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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걸어서 온다 - 윤제림 시집
윤제림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4월
평점 :
품절
윤제림의 시는 웃긴다. -그래... 웃긴다.
물론 이 시집에 어설픈 간판쟁이처럼 이름을 달아줄 몇 몇 단어들이 내 주머니 속엔 있다. 이 친구들이 서로 치고 나가겠다고 열 바짝받은 냄비 속 옥수수 마냥 각축 중이다. 하지만 간판을 팔레트로 만들지는 말아야 한다. 결국 한 두가지 주종을 이루는 색을 골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웃긴다' 라는 경거망동한 단어를 그 주머니 속에서 뽑아 들고 말았다.
도대체 웃기는 걸 '웃긴다'는 말 말고 어떻게 표현해야 할 까? 내가 홍길동도 아닌데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 이라 부르지 못한데서야 말이 되겠나.
싸리제 너머/비행운 떳다// 붉은 밭고랑에서 허리를 펴며/호미 든 손으로 차양을 만들며/남양댁/소리치겠다.// "저기 우리 진평이 간다"
우리나라 비행기는 전부 진평이가 몬다// ......<공군소령 김진평>
청소당번이 도망갔다/ 걸레질 몇 번 하고 다 했다며/ 가방도 그냥 두고 가는 그를/ 아무도 붙잡지 못했다//
"괜히 왔다 간다"/ 가래침을 뱉으며/ 유유히 교문을 빠져나가는데 / 담임선생도 / 아무 말을 못했다. //.......<걸레스님> (중광 1935-2202)
안 우낀가? 나만 웃긴가. ^^
마지막 시의 압권은 '담임선생도 아무 말을 못했다' 가 아닐까 싶다. 그 벙찐 선생의 얼굴과 세상만물의 모든 실을 끊고 교문을 나서며 '씨-익'하고 웃는 걸레스님의 얼굴이 생각나지 않는가? 일종의 니체적인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
웃긴 시 한 편 더 보자. 길다.
1. 화장실 다녀오느라 일행을 놓친 할머니 한 분이/ 줄지어 늘어선 유치원 아이들을 헤치며/ 아무 버스나 기웃거립니다.// 노란 버스와 아이들 역시 동무 하나가 안 보이는 지/ 선생님들은 손나팔을 만들어 선창을 하고/ 아이들은 합창을하듯 따라 부릅니다. 코-끼-리!
2. 사람과 차들의 단풍숲을 헤치며/ 대열을 빠져나온 버스 한 대가 어중간히 멈춰 섭니다.// 좁다랗게 열린 차창 하나에 서너 명의 할머니들이 매달려서/ 합창을 합니다. 밀-양-댁! // 좁다란 차창을 빠져나온 꼬깃한 손수건도 한 장 다급하게 소리를 칩니다.
3. 밀, 양, 댁이 열심히 뛰어갑니다// 할머니를 태운 버스가 조심조심/ 사람과 차들의 단풍숲 사이로 길을 냅니다// 그 길 끝에 아이 하나가 서 있습니다 /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은 얼굴입니다// 코, 끼, 리입니다. ... <관광버스가 보이는 풍경>
안 웃긴가? 안 웃기면 정말 당신은 과묵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메마른 사람이다. 컴퓨터로 글을 봐서 그럴지도 모르니 당장 시집을 사서 편안하게 '해우소'에 앉아서 읽어봐라. 당신에게 다시 기회를 주는 거다.
잡지에 글을 쓰는 평론가 신형철은 '시치미'의 어원에 장광설을 늘어 놓으며 윤제림의 전법이 '시침떼기'라는 것을 말한다. 앞의 세 시에서는 '진평이', '담임선생', '코, 끼, 리' 가 그런 '시치미'다. 그리고 이렇게 시치미 뚝 떼고 시인은 무리를 뒤로 하고 혼자 씩 웃으며 가는 거다. 윤제림의 시는 그래서 웃기는데 박장대소의 웃음이 아니다. 혼자 입을 실룩거리거나 입 한 쪽이 실에 의해 잡아당겨 진 듯 웃는 그런 웃음이다.
거기까지 좋았다. 그런데 평론가의 글에서 그리고 저자의 약력에서 내가 윤제림이 '광고쟁이'라는 것을 알아버린 것이다. '광고쟁이'를 폄하할 생각은 전혀 없다. '자본주의의 꽃' 아닌가 ? 내 전공도 이 쪽과 관련이 있어서 친구들 중에도 광고밥 먹는 사람들이 꽤 많다. 내겐 윤제림의 '시치미'떼기 전법이 요즘 유행하는 광고수법과 거의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좋다는 의미도 나쁘다는 의미도 아니다. 웃긴다는 의미다.^^ ) TV 광고에서 '유머'는 중요하다. 이런 유머를 만들어 내는 방식 중에 하나가 끝가지 그 광고 비밀을 움켜쥐고 있다고 마지막 한 두 컷에서 폭로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볼까... 도서관에서 책고르는 것 만큼 너무 많아서 쉽게 떠오르지가 않는데...최근 광고중 영화배우 김수로의 '해드뱅잉' CF 떠올려 보자.(잘 모르겠으면 검색해서 보시라.) 김수로가 딮 퍼플의 <SMOKE 0N THE WATER>에 맞추어 무아지경 상태에서 해드뱅잉을 한다. 잘도 한다. 날라리 논 가닥에 제대로 필 받았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주변 사람들이 김수로를 쳐다보고 있다 (자막: 지치시죠?) 김수로는 해드뱅잉을 한 것이 아니라 과하게 존 것이다. 그리고 '활력 발효유...000" 마지막에 한방 김수로의 애드립이 결합된다. 쪽팔리니까 빨리 나가려고 옷을 입다가 거꾸로 걸치고 나간다. 15초 안에 반전이 이렇게 일어난다.
윤제림의 시를 계속 읽다보면 끝에 어떤 반전이 기다리고 있을까 기다리게 된다. 이게 관성화되니까 마치 해외 유명 TV광고 모음전을 보는 듯 하기도 하다. 이건 장점이기도 하고 단점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에도 또 하나의 반전이-내 말로 '반전'이다- 있다.
그의 시에는 웃음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시는 평론가 이홍섭의 화엄세간론을 빌자면 부처님의 옅은 미소 속에 세상과 사람에 대한 따뜻하면서 애틋한 마음이 담겨 있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시를 광고와 달리 조금더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반전이다.(앞의 세 편의 시도 웃음속에 짠한 무언가가 있다.) 이 범주는 우리의 촌정서에서 비롯되지만 지엽적인데 머무르지 않는다. 더 넓은 세상과 사람들과 교류하고 있다는 말이다.
낡고 지친 고깃배가 도망을 치면 얼마를 가랴.해경 순찰함에 끌려 배 들어온다. 목포항구 중국 배 하나 들어온다. 이 배엔 누가 탔나. 연변서 온 이가 박가. 길림 사는 최서방. 이룡강서 나온 장소저...갑판 밑에서 탄식하며 기어나오는데. 천리 뱃길 허사로세. 용궁 꿈도 헛꿈이로세. 어이 돌아가리. 빈손으로 어이 가리. ...(중략)... 어린 처녀 하나 유독 슬피 우는데, 아이고 아버지 불쌍한 우리 아버지. 이렇게 소리 높여 제 애비만 찾으며 울더라. ...<심청가>
절묘하지 않은가. 광고 전법은 이렇게 사회적 맥락과 이어지면서 강한 효과를 발휘한다. 거기에 '심청전'이라는 우리 고전과의 접목이라니...울림이 있는 시다. 나는 이 시를 읽으며 예전에 봤던 신문기사를 떠올렸다. 선박 회사에 사기를 당한 조선족들 말이다. 꽤 오래 부산항에 억류되어 있었다. 상륙하지도 못하고 본국 송환까지 비참함 생활 속에 있었다. 브로커에게 돈 탈탈 털어 한국에 건너 왔을 텐데, 한국땅을 코 앞에 두고 땅을 밟지도 못했다. 브로커는 이미 도주했고 단 한 푼도 받을 가능성은 없었다. 경찰도 딱한 사정을 이해하지만 법적으로 돌려 보낼 수 밖에 없다고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윤제림은 그 안에서 심청이를 본 것이다. 비슷한 시를 또 보자.
나 어릴 때 학교에서 장갑 한 짝을 잃고/울면서 집에 온 적이 있었지/ 부지깽이로 죽도록 맞고 엄마한테 쫓겨났지/ 제 물건 하나 간수 못 하는 놈은 밥 먹일 필요도 없다고/ 엄마는 문을 닫았지/ 장갑 찾기 전에 집에 들어오지도 말라며
그런데 저를 어쩌나 스리랑카에서 왔다는 저 늙은 소년은 손목 한 짝을 흘렸네/ 몇 살이나 먹었을까 겁에 질린 눈은/ 아직도 여덟 살처럼 깊고 맑은데/장갑도 아니고 손목을 잃었네/ (중략)
어찌할거나 어찌 집에 갈거나/ 제 손목도 간수 못 한 자식이// 제 움푹한 눈망울을 닮은/ 엄마 아버지 아니 온 식구가, 아니/ 온 동네가 빗자루를 들고 쫓을 테지/ 손목 찾아오라고 찾기 전엔 돌아올 생각도 하지 말라고//
찾아보세나 사람들아...(중략)....걔 엄마 아버지한테 보이기라도 해야지/ 장갑도 아니고/ 손목인데.//
이제 웃음은 입꼬리를 내린다. 내가 사랑한 윤제림의 웃음은 이런 것들을 숨기고 있기 때문에 빛이 난다. 구재 런닝이 새 런닝보다 빛날 때가 있다. 건강한 땀이 만들어낸 초코렛빛 피부 위를 살며시 덥어주고 있는 구재 러닝은 표백제 냄새를 풍기는 새 런닝보다 훨씬 더 하얗다.
얘야, 이 사진 좀 보아라/ 엄마가 한국으로 돈 벌러 갔을 때란다/...모처럼 쉬는 날이라서/ 우리나라 사람들 열 댓명이 놀러 갔었지/ 아주 유명한 절이었다.
절 이름? 뭐더라. 엄마도 찾아봐야 알겠다// 네 아빠가 사준 것이라서/ 한 번도 안쓰고 넣어둔/ 수건 한 장.// 여기 있다/ 풀. 국. 사 관광기념
그래./ 엄마가 지금 네 나이에 돈 벌러 갔던/ 먼 동쪽 나라의/ 늦은 봄날 오후였다/ 풀. 국. 사였다.
.....<풀국사>
좀 심각해진 것 같으니, 다시 웃으며 끝내자. 아...그리고 마지막 한가지 더. 윤제림의 몇 몇 시에서는 하이쿠의 짧은 향기가 나기도 한다.
리뷰의 대미를 장식하는 마지막 시의 제목은 <춘향가>...더운 여름에 윤제림의 <그는 걸어서 온다>로 한 번 살짝 웃어주자. 운주사 와불들 처럼...끝.
부여중학교, 오늘도/ 이층 창가에 서서/ 당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저 여선생을 이기려면//
나는 아무래도, 여기/ 표 파는 여자나 되어야 할까봐요./ 정림사지 오층석탑/ 당신을 흔들자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