해서 하나로 꿰지는 못했어. 이게 무슨 범인 밝히는 추리소설도 아니잖아. 흐흐흐  하여간 당신이 복수의 일념으로 퀼티를 만난 것은 잘한 일이야. 당신의 복수장면은 아주 그럴싸했어. 왠지 내게 그 장면을 영화로 만들라면 '뮤지컬' 처럼 해보고 싶더군. 팀버튼 식의 세트나 의상으로 무대설정을 하고 말이지. 조금 시기는 빠르지만 로버트 레드포드의 <위대한 개츠비>같은 분위기로 당신과 롤리타의 이야기를 풀어가다가 퀄티와의 대면장면에서 갑자기 <가위손>이 되버리면 어떻게 될까? 영화는 박살나고 평론가들의 몰매를 맞겠지만 '허...' 하는 바람빠지는 웃음을 만드는데는 공헌을 할꺼야. 험버트와 퀄티의 대결을 역자는 '반사실주의'와 '사실주의'의 대결이라고 해석을 했더라구...당신이 작품 전체를 통해서 소설/반소설 사이의 여러가지 예들을 보여주고 있기때문에 그런 해결의 돌파구로 그 장면을 해석하는 것이 결코 낯설지는 않아. 그래도 당신은 옛날 사람이 되나서 그런지 여전히 실체와의 결별을 선언하지는 않는듯해. 비록 사실주의와의 결별은 선언했겠지만. 요즘 애들은 좀 더 애니메이션적이고 사이버하다구. 당신의 포스트모던한 방식에 영향을 받은 요즘 사람들의 영화는 이미 그런 '자기증명의 과정'조차 불필요하다고 본다구.  

어쨋거나 험버트의 전체주의적 시선만 계속봐서 목이 좀 아프기는해. 왜 그런거 있잖아. 한 쪽 방향으로 목이 돌아가서 뻣뻣해진 거. 시선고정.험버트와 당신의 시선고정이 만든 디스크야.흐흐. 그 시선이 전체주의적이지만 모든 것을 관통시키고 고정시키지 않아서 다행이야. 전지적 주체와  유동성의 주인공이 동인인물이 된다는 것이 흥겹지. 그 사이의 떨림이 재미있었다니까.^^  결국 그런 시선이 결코 압제적일 수 없는 것은 환상이라는 빈공간이 그 자리에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소설 속에서 험버트는 이런 말을 하지. 

 "내가 미친 듯이 소유했던 것은 그녀가 아니라 나 자신이 창조해 낸 것이었다. 또 다른 환상적인 롤리타, 아마도 실제보다 더 리얼한 롤리타. 실제의 그녀와 겹치고 둘러싸며 나와 그녀 사이에서 둥둥 떠다니며 의지도 의식도 없는 소녀, 정말 그건 그녀 자신만의 삶이 아니었다."

나는 이 소설의 텍스트와 콘텍스트가 모두 이 문장과 어떤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선생님, 정말 '소설' 을 잘 쓰신거에요. 정말 '소설'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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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라리스 (반양장) 렘 걸작선 2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김상훈 옮김, 이부록 그림 / 오멜라스(웅진)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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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라리스>를 세상에 널리 알린 것은 러시아의 영화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이다. 그는 1972년 동명의 영화를 만들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혁명이 영상에 자리를 내준 90년대를 거쳐온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지금보다 영화를 볼 수 있는 창구가 적었던 시절이다. 자고로 금지는 더 큰 열망을 낳는 법이다. 그 당시 타르코프스키는 매니아들 사이에서 올림포스에 사는 신족처럼 취급되었다. 그의 영화<희생>,<노스탤지아> 같은 작품들은 일종의 신탁이었던 셈이다. 실제 그의 영화는 중독성이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강한 수면제가 발라져있다. 가끔 졸다가 눈을 떠보아도  상징적인 이미지가 언뜻 언뜻 지나간다. 뻑뻑한 눈을 비비며 보는 시적인 영상들은 '장자'와 '나비'를 서로 혼동케 하기도 한다. 내가 알던 한 지인은 타르코프스키의 기획은 그런 '몽매'의 상태를 영화적 장치로 이용하여 자신의 영화를 초현실적 단계로 이끌어가는 것은 아닐까라며 웃었다. 하여간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명성은 어떤 의미로든 강력했다. 그 때문일까 <솔라리스>의 원작자도 그의 그림자에 가렸다.

옮긴이의 글에도 원작 <솔라리스>가 그 동안 SF팬의 폭발적인 지지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원작시나리오 정도로 취급받는 역전된 상황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다고 말한다. 나 역시  타르코프스키 때문에 <솔라리스>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영화 전체를 보진 못했다. 내게 직접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따로 있다. 지젝의 <기묘한 영화강의>라는 영상물이다. 그 영상물에서 지젝은 직접 내레이터로 출현한다. 그는 그의 책에서 예로 들었던 영화물들을 직접 설명하면서 정신분석학적인 영화 비평을 시도한다. 영화<솔라리스> 역시 그렇게 소개된다. 지젝은 프로이드의 리비도에 대한 왜곡을 먼저 비판하면서-리비도 결정론적인 곡해-타르코프스키의 <솔라리스>로 들어간다. 닫힌 문을 뚫고 나오는 레야의 모습도 나오고 책과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결말도 나온다. 타르코프스키의 결말에서 지젝은 '아버지의 법'에 복종하는 프로이드적 결말을 읽어 낸다.  

스타니스와프 램의<솔라리스>는 일종의 정신분석학 텍스트이다. 나는 최근에 읽었던 지젝의 책들의 복습 문제처럼 이 텍스트를 읽었다. ( 편의적이고 작위적인 방식이어서 그다지 권할 만한 것은 아니다.) 대신 어떤 개념들을 자기화 해내는 방식- 학문적 엄밀함을 요구하기란 어렵다-으로, 소설을 즐기며 분석의 틀들을 대입해 본다는 것은 책을 읽는 또 다른 방식의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먼저 영화 예고식으로 줄거리를 그려보자.

지구로 부터 한참 떨어진 우주. 솔라리스라는 스테이션에 주인공 캘빈이 도착한다. 그렇지만 무언가 이상한 예감이 든다. 스테이션이 마치 유령의 집같다. 켈빈은 자기의 스승이자 동료였던 기바리안이 이상증상을 보이며 죽었다는 것을 알게된다. 그리고 스테이션에 있는 나머지 두 동료들인 스노우와 사토리우스도 공통되었지만 각기 다른 이상 증상을 겪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그리고 마침내 그 증상은 캘빈에게도 나타나기 시작한다.

먼저 매혹적인 것은 '솔라리스 '라는 행성이다. 아니 생물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두 개의 태양이 떠있는 행성에 사는 '바다' 가 '솔라리스'다.  '생각하는 바다'는 밀물과 썰물을 바라보며 혀를 낼름거린다는 동화적 상상력을 극한으로 확정시킨다. 그 바다는 안개에 휩싸여 있고 끈적한 물질처럼 되어있다.그리고 가장중요한 것인데 인식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한계를 훨씬 넘는 형태의 고등진화된 생물이다. 렘은 솔라리스라는 행성이 발견되고 나서 지구에서 있었던 각종 연구들을 장황하게 설명해준다. '솔라리스학' 이 그것이다. 모두 각종 가설들이다. 하지만 어느 하나 명확하지 못하다. 모두 이런 생명 행성의 존재는 처음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언어로 담을 수 없는 것들을 우리는 상상할 수 없다. 우리는 이 '바다'를 둘러싼 다양한 과학적, 또는 철학적 주제들을 켈빈이 읽는 솔라리스 관련 저서들의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부분은 조금 지루할 수도 있지만 상당히 흥미롭다. 마치 과학사 논쟁이나 철학사 논쟁을 보는 듯 하다. 

흥미롭지만 또한 미지의 것이 가져다 주는 공포로 인해 '생각하는 바다'는 양가적 대상이다. 하지만 승무원들이 공통으로 겪는 증상이 확인되면서 '생각하는 바다'는 상상하기 힘든 공포가 된다. 이것은 우리의 트라우마, 음침함, 타나토노스적 욕망등을 물질화하기 시작한다.  

머릿속에만 있던 그것이 어느 순간 피와 살이 되어 현실로 나타나지. 문제는 그게 전부야...우리는 현실 그대로의 모습으로 이곳에'도착하게 되고 곧 진실-우리가 가능한 언급하기를 꺼리는 진실-과 맞부딪치는 거야. 이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일이지.....우리 자신의 추악함을 마치 현미경으로 보듯 몇 백 배나 확대한 것과 말야        

나는 공포영화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다. 또한 SF소설은 쥘 베른 이후에는 거의 본적도 없는 듯 하다. (물론 SF영화가 더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하지만 이런 설정은 정말 최악의 공포다. 소설이 안타까운 건 음악이 없다는 것이다.그렇지만 자기 트라우마의 물질화라는 설정은 가히 최고 공포를 연상시킨다.(타르코프스키의 영화에서는 음악으로 이런 긴장상태를 잘 유지했던 것 같다.) 나는 사실 이 소설을 보다가 어둠 한 편에서 나의 어떤 트라우마들이 형상화되어서 나오면 어떨까 생각하고 소름이 돋기도 했다. (물론 '나는 트라우마같은 것이 없어요.'라고 하는 사람은 앞으로도 그런 일이 생기지 않길 바라면서 잘 먹고 잘 살면 된다. 그러니까 나같은 이를 비롯해서 인간에 대해 뭘 해도 이해가 잘 안되는거다. 또한 심리학 실험에서 거짓말 반응에 걸려서 실험 비적격 대상자가 될것이기도 하다. 심리학 실험에는 실험자의 정직도를 알아보기 위한 문항들이 몇개씩 있다고 알고 있다.)  

주인공 캘빈은 그의 자살한 아내를 만난다. 캘빈이 그냥 홧김에 던진 말이었는데 그것때문에 그녀는 자살한 것이다. 그녀는 캘빈이 자고 있는 동안에 나타났다. 잠이라는 소재는 프로이트의 주전공 아닌가.(잠을 자야 꿈을 꾸지)그렇지만 이 존재는 꿈과는 다르다. 앞서 말했듯이 이미지가 아닌 물질화된 대상이다. 지젝은 '살아 있는 시체들의 귀환'이라는 말을 썻다. 그는 현대 대중문화의 근본적인 환상이라고 말한다. 즉 죽음에 머무르려 하지 않고 거듭거듭 산 자를 위협하기 위해 귀환하는 사람들에 대한 환상이다. 소설 속에서 귀환한 레야는 직접적으로 캘빈을 위협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무의식의 귀환은 자살만이 탈출구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미치게 한다. 그렇다면 왜 죽은자들이 돌아오는가?  지젝은 라캉이 이에 대해 아주 쉽게 답변했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들이 제대로 매장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죽은 자의 귀환은 상징화 과정(이게 제대로 이루어져야 맘고생 없지 뻔뻔하게 잘살 수 있다.)에 있어서의 교란을 나타내는 기호이다. 라캉은 <햄릿>의 햄릿왕과 <안티고네>의 안티고네가 이 상징적 채무를 물질화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레야라는 존재를 일종의 '실재'의 침입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캘빈은 솔라리스 스테이션에서 일종의 사물의 영역으로 넘어간 것이다. 즉 존재가 고통 속에서 고집하는 금지된 경계 영역으로 말이다. 무의식은 어떤 비지식의 토대 위에서 그 일관성을 유지해야하는 것이라고 지젝은 말한다. 우리의 상징화 작용 속에 비상징화되는 중핵들이 봉쇄되어야 한다. 지젝은 '징후'로 이를 설명한다. 즉 주체가 자신에 관한 어떤 근본적 진실을 무시해야만 존해하는 어떤 특정한 형성물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캘빈처럼 실재의 조각 정도가 아니라 실재가 전면적으로 침입할 때 그런 징후는 스스로 와해된다.  

'생각의 바다'가 끌어낸 레야라는 대상-나중에 이런 대상들을 '파이-생물'이라고 부른다.재미있는 것은 실재계에서 상상계로 향하는 관계를 지젝이 파이라고 부르고 있다. - 은 정확히 말하자면 캘빈의 증상으로서의 레야이다. '여자는 남자의 증상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여성이 남성에게 일관성을 부여하는 한에서만 남성이 존재함을 가리킨다. 남성의 존재는 사실 그 자신에 대해 외부적이며 여성은 무이다. 이 '무' 를 통해서 실재적인 주체성의 창출이 가능한 것이다. 지젝은 1930년대 필름 느와르의 팜므 파탈이라는 여성 존재를 통해 이 과정을 설명한다.('여자는 없다.'라는 말을 페미니스트적 오해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솔라리스>속에서 캘빈의 죄책감에 의해 만들어진 레야는 여기서 특이한 행동을 통해 흥미로운 질문을 던진다. 레야는 캘빈의 머릿 속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캘빈의 의식 밖의 영역에 대해서는 '무'에 가깝다. 아무런 코딩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흥미로운 것은 레야가 스스로 '비존재'라는 것을 인지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생각의 바다'가 주체의 트라우마를 통해 구축해낸 물질화된 '시뮬라르크'가 특별한 매게 없이 자기 인식을 시작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유령이 유령인지 스스로 아는 것이다.' 이거야 말로 '죽은 신도 못하는 일'을 스스로 해내고 있는 것 아닌가? 레야는 몇 몇 특정한 동물과 인간만이 한다는 '자살'을 시도한다. 그렇지만 그녀의 육체화,정신은 금새 다시 복원된다. 자해와 복원의 고통스러움을 복기해야하는 캘빈은 이제 돌아온 그녀가 '비존재'임을 알면서도 혼동을 겪게 된다. 여기서 스타니스와프 렘의 매력이 나온다. 만약 레야라는 존재를 단지 캘빈의 무의식정도로만 취급했다면 이 책 <솔라리스>의 매력은 절반으로 떨어졌을 것이다. '생각의 바다'는 원래 상호주관성이 결여된 영역이다. 즉 '레야'라는 존재가 대상/응시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진 단순한 '시뮬라르크'만은 아니란 것이다. 이것은 상호주관성이라는 인식영역에서는 논리적으로 타당하고 쉬운일이다. 하지만 '생각의 바다'는 완전히 '비인격적' 존재이다. 그렇기때문에 '존재론적' 고민을 하는 레야의 탄생은 마치 진화론의 지적 설계론을 풀어낸 것 같다. 실제로 책 후반부에서 스노우와 캘빈은 '신'이라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 

그 신은 무한을 창조했지만 자신의 능력의 척도여야할 무한이 결국은 그 자신의 끊없는 패배를 가능하게 하는 척도가 되버렸던 거지....불와전한 신 ..이거야말로 내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네. 속죄나 구원이 목적이 아닌,아무 목표도 없이 다만 그곳에 존재할 뿐인 신이기 때문이지

스타니스와프 렘을 비롯해서 외계인 또는 미지의 세상과 조우하는 인류를 다룬 영화들은 일련의 공통된 주제들이 있다. 조금씩 다른 변주를 취하고 있지만 결국 '인간'에 대해 어떤 종류의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것이다. 과연 인간이란 존재는 무엇인지? 우리는 과연 진리와 독대할 수 있는지? 의식의 한계는 어디까지 인지? 그 영역 밖에 대해서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또한 우리는 어떤 형식으로 타자에 접근해왔는지? 어떤 접촉 양식을 취해왔으며 어떤 소통의 방법들을 이룩해왔는지?  이 과정에서 우리의 이성과 이로부터 추출되기도 하는 폭력은 어떤 패턴을 밟아왔는지? 소설<솔라리스>에서 우리는 수시로 이런 질문들을 추출해낼 수 있다.

 <솔라리스>의 원작자 스타니스와프 렘은 타르코프스키와 2002년에 있었던 소더버그의 리메이크 작업에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 논쟁의 핵심은 두 영화가 공히 '소통과 인간 인식의 한계' 문제보다는 '로맨스'쪽으로 방향을 잡았기 때문이라고 알려져있다. 두 영화 모두를 보지 않은 입장이라 무어라 말하기 어렵지만 내가 영화 감독이었어도 그런 방향으로 따라가기 쉬울 성 싶다. 원작 <솔라리스>의 후반부는 다분히 설명적이고 철학적이다. '솔라리스학'이라는 것을 두고 벌어지는 논쟁과 서술들은 드라마적 진행에 있어서는 방해가 된다. 물론 이런 논쟁의 함의를 읽고 지적 만족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 역시 많을 것이다. 요는 렘의 <솔라리스> 후반부는 드라마라는 측면에서 취약하다는 것이다.  2% '행동'이 부재하거나 이펙트가 약하다. 이미지의 결합과 분배를 통해 초현실주의적인 영화를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면 감독들은 이런 드라마 구조에 대해 고민하기 마련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는 '예술은 모방이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 미학을 한 줄로 요약한 이런 말이 나온다.

비극은 인간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동과 삶, 행복과 불행을 모방한다....우리가 행복하거나 불행한 것은 우리가 하는 행동에 의해 결정된다. 

영화<솔라리스>의 감독들이 '생각하는 바다'인 솔라리스보다 주인공인 캘빈과 레야의 문제로 자꾸 시선을 옮겨가려는 것도 어느정도 이해해 줄 수는 있다. 영화<솔라리스>를 최근에 구하고 있는데 영화를 보고 나면 또 다른 방식의 리뷰도 가능해지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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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 아침이슬 셰익스피어 전집 1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김정환 옮김 / 아침이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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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man who could not make up his mind..... 로렌스 올리비에의 1948년 영화 <햄릿>은 이런 문구로 시작된다. 생각해보면 내가 기억하고 있는 '햄릿'을 한 줄로 요약한 문장이다. '작심하지 못한 한 인간' 햄릿의 이미지는 생각보다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여석기의 <나의 '햄릿' 강의>는 우리에게 친숙한 이런 햄릿 상이 19세기의 산물이었다고 말한다.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에서는 햄릿을 빗대어 " 갸날픈 꽃이나 자랄 수밖에 없는 화분에 오크 나무를 심어 놓은 격" 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유약한 햄릿이라는 상식적인 이름은 현재의 시대에도 통용되고 있다. 과거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이미지 역시 그런 역사의 축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김정환 역의 '세익스피어전집' 중 <햄릿>을 가장 먼저 읽었다. 과거처럼 줄거리나 쭉 쫓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수 백년 동안 다른 이름의 '햄릿'이 있어 왔듯이 내 독서에도 다른 양상으로 읽히는 '햄릿' 을 주조해 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지난 한 해 동안 나를 괴롭혀 왔던 -자기를 과장하여 말하는 습관을 지속하며 말한다면- 실존의 고민들을 '햄릿'의 부스러기 속에 비추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 모두가 그리스인인 것처럼 우리 모두는 햄릿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런가?

 대개의 고전이 그렇겠지만 햄릿 역시 문제적 작품으로 해석의 다양성이 <햄릿>을  <햄릿>이상으로 만들었다. 나는 먼저 가장 구하기 쉬운 로렌스 올리비에의 1948년 영화<햄릿>을 봤다. 나중에 한 번 더 이야기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가장 인상적인 것은 흑백대비가 강한 공간 설정이었다. 첫 장면의 파수꾼 교대 장면과 궁전 복도씬들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다른 하나는 햄릿이 왕비 거트루드를 비판하는 침대 씬이다. 그 둘의 키스 장면은 보다가 깜짝 놀랐다. 다분히 오이디푸스적인 키스였다. 뒤에 읽었던 여석기의 <나의 '햄릿' 강의>에서는 내가 올리비에의 영화에서 본 장면들에 대한 해석이 나온다. (나는 여기서 쪽지 시험을 맞춘 아이처럼 철없는 자부심을 느꼇다.) 20세기 초반 <햄릿>에 대한 프로이트적 해석이 부각된 적이 있다고 한다. 프로이트의 제자였던 어네스트 존스의 <햄릿과 오이디푸스>에서 촉발된 것이다. 로렌스 올리비에의 키스씬은 정확히 그의 반영처럼 보였다. 침대라는 장소 설정부터가 그런 느낌을 준다.  프로이트적 해석에 의하면 결국 햄릿은 복수의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햄릿은 살부의 욕망과 어머니와의 동침 욕망이 공존하는 존재인데 이 모든 것을 이루어낸 존재가 바로 삼촌 왕인 클로디오스이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무의식적 욕망의 투사가 바로 그이기 때문에 햄릿의 에고는 제지당하는 것이다. 여석기 교수는 이런 가설을 도식적이라고 비판한다.  

앞서 말했듯이 여석기의 <나의 '햄릿'강의>는 괜찮은 조타수 역할을 해주었다. 텍스트와 텍스트 바깥의 것을 나누어 본다면, 개인적으로 텍스트 외적인 것의 재미가 더 컸다. 판본의 문제라든지 햄릿을 둘러싼 역사적 논쟁들,그리고 책 후반부에 나오는 햄릿과 관련된 연극,영화등에서 해석의 문제들. 실제로 텍스트 부분은 조금 더 보강해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기회가 되면 여석기의 책만 따로 리뷰를 작성할 생각도 있다.  

 이번에 햄릿을 읽을때는 평소 안하던 짓을 했다. <햄릿>의 영어 원문을 놓고 함께 읽었다. 판본도 잘 모르고 해서 그냥 최근에 나온 signet 시리즈의 페이퍼 북을 구했다. 이 책에도 원본 텍스트 이외에 읽을꺼리가 꽤 있다. 서론을 비롯해서 대여섯개의 에세이들이 있는데 꼼꼼히 읽어보면 도움이 될 만한 내용들이었다. 그러나 대충 눈으로 훑어보다가 포기했다. <햄릿>은 연극대본이고 또 운문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낭독의 즐거움'을 느껴보고 싶었다. 독특한 리듬감은 번역으로는 결코 감당해 낼 수 없는 것이다. 특히 <햄릿>처럼 언어유희가 잘배치된 책에서는 그 단어와 운율을 직접 보기 위해서는 원문이 필요하다. 

햄릿 1막에 왕 클로디어스와 햄릿의 첫 대면 장면이 있다.언젠가 알라딘의 로쟈님이 번역 비교를하면서 예로 들었던 문장이 나온다. 

왕 클로디어스: but now, my cousin  Hamlet, and my son (그렇고 자, 내 친척 햄릿,그리고 내 아들)  

햄릿 : A little more than kin, and less than kind (친척보단 조금 더 친하고, 자식보단 조금 더 친한) 

번역은 여러 형태가 있는 걸로 안다.어찌되었거나 비교급 뒤에 kin과 kind를 배치해서 생기는 운율적 효과를 옮기기는 힘들다. 여석기의 <나의 햄릿 강의>에는 이 문장 뒤에 나오는 햄릿의 대사를 통해 번역자의 곤란함을 말한다.

"Not so, my lord, I am too much in the sun" 

천만의 말씀, 볕을 너무 받아 아들 노릇이 눈부십니다: (여석기 역) 

그게 아니죠,폐하,오히려 햇볕을 너무 많이 쬐고 있는 거죠(김정환 역) 

김정환 역은 원문대조해서 보기 좋은 점이 거의 직독직해에 가깝다. 행을 원문에 거의 맞추고 있다보니 따라 가기 좋다. 그런데 저 문장을 처음 봤을 때 김정환 역으로는 '엥...뭥' 그랬다. 오히려 여석기 역이 클로디어스가 '햄릿 너 너무 우울해 보이는데...'라고 하는 질문에 대해 비꼬는 식의 대답으로 어울린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in the sun이 앞서 말한 and my son의 댓구라는 것이다. 번역자는 그것까지 옮길 수는 없다. <햄릿>에 등장하는 이런 문장들은 너무 많아서 일일이 열거할 수가 없다. 특히 운문이라서 읽다보면 입에 감기는 무언가가 있는데 대개가 대조나 비교,동음이의어,또는 이음동의어등을 통한 말장난들이다. 원서와의 비교 낭독만이 줄 수 있는 즐거움이다. 

햄릿 5막에 나오는 이런 말들도 한 번 읽어 보자. 이건 우리말로 번역되어도 그런 효과를 발휘하기는 하지만....밑줄 그은 말이어서 옮겨보자 

참새 한마리가 떨어지는 데도 특별한 섭리가 있는 법. 그게 지금이라면,앞으로 오지 않을 것. 앞으로 오지 않을 거라면,지금일 것.지금이 아니라면 그래도 올 것. 

There is special providence in the fall of sparrow. If it be now, 'tis not to com. if it be not to com, it will be now. if it be not now, yet it will come  

낭독의 즐거움'을 위해서는 무지에서 오는 짜증을 감당해야 한다. 현대어도 아닌 옛날 잉글리쉬를 뜻도 모르면서 따라 읽는다는 것이 결코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햄릿> 읽기에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나같은 이가 자주 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햄릿>의 주인공들의 독백을 1막부터 하나씩 따로 읽어보면 주인공 햄릿의 내면적 변화가 드러난다. 특히 5막에서 햄릿은 과거와의 어떤 단절이 있다. 그가 4막에서 포틴브라스의 군대를 보고 했던 독백처럼 '위대하다는 것은 위대한 명분없이는 움직이지 않는게 아니라,지푸라기 하나를 놓고도 위대하게 싸우는거다' 라는 위치에 올라섰다. 여석기의 책에는 그래서 5막에는 독백이 없다라고 한다. 햄릿의 독백만 모두 따로 떼어 읽어 본 것도 이번 <햄릿> 읽기의 즐거움 중에 하나였다. 인생의 어떤 국면마다 바뀌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또 한 개인 안에 들어 있는 비겁함과 용기,선과 악 사이의 끊임없는 대결처럼 보이기도 한다.  

 햄릿을 읽다가 '존재'와 '죽음' 사이, 그 어떤 공간에 대해 생각한다. <햄릿>의 첫번째 대사가 '너는 누구냐' 라는 질문이었고 햄릿의 마지막 대사가 '나머지는 침묵이로다'이다. 죽음은 말을 할 수 없다. 햄릿이라는 텍스트 안에서도 이런 문제들이 수시로 등장하지만 형식상으로도 그런 틀 안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존재' 에 대해 말하길 좋아하지만 '죽음'에 대해 말하기 싫어 한다. 아니 오히려 '죽음'에 대해 초연한 태도를 취한다. 그리고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것도 안다. 특히 좀 의식있다는 사람들,좀 읽었다는 사람들이 그렇다. 그런데 모두 거짓이다. 샛빨간 거짓이다. 자기 조차 속이는 거짓이다. 그런 초연함 속에서도 당신은,아니 나는 왜 그렇게 살고 있는가? 초연한 그대는 새치기 하는 자동차에 욕지거리를 하고, 더러운 승냥이가 당신의 이웃을 물어뜯고 있어도 눈만 살짝 돌리며 어제처럼 아이에게 밥을 먹인다. 살아 생전 언제나 '죽음'은 타자이다. 햄릿 역시 실존의 딜레마 앞에서 언제나 '죽음'이란 것 때문에 애를 먹었다. 그 '죽음'을 두려워하든 비웃든 부러워하든,어떤 형태로든 그 앞에 이 문제는 장애였다. 우리는 '죽음' 앞에 겸손할 수 있을까? '죽음' 앞에 걸려 있는 나를 넘어갈 수 있을까? 언제쯤 되면 이런 미력한 여행을 마칠 수 있을까? 누군가 내 생명줄을 손아귀에 쥐고 흔들때, 그 때서 비로소 '삶'과 '죽음'의 진실에 눈을 뜰 것인가?  내가 큰 궤적을 그리며 땅으로 쓰러질 때야 비로소 살아 있는 것의 의미를 알 것인가? 나는 나를 왜 구타하지 못하는가? 사라지지 않으면 생겨나지 않는 것은 자연의 섭리이다. 

가을이 깊었는데 이 애벌레는 아직 나비가 못되었구나.(바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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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소녀
아리엘 도르프만 지음, 김명환.김엘리사 옮김 / 창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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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군부의 최종 승인을 필요로 한다."  

뜬금없이 '왠 반동적인 발언인가?' 하는 의심의 눈동자가 굴러가는 소리가 들린다. 한 쪽에서는 군대를 없애자고 퍼포먼스를 하는 마당에 말이다. 그리고 '군정종식' 을 외치던 YS,DJ 도 대통령 한 번씩 다 해먹은 이 시대 이 땅에서 말이다.

먼저 이 말을 해명하기 위해 두 가지 전제를 이야기 해야 겠다. 첫째, 여기서 말하는 '혁명'은 요즘 유행하는 '문화혁명'이나 신비주의적인 '의식혁명'을 뜻하지 않는다. 이런 종류의 혁명은 가끔 모든 혁명적 좌절을 '영속혁명'의 대의 아래서 '성공'으로 치장하는 신학적인 측면이 있다. 이것이 절망 속에서도 '희망'의 대의를 잊지 않기 위한 전술로 효과이라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여기서 '혁명'은 고전적 의미의 '정치 권력'의 전복이나 소유와 관련있는 '클래식한 의미의 혁명'이다. 두번 째로 이 말이 귀에 거슬리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산층 진보'의 '이데올로기적 과격성'을 잠시 덮어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 역시 그들 중 한 명이다. 추락의 낭떨어지에서 줄타기를 하는 다른 모든 중산층들 처럼. 그러므로 굳이 이를 폄하 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단 '중산층 진보'가 자신을 '이데올로기적 공중부양'으로 정치시키는 방식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의외로 모니터 상에서는 자신의 정치적 실재보다 훨씬 당당하게 급진 좌파적이며 아나키스트적인 흥분을 많이 목격하곤 한다. 자기주장이 담는 내적 모순에 대한 이론적 성찰은 별로 관심이 없다. 이런 '흥분파'는 한 줌의 '군부' 가 어찌 '혁명'의 위대한 기치를 좌우할 수 있느냐고 분개할 것이다. 하지만 '자기정초적 흥분' 만 정돈하고 본다면 이 말이 결코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혁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결국 군부가 마지막 도장을 찍어 주어야 한다. 군부가 혁명 성패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귀에 거슬리게 들리지만...) 그렇기 때문에 혁명 세력들은 외부 무력에 상응하는 자체적인 무력을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러시아 혁명이다. 아니면 최소한 군부가 혁명적 시기에 중립 내지는 유보적 입장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야만 한다. 치명적으로 실패한 예가 바로 살바도르 아엔데의 칠레다. (칠레의 역사에 대해서는 길게 말하지 않겠다.)

아리엘 도르프만에게 '슬픈 칠레'는 어머니의 자궁과도 같다. 이 책에 실린 그의 작품들은 탯줄을 통해 다시 그 역사적인 칠레와 연결된다. 여정은 칠레라는 한 나라에 머물지 않고 역사와 그 안의 사람들이라는 보편성 으로 승격된다. 대충 여기까지만 들어봐도 이 책이 요즘말로 'COOL' 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프라다를 입은 악마'도 등장하지 않고 '쇼퍼홀릭'들도 나오지 않는다. 자본주의적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TV화면을 통해 이미지로 소비되는 -수잔 손택식으로 말하자면- 고통받는 타인의 모습들이 모두 주인공이다. 첫번재 희곡 <과부들>에서는 남편과 자식을 군부에 빼앗기고 찍소리도 못하는 과부들이 나온다. <죽음과 소녀>는 성고문 피해자가 등장한다. <경계선 너머>에서는 하루 아침에 이산가족이 되는 노부부가 나오고 <연옥>은 입에 담기 힘든 범죄를 저지른 남녀가 무간지옥에서 들려주는 귀곡성이 흘러나온다.

나태한 현실을 고발하는 '리얼리즘'을 '진보'와 등치시키는 사람들은 -요즘도 그런 사람이 있겠냐만은-이런 읽을 거리에 관심을 둘 것이다. 하지만 그건 반쪽이다. 이 책은 '자연주의'로서의 '리얼리즘'이 아니다. 아리엘 도르프만의 말은 그의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와 형식 사이의 전통적인 미학관을 보여준다.

"실제 인간의 고통에서 나온 것이므로 역사적인것이지만 동시에 직접적인 역사로부터 자유로울 것을 명하는 재현의 미학적,문법적 법칙을 따른다." 

이 희곡집에 등장하는 네 편의 희곡은 역사의 핏빛 강물 위에 떠 있다. 특히 아픈 역사로 점철된 한국민에게는 아리엘 도르프만의 글들이 한 자 한 자 우리들의 언어로 씌진 듯 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등장인물들이 많은 <과부들>은 아프카니스탄의 감독 모흐센 마흐말바프의 흙냄새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훨씬더 비의적이다. 검은 강물 사이로 떠오르는 사라진 사람들과 연속적인 사건들은 마치 스릴러를 보는 긴박감을 준다. 그러면서 인물들 사이의 다층적인 입장과 갈등들이 오래되 고성을 타고오르는 덩쿨처럼 뒤섞인다. 강물에 떠오른  한 구의 시체를 두고 그 안에서 모두 실종된 자기 가족의 얼굴을 읽어내는 장면은 묵뚝한 슬픔이 가진 보편성으로 독자까지 끌어들인다. 이 작품은 결국 한 편의 연극을 위한 대본임에도 읽고 나면 말없는 강물의 묵묵함처럼 대하드라마를 본 듯 한 느낌을 준다.

네 편의 희곡 중에서 가장 많이 알려져 있고, 또 가장 강한 인상을 주는 작품은 역시 <죽음과 소녀>이다. <과부들>이 '쿠르릉 쿠르릉' 거리는 어두운 강물 소리를 계속 귓전에 남기면서 진행된다면 이 작품은 계속 슈베르트의 현악 사중주의 제1 주제로 양 쪽 귀를 괴롭힌다. (그의 작품이 상당히 청각적이라는 사실을 이 글을 쓰면서 다시금 깨닫는다. <경계선 너머>는 포성으로 <연옥>은 소리가 없는 '무음'으로 청각적이다.) 이 작품<죽음과 소녀>는 94년에 로만 폴란스키 감독이 에이리언의 여전사 시고니 위버를 기용하여 <진실>이란 제목으로 영화화했다. 영화 첫 장면과 끝장면에 공연장에서 슈베르트를 듣고 있는 시고니 위버가 나온다.

이 작품은 현실적이다. '진실과 화해를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고, 그것은 정녕 가능한 것인가?' 라는 질문 말이다. 그냥 '정의로운 사람들과 그들의 역사가 나쁜 놈들 입에서 진실을 말하게 하면 된다.' 라는 단순함으로는 이런 딜레마들을 헤쳐나갈 수 없다. 과거사 위원회로 뽑힌 운동경력이 있는 남편과 남편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고문의 후유증을 안고 사는 여자, 그리고 정말 고문 협력자였는지, 아니면 아니었는지 끝까지 모호하게 남겨진 의사. 이들 세 명의 대사 한 마디 한 마디는 '진실'과 '정의' 그리고 '현실' 을 둘러싼 다층적인 양상을 목도하게 한다. 아내의 '사적복수론'과 그를 설득하려는 남편의 '역사 처벌론'은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지는 대목들이다. 독자들은 아내에 대해 심정적으로 동조할 수 있다. 그러나 남편의 현실적 논리는 결코 외면할 수 없다. 마치 아이스킬로스의 비극이 던지는 문제를 다시 재현하는 듯 하다. 결국 이들은 절충안을 찾는다.   아리엘 도르프만은 그리고 독자에게 묻는다.

"우리가 과거의 수인이 되지 않고 어떻게 과거를 살아 있게 할 것인가. 평화를 보장하기 위해 진실을 희생시키는 것은 정당한가? ...그리고 가장 큰 고통을 받은 사람들에게 우리 모두는 얼마나 죄죄를 짓고 있는가? 그리고 어쩌면 이 모든 것 중 가장 큰 딜레마는 ,민주적 안정을 만들어내는 국민적 합의를 깨지 않고 어떻게 이런 쟁점들과 씨름할 것인가? "

나는 아리엘 도르프만이 <죽음과 소녀>에서 던지는 질문들에 대해 "그래. 이게 '정의야' 이렇게 하면 해결 돼. 나머지는 부차적이야" 라고 1분쯤 생각하고 답할 수 있는 사람들을 '명품족'만큼이나 혐오한다. 아니면 천재성에 질투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죽음과 소녀>에서의 문제 의식은 <연옥>으로 이어진다. <연옥>은 처음에 읽다보면 '뭐야..이게 어찌 되는거야' 라고 운전대를 어디로 잡아야하는지  갈팡질팡하게 만든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처럼은 아니지만 시공간도 모호하고 이름도 부여받지 못한 남녀가 서로 비켜가면서 이야기하는 부분들에서는 더욱 그렇다. 사건이 무엇인지를 앞선 작품들처럼 한 번에 보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점점 <연옥>은 정신병동의 하얀빛 처럼 환한 매력을 선보인다. 그리고 책을 다 덮고 나면 가장 긴 여운을 남기는 작품으로 <연옥>을 꼽을 수 밖에 없다. <연옥>은 정치사적 상흔을 다루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아리엘 도르프만이 지속적으로 부여 잡고 있는 '진실과 화해 그리고 치유'에 대한 이야기를 사이코드라마와도 같은 형식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서로를 치유하는 목적이라는 측면에서 본 사이코 드라마이다.)    

<연옥>의 배경은 말 그대로 '연옥'이다. 처음에는 이 배경조차 이해가 되지 않아서 허발질을 했다는 것이 사실이다. 배경을 설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는 그저 하얀 방이라고만 무대를 설정한다. 남녀는 일종의 '무간도'와도 같은 '연옥'에 와있는 것이다. 작가가 후기에 그곳이 단테적인 연옥이 아니라 불교적인 공간이라고 말한 것은 이 장소가 '윤회'를 준비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윤회'에 앞서 남녀가 해야하는 일은 무엇인가? 그것이 작가가 평소 즐겨찾는 주제를 풀어나갈 자리로 본 것이다. 주인공들은 서로를 심문하는 위치에서 '스스로의 정화'를 요구한다. '정화'되지 못하면 끝없이 이 '중음'의 공간에서 머물러야 하기 때문이다. 

남자:  딱 하나 알고 싶은 게 있어. 윤회는 끝이 날까?

여자: 네가 그녀를 치유할 수 있다면, 그럴거야.

 극에서는 남자와 여자의 위치가 서로 뫼비우스띠처럼 얽힌다. 단순히 한 사람의 심문자가 피심문자가 되는 성질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의 상처로서 심문자가 되기도 그 반대역을 맡기도 한다. 이들은 서로가 연속되는 연할 속에서도 서로를 감추며, 속인다.

여자" 나는 너의 담당 사건이야. 너의 유일한 담당 사건이지, 내가 돌아가면, 너도 돌아가는 거야.내가 지워지면, 그들이 너도 지워버릴 걸.맞지?

 작가는 극의 끝으로 다가가면서 그들의 인격너머에 있는 그곳가지 서로 닿기를 요구하고 있다.

"이중적인 심문/재판은 연기를 하는 자들의 인격을 붕괴시키고 그들의 자아를 가린 베일을 찢어버리는 방법이다."

나는 인간은 결코 그 지점까지 닿을 수 없다라고 생각한다. 자아의 베일을 벗는 다는 것은 그걸 작동하는 또 하나의 역할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곳은 '공백'이다. 어떻게 '공백'을 언어로 밣혀낼 수 가 있다는 말인가?  우리는 자신에게나 타자에게 그것을 요구할 수 있으나 그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작업이다. 어쨋거나 작가는 그것보다는 조금 더 현실적인 이유에서 이 극을 진행시켜 나간다. 그에게는 '소통'의 일종의 희망이다. '폭력과 공포와 배신으로 오염된' 세상에서 서로를 '신뢰'할 수 있는 첫 단초는 '소통'으로 부터 찾아야 한다는 낙관적인 믿음이다. 그러면서 이 작품이 갖는 의미를 질문이라고 말한다.

"어제 우리에게 가해진 경악할 일들이 우리가 내일 다른 사람에게 저지르는 공포를 불러오는 이 때, 내가 희망하는 바는 적어도 이 희곡이 비난과 분노의 순환을 감히 어떻게 깨고 넘어설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었다."

이 책의 매력적인 점 중에 하나는 각 편 마다 작품 속 인물들이 태어나는 산고와 작품에 나타난  작가의 문제 의식들을 작가 스스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간혹 '이런 점을 이야기하고 싶었구나' 하는 지점을 작가의 입을 통해 만날 때는 정답을 맞추고 우쭐해진 소년같아진다. 그러나 내가 더 크게 위안을 받을 때는 가끔은 현실의 언어난수표 속에서 내가 언어로 형상화하지 못했거나, 차마 이해받지 못할 두려움에 말하지 못하는 질문들에 작가가 촉수를 뻗어있을 때, 나는 가끔 그럴 때 '외롭지 않다'는 느낌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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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과 마르가리타 대산세계문학총서 69
미하일 불가코프 지음, 김혜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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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게오르그 루카치, <소설의 이론>

그렇다. 자동차 배기가스 때문이다. 아니 술집의 네온 싸인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제 도심에서 별을 볼 수는 없다. 작은 곰을 찾겠다고 옥상 위로 올라가는 소년이 없으니 밤하늘을 쳐다보는 어른은 더더욱 드물 수 밖에.

하지만 소년!  실망할 필요는 없다. 너무 오랫동안 굳은 상처는 굳은 살이되어서 아프지도 않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알라딘 천장에 뜨는 별이 있지 않은가?  또한 매주마다 시대의 교양인을 위한 영화 잡지에도 별이 뜬다. 안도의 한숨을 쉬자....oh! no.no. . 기침을 하고 가래를 뱉자.

'떠 봤자. 별은 다섯뿐이다.'

청천 하늘엔 잔 별도 많구요.이내 가슴엔 수심도 많다. 이미 간파하셨을 것이다.

"왜 별은 다섯뿐일까?" 가 내 수심의 뿌리이다. '많아봐야 고작...다섯이라니. 이건 부당하다'

나는 고전을 읽을 때 머릿 속에 환청이 들린다. 그 음악은 '감탄'을 도입부에 베이스 라인으로 깔고 간다.'둥 둥 둥둥' . 그리고 이어서 색소폰과 트럼펫같은 생각이 잼을 한다. 하나는 이런 감사의 멜로디를 쫓아간다. '이걸 읽지 않고 죽었다면 얼마나 억울할까?. 랄라라'  그리고 또 다른 멜로디는 탄식의 가사를 쫓는다. '도대체 뭘 하다가 이걸 이제야 본 거야. 띨띨띨..'

미하일 불가코프의 <거장과 마르가리타>에 대한 나의 소견은 다 밝혔다. 할머니 손등같은 인문학의 리뷰를 던지고 쾌청발랄 리뷰를 쓰니 9월 아침처럼 좋다. 

 아무리 애를 쓰고 막아보려해도..너의 목소리가 들려어어..너의 목소리가 들려어...너의 목소리..너의 목소리이이... .  - 델리스파이스 <차우차우>

모스크바 거리에 나타난 볼란드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 매력적인 -이름이 여럿인 -친구가 전 서리이자 하-노리츠(예수)의 제자라고 자임하는 마태에게 이런 말을 한다. 

   "너는 마치 그림자들을, 그리고 악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투로 말했어. 그렇다면 이런 문제를 한번 생각해보는 건 어떤가. 만일 악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너의 선은 무슨 일을 하게 될까? 또 만약 이 지상에서 모든 그림자들이 사라진다면, 그때 지상의 모습은 어떻게 될 것 같나? 그림자는 사물과 인간들로부터 만들어지지. 여기 내 검의 그림자처럼. 그림자가 존재하는 것은 나무와 살아 있는 존재들이 있기 때문이야. 그런데 너는 지구 전체를 벗겨버리며고 하고 있어! 벌거벗은 빛을 즐기려는 너의 환상으로 이 지상의 모든 나무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벗겨내버리고 싶은 건가? 너는 어리석어." 


<거장과 마르가리타>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 여기다. 나는 물론 메피스토펠레스의 발푸기르스의 밤에도 볼란드의 아파트에서 열린 만월의 무도회에도 초청받지 못했다. 내가 설마 이 부분을 좋아했다고 '선 의지'로 무장한 '계몽주의자'들이 비난한다면 나는 당당히 꼬리를 내릴 터이다. "아니요. 그냥 취소할께요.  선이 반드시 승리하는 권선징악의 전래동화와 헐리우드 영화가 좋아요." 라고 사상전향을 할 것이다.

<거장과 마르가리타>에 볼란드 일당을 따라가다가 이게 영화로 만들어진 적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얼핏 검색에는 나와 있지 않다.( TV 드라마 이야기는 나와있다. )볼란드 일당의 행각을 보다가 문득 떠오른 감독이 '팀 버튼'이다.  볼란드 일당의 캐릭터는 마치 '팀 버튼 표' 영화에 나오는 악당들과 거의 흡사하다. 귀여운 그로테스크함도 그렇고, 베헤못과 코르비예프의 장난끼어린 짓도 그렇다. 악마 대장 볼란드와 고양이 베헤못의 체스 두는 장면은 진짜 배를 잡고 넘어지게 만든다.

나는 팀 버튼이 <거장과 마르가리타>를 분명히 봤을 것이라고 내 맘대로 추측하고 싶다. 아니 크게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내 맘대로 우겨버리고 싶다. 소설이 다루는 주제와 풍자는 조금 있다가 이야기하더라도, 지금 유명한 헐리우드 감독 중에서 <거장과 마르가리타>를 가장 그럴싸 하에 영화로 만들어 줄 사람 하나를 뽑자면 당연히 '팀 버튼' 이다. 그가 만들어내는 약간은 환상적이며서, 만화같은 미장센들도 너무 잘 어울린다. 그러므로 국내에 불가코프의 팬들보다 대략 11배쯤 많을 팀 버튼의 팬이라면 <거장과 마르가리타>를 읽고 팀 버튼에게 제작 압력 이메일을 보내자...물론 팀 버튼이 영화를 잘만들어도 결코 불가코프의 소설을 따라잡기 힘들겠지만 말이다. 영화와 소설을 단순 비교하는 초등학교 방학 숙제형 감상만 피한다면 팀 버튼이 만든 영화도 즐거울 것이다. 원작이 뛰어나니까 말이다. 

<거장과 마르가리타>에는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 하나는 볼란드와 일당이 도착한 후 나흘 간의 소란과 거장이 쓴 본디오 빌라도의 이야기다. 모스크바와 예루살렘이 시공간을 확확 건너뛰며 아주 빠르게 진행된다. 역자 해제를 보면 이 시공간은 대칭적으로 배치된 것이다. 뭐 구조를 몰라도 흰 눈이 내릴 것 같은 모스크바 거리와 타는 목마름의 예루살렘을 오고가는 재미가 보통이 아니다. 거기에 2000년 정도이 시간 이동까지 있다. 이런 시간여행을 기획하다니, 미하일 불가코프는 '볼란드'의 일행이 되어버린 '거장'이다.(중의법인거 알지..밑줄 쫘악)

 모스크바는 좌충우돌이다. 검은 마술사 볼란드의 등장 이후에 생긴 일이다. 이 일당은 재기발랄,깜찍하다. 특히 인간들이 '서류'에 얽매이는 것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다. 그래서 뭐든지 '서류조작'을 통해 인간들을 설득한다. 도저히 믿지 못할 일도 '서류' 보여주면 다 통한다. 근대사회에서 '서류'는 어쩌며 '존재'에 선행하는지도 모른다. 즉 '서류'가 있어야 내가 존재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에서는 '주민등록증' 없으면 '비존재'가 되는거다.  TV 다큐멘터리나 진보적 잡지에 실린 '서류' 없는 '호모사케르' 들의 삶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보면 좋을 듯 하다. 하여간 스탈린의 러시아 역시'서류' 한 방이면 다 된다. 거기에 볼란드 일당은 필요하면 알리바이까지 만들어주는 친절한 악마들이다. 그러니 모스크바가 몇 일 동안 헤괴한 일을 수습정리하게 위해 바둥거린 것은 당연하다.

'빌라도의 이야기는 거장의 소설을 통해, 또 볼란드의 입을 통해 액자소설처럼 구성된다. 페르 라게르비스크가 예수 대신 사면된 바라바를 모티브로 상상력을 펼쳐 <바라바>를 썼다. 이걸로 노벨상도 받았다. 소설 속 거장은 예수에게 사형선고를 내림으로 영원히 예수와 함께 이름을 남긴 본디오 빌라도 총독에게 상상력의 면류관을 씌운다. '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의 외아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조기 교육이 중요한게 초등학교 때 외운건데도 아직 기억이난다. 하여간 빌라도, 이렇게 운빨이 없을 수가 있나 싶다. 어쩌다가 저 기도문에까지 이름을 남겨서 만대에 이렇게 오명을 남기는가? 아마도 불가코프 역시 그런 빌라도가 불쌍했고 그에 대한 처벌이 너무 가혹했다 싶었나 보다. 거장을 통해 빌라도의 울먹이는 소리를 대신 들려준다.

<거장과 마르가리타>에서 주인공들은 불행한 거장과 그의 연인 마르가리타이다. "사랑은 골목길에서 갑자기 살인자가 튀어나오 듯이 우리 앞에 나타나 우리 두 사람에게 달려들었습니다." 이렇게 만난 사람들이니 주인공은 주인공이다.그런데 도대체 왜 그들이 아카데미 남우 주연상을 받아야 하는 건가? 나는 볼란드와 그의 일행이 조연상 후보에 올르 수 밖에 없는 것이 아쉽다. 물론 그들이 아쉬워할 일이야 없겠지만...어쨋든 그들이 수상 무대에 오른다면 분명히 모스크바에서 했던 것 보다 더 깜찍한 흑마술 쇼를 보여줄 텐데 말이다.

전 세계에 중계되는 최고의 쇼가 될게 뻔하다.ㅋㅋ

사족))

<거장과 마르가리타>에서 몇 몇 구절을 썩먹었는데..."진실을 말하는 것은 쉽고 기분 좋은 일이다."같은 것들 말이다. 덧붙이자면 강 건너에서 말이다. '이명박은 쥐다 ' 라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쉽고 기분 좋은 일인가 말이다. 그래서 나는 안한다. (알겠지만, 사회와 냉전중인 부적응자가 하는 말이니 무시해도 된다.흐흐 )

또 한가지 잠결에 있는 와이프에게 ' 운명을 함께 나누는 이' 라고 불러주었더니 잠결에도 웃으면서 좋단다.ㅋㅋ "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이의 운명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 에서 훔쳐왔다. 거 봐라.. 고전 읽으면 다 좋은거라구..연애하려면 고전을 읽으라구, 소년!! 이 책이 고전이냐구?  "몰라. 하지만 고전이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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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8-09-01 13:00   좋아요 0 | URL
팀버튼과 거장 마리가리타라! 강한 포스가 느껴지는군요. 팀 버튼은 저도 좀 좋아하는 사람이라...읽어보고 싶군요. 기억하겠슴다.^^

드팀전 2008-09-01 15:12   좋아요 0 | URL
저도 예전에는 좋아했었지요. 지금은 뭐 그냥 저냥...
오랜만이지요.^^

mong 2008-09-01 16:43   좋아요 0 | URL
주말에 다크 나이트를 보고와서 드팀전님 글을 읽는데
거장과 마르가리타에서 옮겨 놓은 구절 보고 무릎을 탁 쳤어요 ^^
팀버튼은 저도 예전에만...

드팀전 2008-09-02 09:16   좋아요 0 | URL
몽님...요즘은 어떻게 지내세요. 지난 번 서울 갔을 때 몽님도 봤으면 좋았을 것을...

mong 2008-09-02 17:32   좋아요 0 | URL
흐흐 드팀전님은 거북이 등껍질에 얼굴은 구여운 이미지세요
요즘은 뭐 어떻게 이놈의 일을 때려치고 먹고 살까...
고민 중이에요
그러나 어렵네요-

드팀전 2008-09-03 07:40   좋아요 0 | URL
거북이 등껍질에 귀여운 이미지....
전 그게 누군지 압니다.

"닌자 거북이들"... 아니야,난 절대. 우우우 ㅜㅜ

로쟈 2008-09-01 20:32   좋아요 0 | URL
유튜브에서 2005년에 제작된 <거장과 마르가리타> 10부작을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드팀전 2008-09-02 09:16   좋아요 0 | URL
러시아에서 만든거라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한번 구경은 해야겠지요. 자막이 있나 모르겠군요.

드팀전 2008-09-02 10:14   좋아요 0 | URL
^^ 자막은 없군요...원작에 충실하게 만들어낸 것 같은 느낌은 주었습니다. 물론 영화가 소설적 표현을 따라잡지는 못하겠지만요..장면을 보니까 소설 속 어느 부분이었는지 기억이 납니다. 못알아들으니 뒤로 확넘어가서 무도회 장면을 보고 말았습니다.ㅋㅋ

아하..영어자막이 있는 걸 찾았아요.흐흐흐..

2008-09-01 22: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드팀전 2008-09-02 09:17   좋아요 0 | URL
마르께스도 저는 좋았는데...아 원래 전공이 이 쪽이시군요.

메르헨 2008-09-01 23:23   좋아요 0 | URL
님의 글 마지막 구절에서 웃음이 납니다.
신랑에게 고전을 좀 읽으라 해야겠습니다.^^
책에 관한 맛깔스런 글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네요.
읽어야겠다는 강한 압력이...^^

드팀전 2008-09-02 09:18   좋아요 0 | URL
^^ 반가와요. 재미있는 책이어서 즐거운실 거예요.

바람돌이 2008-09-02 01:25   좋아요 0 | URL
도서관에서 빌려놓은 책인데 빨리 읽어야겟군요. ㅎㅎ

드팀전 2008-09-02 09:19   좋아요 0 | URL
알라딘 MD서재에서는 '한 철 나기 좋은 책' 이라고 썻더군요. 그런데 속도가 붙어버리는 책이어서 한 철 내내 보기는 힘들어요.

nada 2008-09-02 10:34   좋아요 0 | URL
다크 나이트를 좋아하시는 취향하고도 겹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문예출판사 버전보다 번역이 더 나은 건가요?
일단 한 권으로 합쳐져 나왔다는 점에서 이쪽 버전이 더 솔깃하긴 한데, 중요한 건 외장보다 내용일 테니..
어쨌든 드팀전님 리뷰를 읽으니, 이 책도 더 이상 미루면 안 될 것 같다는 조바심이 생깁니당.


드팀전 2008-09-02 10:43   좋아요 0 | URL
우연의 일치라고 할 수 있겠지요...둘 다 비슷한 시점에 본 건..
제가 우스워하는 건 '착함'과 '선'에 대한 강박증적 환상이에요. 가끔 그런 생각도 하지요 '나의 선한 행동이 타인에게 죽음을 불러올 수 도 있다.' 는...좀 엉뚱하과 과장되었나요?

제가 싫어하는 잡지가 <좋은 생각>이라고 예전에 이야기했던가요...물론 가끔 그런 항생제들도 필요하고 저도 복용합니다만...

번역에 대한 질문은 제가 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로쟈님이나 다른 러시아문학 전공자들께서 답해주시겠지요.^^

아...그리고 제가 그 앨범 좋아한다는 이야기했던가요?

찐빵 2008-09-05 12:48   좋아요 0 | URL
읽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집니다. 허나 시간이나 능력이 없는 이들은 이 리뷰만으로 흐뭇해지는군요.
감사합니다. 무얼로 감사를 드릴지 고민하다 시 한 모금 권합니다.
추석이 가까워지는데 이 시는 어떨까요.


코스모스 - 김사인

누구도 핍박해본 적 없는 자의
빈 호주머니여
언제나 우리는 고향에 돌아가
그간의 일들을
울며 아버님께 여쭐 것인가

드팀전 2008-09-05 13:00   좋아요 0 | URL
^^ 감사합니다. 천천히 읽으시면 되지요.
제가 좋아하는 김사인 선생의 시라서 반갑군요.

Jade 2008-09-24 16:56   좋아요 0 | URL
드팀전님 리뷰에 혹해서 읽고 있어요! 재밌는데요 흐흐

드팀전 2008-09-24 17:10   좋아요 0 | URL
^^..다행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