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이름 읽기 - 텍스트 해석의 한계를 에코에게 묻다
강유원 지음 / 미토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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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장미의 이름>과 관련해서 봐야 할 책들로 저자 움베르트 에코가 직접 쓴 <장미의 이름 창작 노트>와 더불어 이 책을 손꼽을 수 있다. <장미의 이름 읽기>라는 이 책은 철학박사 강유원이 쓴 것으로, 그는 젊은(?) 시절부터 소설 <장미의 이름>에 대한 텍스트 읽기 모임을 통해 꼼꼼히 검토해왔다. 그리하여 <장미의 이름>의 저자 이윤기씨의 최초 번역본의 문제를 지적했고, 재차 번역함에 있어서 오류를 수정할 수 있게 도와준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런 강유원 씨가 그에 그치지 않고 <장미의 이름 읽기>라는 책까지 내놓았다.

  '텍스트 해석의 한계를 에코에게 묻다'라는 부제를 안고 있는 이 책은, <장미의 이름>에 대한 수많은 개인들의 자의적인 해석에 대한 경고와 논리적 사유 태도를 가지고 텍스트를 대할 것을 강조하는 강유원씨의 <장미의 이름>에 대한 사유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에코는 <해석의 한계>라는 책을 통해 "텍스트가 합리적 개념 규정과 그 규정에 따른 논리적 배열에 따라 해석되어야 할 것임을" 강조했다. "생동하는 세계에 대한 해석을 내놓는 것이 어려운 일이라면 적어도 텍스트와 텍스트의 대화만이라도 제대로 해내는 게 학문하는 이들의 과제임을 이러한 경고와 요구로부터 읽어낼 수 있는 것이며, 모든 텍스트를 자의적으로 해석한다면 학문적인 생산은 물론 일상적인 의사소통까지도 불가능해진다" 강유원은 이어 "<장미의 이름>은 논리적 사유 태도를 가지고 읽어야 할 텍스트"라고 이야기한다. 이미 완결되어 독자 앞에 던져진 텍스트를 해석하는 것은 독자 개인의 몫이지만 텍스트를 해석하는데 있어도 나름의 법칙과 규칙이 있다는 것이다. 텍스트를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다고 하여 텍스트를 아무렇게나 찢고 이어붙이고 하며 만신창이로 만들어놓는 세태에 대한 강유원씨의 경고라고나 할까. 이 책은 그런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니 <장미의 이름>에 대한 해석의 문제에서만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책은 아닌게다.

  강유원은 소설 <장미의 이름>의 목차에 따라 살펴보며, 각각의 장면들에서 부연설명이 필요한 부분들, 그리고 제대로 해석하기 위한 조언을 서술해나가고 있다. 소설의 배경이 되었던 당시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부연설명이나 각 장에서 살펴볼 수 있는 주제에 대한 사유들을 펼쳐나간다. 소설 <장미의 이름>만으로 부족한 이들을 위하여, 또 소설이 다루고 있는 주제에 대한 좀더 깊은 사유를 원한다면 에코의 <장미의 이름 창작 노트>와 강유원의 <장미의 이름 읽기>를 순서대로 일독하길 권한다. 더불어 영화 <장미의 이름>도 함께 본다면 두배의 재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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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이름 창작노트 - 양장본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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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자는 자기 작품을 해석해서는 안된다. 해석하고 싶다면 처음부터 소설을 쓰지 말 일이다. 소설이라는 것은 수많은 해석을 발생시키는 기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자가 작품을 해석하지 않는다는 이 고결한 원칙을 지키는 데엔 한 가지 장애가 있으니 그것은 모든 소설에는 제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움베르트 에코는 자신이 쓴 <장미의 소설>이라는 소설에 대한 여러가지 해석과 의문이 난무하자 이에 도움을 주고자 <장미의 이름 창작노트>라는 책을 써냈다. 그러나 그가 말했듯이 작가는 자기 작품을 해석해서는 안된다.이미 완결한 소설은 하나의 텍스트로서 독자에게 주어진 것이며 그것은 더 이상 작가의 것이 아니다. 독자는 내던져진 텍스트를 접하고 나름대로 이해하고 파악하고 해석한다. 많은 독자들이 동일한 텍스트를 접하기 때문에 내용에서 빚어지는 커다란 견해차이는 없겠지만 이 소설은 충분히 많은 질문을 독자에게 던져놓았고, 독자 스스로 그것을 생각하도록 열어두었다. 논쟁이라고까지 할 건 없지만 해석의 여지를 많이 가지고 있는 셈이다.

  작가가 유일하게 텍스트에 해석을 가해야 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에코가 지적했듯 소설의 '제목'이다. '장미의 이름'이라는 소설의 제목은 많은 의문을 불러왔다. 왜 제목이 장미의 이름인가. 장미가 가지고 있는 서양 중세의 여러가지 의미와 또 '장미'가 아닌 '이름'에 부여되는 해석학적 문제들. 그것을 도라 이름 불렀을 때 그것은 더 이상 도가 아니다, 와 같은 문구도 이름의 의미에 대한 해석이라고 볼 수 있을 터. 셰익스피어는 "이름은 별 것이 아니다. 사물의 본질 그 자체에는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라고 한 바 있다. 베르나르도 "어떤 사물에 제멋대로 붙여진 딱지에 지나지 않는다." 라며 셰익스피어의 견해와 같이 하고 있다. 장미의 이름에서 '장미'는 덧없다. "강력하고 매력적이고 마력적인" 이름 '장미'. 그것 역시 아무 것도 아닌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장미의 이름'이란 어쩌면 이름의 덧없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런지. 사물은 제 각기 이름을 가지고 있다. 책상은 책상이요, 연필은 연필이요, 하늘은 하늘이지만, 그것은 갓 태어난 개새끼에게 '뚱띠' 와 '아롱이'라고 이름 붙인 것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하늘을 밥이라 하고, 밥을 똥이라 하며, 똥을 선물이라고 한다면 일상생활에서 언어소통의 어려움의 문제가 발생하겠지만 그것은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이름의 덧없음'과는 또다른 문제로 다뤄져야 한다. 어찌 되었건 이미 '장미의 이름'이라는 소설의 제목은 그 자체만으로 많은 해석의 문제를 불러왔다. 작가는 벌써 이렇게 제목을 통해 작품에 해석을 가하고 제목에 대한 해석의 논의를 끌어냄으로써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텍스트는 그 자체로 독자에게 던져져야한다. 제목은 어쩔 수 없다해도.

   작가의 텍스트에 대한 침묵은 독자에게 텍스트를 잘못 해석할 기회를 주기도 한다. 그러나 어쩌면 텍스트를 잘못 해석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런지도 모른다. 애초에 '잘' 과 '잘못'의 차이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것의 차이가 있다면 이는 이미 텍스트의 해석에 대한 정답이 따로 존재한다는 전제를 바닥에 깔게 된다. 독서란 바로 이것이다. 텍스트의 해석. 하나의 소설이 엄청나게 많은 독자의 손에 쥐어지고 독자는 각자 소설을 읽으며 나름의 의미를 찾는다. 즐긴다. 텍스트에 대한 다양한 해석, 그것이 바로 '독서'다. 에코는 그렇게 말한다. "작품이 끝나면 작가는 죽어야 한다. 죽음으로써 그 작품의 해석을 가로막지 않아야 한다"

   에코는 <장미의 이름>에 대한 <장미의 이름 읽기>라는 책을 내놓았지만, 이것은 해석의 차원에서 낸 것이 아니다. 작가가 독자로 하여금 텍스트를 '제대로' 이해토록 하기 위해 낸 책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는 텍스트에 대해 모범 해석을 내놓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잘'과 '잘못'은 생성된다. 하지만 에코의 이 작업은 텍스트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다. 이해를 '제대로 시키기 위한 것'과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은 '엄연히' 다르다. 전자는 정답을 상정한 데 비해 후자는 그저 각자의 해석에 풍부한 자료를 제공할 뿐이다. 이 책은 <장미의 이름>을 읽고 난 뒤에 쏟아지는 수많은 질문에 대해 대답하기 위한 책이다. 그러나 해석은 하지 않고.

  제목과 의미, 집필 과정의 기술, 중세, 가면, 누가 말하는가, 행보, 독자, 소설의 재미 등등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제목에서 느껴지는 바와 같이, 소설을 쓰게 된 동기나 과정, 그리고 이와 관련된 여러 주제들에 대해 간략히 언급하고 있다. <장미의 이름>을 다 읽고 난 뒤, 많은 의문점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그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이 책을 집어들 수 밖에 없으며, 이 책은 충분한 대답을 제시해주고 있다. 그리고 곁가지 이야기들을 제공함으로써 더 깊은 사색의 장으로 빠져들게 한다. 이것은 추리소설이자 역사소설이자 철학소설이다. 다양한 관점에서 다양한 이야기를 해볼 수 있는 이 책으로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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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6-07-13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양한 해석의 즐거움도 가치가 있겠지만요, 저같은 독자는 어려운 책은 이렇게 저자가 뭔가를 내놓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해요. 제가 옳게 읽은 건지 헷갈려서 말입니다&&
 
장미의 이름 - 상 - Mr. Know 세계문학 15 Mr. Know 세계문학 15
움베르토 에코 지음 / 열린책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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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어보지는 않았어도 책 제목만큼은 못들어본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추리소설이다. 그러나 이토록 무게감 있고 가벼이 보지 못할 추리소설도 따로 없을 것이다.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이 소설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많고, 이 책을 산 사람이 많아도, 이 책을 본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영화 <장미의 이름>에서는 감독이 영화를 설명하며 그런 말을 했다. 사실 이 소설에 등장하지도 않는 부분(영화에만 있는)에 대해서 움베르트 에코에게 편지를 써서 그 부분이 너무나 인상적이었다고 말 한 독자(?)도 있었다고 한다. 영화 <장미의 이름>은 봤어도, 소설 <장미의 이름>은 사놓고 보지 않은 것이다. 영화와 소설이 정확히 일치 하지 않으니 원작 소설을 보지 않은 채 영화만을 가지고 <장미의 이름>을 논하는 것은 위험하다.

  세계적인 지성 중의 한 사람으로 뽑히는 움베르트 에코. 그는 정말 천재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의 다재다능하다. 엄청난 지식을 소화해내고 많은 글을 생산해내는 다작가이지만, 글의 질적인 측면에서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 글을 쓰는 작가는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오랜 세월에 걸쳐 한 권의 책을 내놓는 부류가 있고, 글쓰기를 글읽기 하듯 다작을 하는 부류가 있다. 아무래도 전자의 글은 좀더 깊이가 묻어나게 마련이고, 후자의 글은 깊이가 떨어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움베르트 에코는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절대 떨어지지 않는 솜씨를 보인다. 유럽의 유명 언론에 칼럼을 쓰는가 하면, <장미의 이름>과 같은 불후의 명작을 남기기도 하고, 본업인 기호학자로서의 이론가이기도 하며, 동시에 철학과 문학과 역사와 미학의 전문가이며 이 분야에서도 많은 글을 토해내고 있다. 중세철학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컴퓨터도 잘 다룬다. 더불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는 물론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라틴어, 그리스어, 러시아어까지 능숙하다. 뭐 하나 빠지는 구석이 없는 학자다. 그가 쓴 책은 우리나라에도 많이 번역되어 있다. <푸코의 진자> <전날의 섬> <논문 작성법 강의> <미의 역사> <소크라테스 스트립쇼를 보다> <포스터 모던인가 새로운 중세인가> <철학의 위안> 등 일일히 언급하기도 힘들 정도다.

   <장미의 이름>은 그의 여자친구의 권유로 재미삼아 시작해 본 작품이다. 누구는 재미삼아 쓴 작품이 이 정도이니 나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어떻게 살라고. 본래 그는 이 이 작품의 제목을 <장미의 이름>으로 잡지 않았다. <수도원 살인 사건> <아드소의 수기> 와 같은 혹은 그와 비슷한 제목을 붙이려다 갑자기 떠오른 것이 <장미의 이름>이었다. 제목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보다는 그것이 주는 어떤 비밀스러움과 중세적인 분위기가 소설을 대표할 수 있다고 믿었던게다. 서양에서 '장미'는 여러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장미 전쟁>에서의 장미, <그대는 병든 장미> 에서의 장미, <장미는 장미이고 장미는 장미이다>에서의 장미, <장미 십자단>에서의 장미 등등. 후에 제목을 붙이고,  베르나르의 '속세의 능멸을 위하여'의 싯구절 '어디에 있느뇨'를 통해 이루어졌음을 에코는 밝힌 바 있다. 아벨라르는 '장미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통해, 언어가 ㅔ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과, 존재했지만 사라진 것을 드러내는지 설명했다. 제목을 붙이고 나니 <장미의 이름>에서의 '장미'의 존재는 매우 알쏭달쏭한 하지만 한편으로 깊은 의미를 지닌 듯한 분위기를 풍긴다.

  에코가 우연히 접하게 된 어떤 중세의 책자가 이 소설의 발단이었다. 그는 실제 기록된 사건을 토대로 하여 뼈대를 만들고 살을 붙여나갔다. 중세에 대한 그의 해박한 지식은 당연히 중세를 배경으로 한 수도원 살인사건의 소설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고, 라틴어 지식 등 그가 가진 다른 재능들도 이곳에 집적되었다. 그 누가 이런 소설을 쓸 수 있겠는가. 에코가 아니면 안된다. 이 소설 속에는 중세 수도원의 분위기와 역사, 그리고 아리스텔레스의 시학에 관한 내용 등 풍부한 지적경험이 녹아있다. 하나의 어려운 고대, 중세의 철학자의 1차 서적을 읽는 듯 어렵기도 하다. 무슨 소설이 이렇게 어려워서야. 앞부분의 그 역사와 배경에 대한 길고 긴, 지루하기까지 한 글은 출판사에서 잘라내자는 제의까지 했으나 에코는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장면이 없다면 소설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덕분에 독자는 900쪽에 달하는 두 권 짜리(한글판)의 지루하고 어려운 소설을 읽어야만 했다. 이 책을 내가 접한 것이 이번이 두번째. 처음 접했을 땐 도통 무슨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내용 파악 조차 하기 힘들었다. 중세에 대한 지식도, 고대에 대한 지식도 가진 것이 없는 채로 이 지적고통과 지루함을 안겨주는 소설을 읽어나갈 수가 없었다. 다 읽긴 했다만 무슨 내용인지는 알 수 없는 그런 경험이었다. 지금은 다행히 '완전히' 라고는 못하지만 내용파악과 그 의미를 해독했다고 생각한다. 추리소설을 읽으며 이것을 '즐김'의 대상이 아닌 '해독'과 '이해' 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우습지만.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윌리엄 수도사. 그는 매우 근대적인 사람이다. 안경과 나침반을 사용하고,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근거 위에 사건을 조사하며, 이성을 사용한다. 하지만 수도원의 대부분의 수도사들은 그와 반대의 성향을 가지고 있다. 믿음, 신, 구원 등 철저히 기독교적 교리에 의한 영적인 능력을 가지고 사건을 바라본다. 그 극단에 있는 이가 베네딕트 수도회의 베르나르 귀이다. 화려한 언변과 찍 소리 못할 카리스마로 순식간에 한 수도사와 여인을 악마와 마녀로 둔갑시키는 그에게 아무도 대적할 수 없다. 사건을 바라보는 또다른 인물 아드소. 아직 10대인 아드소는 윌리엄 수도사를 따라다니며 세상을 배운다. 이 소설은 이 어린 아드소가 어린 시절 윌리엄 수도사의 곁에서 겪었던 사건을, 윌리엄의 나이가 되어 과거를 회상하며 서술한 형식으로 구성되어있다.

  다양한 측면에서 이 책을 바라 볼 수 있다. 이성과 신앙, 과학과 종교, 중세 수도원의 역사와 갈등, 마녀재판, 금해야 할 것과 금지된 것들, 책의 가치, 도서관의 역할, 사랑, 지식, 기호와 텍스트, 사물의 본질, 앎과 지식 등등. 이 책을 제대로 읽고 사색하려면 각각의 주제를 가지고 매번 반복되는 독서를 해야 할 터이다. 너무나 많은 주제들이 집적되어 일일히 다 살피지 못하는, 수많은 지적체험으로, 책을 다 읽고 난 뒤에는 뭔가 뿌듯하면서 머리가 가득찬 느낌과 동시에 아무 것도 알게 된 것이 없는 듯 벙찐 모습을 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 책의 매력이다. 두 권의 이 책을 바라보고 있으면 아직도 그 때의 그 느낌이 묵직하게 나를 눌러온다.

 

 ***
 1. 신화학자 이윤기 씨는 이 책을 86년 처음 번역하고, 이후 여러차례 손을 보며 재차 번역을 하며 틀린 부분을 고쳤다. 또 이윤기 씨의 이 수고에는 철학자 강유원의 도움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이 텍스트를 공부하며 원전번역의 잘못을 지적한 책자를 만들어 출판사 측에 전달해줬고 이윤기 씨는 이를 바탕으로 번역을 시도하였다.

 2. <장미의 이름>을 통해 철학공부의 발판을 마련하는 것도 재밌는 작업일 듯 하다. 기호와 텍스트의 측면에서 해석학을, 또 소설의 사건의 중심이 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또 소설의 배경이 된 중세 기독교와 철학을 신학을, 또 이성과 신앙, 과학과 종교의 관점에서 과학철학과 신학을 비교해보는 것도 재밌을 듯 하다. 900장 짜리 두 권이라는 책이 주는 무게감은 이 소설 속에 들어있는 갖가지 지식의 양념이 주는 무게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닐 터이다. 다른 묵직한 책보다 이 두 권의 책을 바라봤을 때 느껴지는 무게감은 거기에서 비롯되는 것일게다.  

3. 나중에 여유가 된다면, 이 책을,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다. 그때는 내가 좀더 내 머리 속에 철학지식이 쌓여있기를, 그리고 이를 토대로 많은 철학적 고민들을 했길 기대한다. 미래의 나에게.

 

***
인상적인 몇 구절을 첨부한다.  

"내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이 없더라." (서문) (상권 p23) 

들판에 가을이 오면 꽃이 시들어 꽃대에서 사라져 버리듯이, 인간 또한 그렇게 사라져 버릴 터인즉, 인간의 외양만큼이나 덧없는 것이 또 어디 있겠느냐 (보에티우스) (상권 p37) 

진정한 앎이란, 알아야 하는 것, 알 수 있는 것만 알면 되는 것이 아니야. 알 수 있었던 것, 알아서는 안되는 것까지 알아야 하는 것이다. ('장미의 이름' 윌리엄 수도사) (상권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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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마니아 2006-07-12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호 이윤기 씨가 번역한 거였군

치유 2006-07-13 0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보니 다시 떨림이 있네요..참 두근 거리며 봤던 몇년전의 기억이예요..특히 장서관 살필때는..저도 다시 한번 읽어 봐야 겠어요..

이잘코군 2006-07-13 0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촬리 / 응 이윤기 씨 번역. 86년 초판때는 오류가 많았다는데 지금은 다 개선됐다지.
배꽃님 / ^^ 아 정말 어렵게 재밌게 읽은 책이에요. 제가 좋아하는 모든 것들이 집적되어있었어요. 철학적 주제들, 중세의 숭고하고 비밀스런 분위기, 아리스토텔레스, 책, 도서관 등등. 나중에 다시 보고 싶어요.

체다카 2006-08-25 0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윤기씨 유명세에 비하면 번역이 영 맘에 들지 않았어요. 이단논쟁 부분이나 주석 그리고 전체적인 번역문체상의 껄끄러움이 많이 느껴졌다고 할까요? 시간이 나면 꼭 영역판이라도 구해 읽고 싶은 책이랍니다. 구경 잘 하고 갑니다.
 

  툭툭 떨구다 쏴 쏟아내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에 우와왕 지나가는 오토바이 소리에 유키구라모토의 피아노 콜렉션 음반을 올려놓고 오후를 보낸다. 이른 아침 핸드폰은 울려대고 일어나야 한다는 걸 알면서 부러 못들은 척 다시 눈을 감는다. 그리고 문자메세지가 온다. 확인하기 위해 열어둔 핸드폰 액정으로 작은 불빛이 어둠을 가른다. 그리고 잠결에 읽은 두 건의 메세지는 나를 행복으로 밀어넣는다. 이대로 느끼고 싶다. 세찬 빗소리와 작은 방안을 채우고 있는 어둠과 두 건의 메세지의 행복을, 느끼고 싶다.  기상시간이 어긋나기 시작하면 하루가 다 망가질 걸 알면서도 그러고 싶었다.  운동도 가지 아니하고, 밥도 먹지 아니하고, 행복을 간직한 채 잠에 빠졌다. 눈은 떴지만 여전히 난 빗소리에 취해있다. 많은 생각이 나를 스쳐간다.

  - 불현듯 행복은 찾아왔고, 나를 기쁘게 했으며, 삶의 의미를 새롭게 했고, 나에게 자극을 주었다. 이대로라면 더 이상 바랄 바가 없을 것 같았다. 어릴적 종이에 끄적이며 몇년도에는 뭘하고, 그 다음에는 뭘하고, 또 최종적으로는 뭘 하겠다는 그런 거대한 꿈 따위는 이제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여기를 직시하지 못한 채 거대한 야망만 꿈꿨던 나는 어느덧 현실과 적당히 타협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여전히, 난 평범한 생활인으로 하루를 보내기를 거부한다. 거창한 계획을 세우고 무엇을 이루기 위해 하루를 살기보다 지금 여기를 즐기며 하루를 살고 싶다. 그럭저럭 나는 그렇게 살고 있는 듯 하다. 즐기다보면 어느덧 무언가가 되어있으리라.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지금의 나를 혹사시키고 싶진 않다. 현실에의 만족감은 삶을 나태하게 만들지만 또 한편에서는 나태함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나를 밀어낸다.

 - 나를 눌러오는 어떤 스트레스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또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친다. 하나의 개인이고 싶다. 하나의 인간이고 싶다. 누구의 자식, 누구의 아들이 아닌 하나의 개인이고 싶다. 하루 세끼 거를 정도의 못사는 집은 아니지만, 때마다 입을 옷이 없어 걱정하는 그런 집은 아니지만,  책사고 싶을 때 영화보고 싶을 때 책 못 사고 영화 못 보는 그런 집은 아니지만,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 이 집은 나를 억눌러온다. 해가 갈수록 두 분의 이마엔 주름살이 하나씩 그어지고, '나는 장남'이라는 어릴적부터 벗어나고팠던 생각지도 않던 굴레가 나를 죄어온다. 모른 척 하기엔 내가 받은 것이 너무나 많고, 그것을 인식하기엔 나는 너무나 자유롭다.

  - 스물 여덟. 아무런 생각하지 않고, 아무런 고민없이 그저 오늘을 즐기고 싶다. 내가 원하고 내가 행복한 것을 따라 한걸음 한걸음 발을 옮기고 싶다. 무엇인가를 해야한다는, 그런 강박관념은, 가지지 않으련다. 나는 자유인이고 싶다. 좋아하는 책을 읽고, 좋아하는 공부를 하며, 좋아하는 영화를 보고,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함께하고 싶다.

  - 여전히 난 이상주의자인가. 삶의 현실로 돌아와보니 당장 종합시험과 논문과 남은 대학원 두 학기와 학자금 대출과 졸업 이후의 불안감과 적지 않은 나의 나이가 숨을 턱 멈추게 한다. 그러면, 또다른 한편에선 닥치면 다 하게 되어있어, 어떻게든 다 돼, 라고 나를 위로하거나 애써 현실을 외면하게 만든다. 그저 오늘을 즐기고픈 행복한 마음과 나보다 앞서 한 걸음 두 걸음 나아간 나의 친구들에게서 느껴지는 불안한 마음이 다툰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한다. 타협은 한번으로 족하다. 힘들 때마다 타협점을 찾다보면 결국 남들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인이 될 것이다. 명절때마다 부모님께 어떤 선물을 드릴까, 애를 낳으면 어떻게 교육을 시킬까, 차는 언제사고, 내 집 마련은 언제할까, 아이가 크면 좀더 큰 집이 필요하지 않을까, 등등의 그런 숨막히는 고민들을 하고 싶지 않다. 그것이 현실이라고, 내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것이라고 누군가 지적해준다해도.  같이 가자. 오늘을 즐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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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이름은김삼순 2006-07-12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곳은 비가 오나요? 제가 있는곳은 어제 정말 많은 비를 뿌리고 오늘은 해가 쨍,,너무 덥답니다,,ㅠ 작은 일상에서 항상 행복을 느끼시길,,^^

전호인 2006-07-12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민이 필요한 시기인 것 같군여. 현실을 직시하실 필요가 있지 않을까여.
하지만 즐길 수 있는 시간이 제약을 받는다면 살아가는 맛이 없겠져?
즐길 때 즐기고 일할 때 일하자!
여유있는 사람들의 행복한 고민이 아닐까 합니다.
고민한다고 해결된다면 누구나 고민할 것입니다.
털고 일어나는 것이 해결의 실마리일 듯 합니다.
ㅎㅎㅎ, 그냥 생각없이 주절거려 봤슴다.

Mephistopheles 2006-07-12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님의 이번 페이퍼는 너무나 환몽적이고 자극적이라
많은 의심을 갖게 만듭니다.
뭘 드시고 쓴 페이퍼입니까..좀 나눠먹읍시다...!! =3=3=3=3=3

이리스 2006-07-13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농약같은 것은 먹지 말라고, 아프군!

이잘코군 2006-07-13 0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삼순님 / 오늘도 아침부터 오다말다 하네요. 운동 갈 땐 한방울 안떨어지다 돌아올 땐 쏴아아아.
전호인님 / ^^ 즐길 때 즐기고 일할 때 일하자, 에 동감입니다.
나침반님 / 아유. 무슨 책을 또 그렇게 지르셨어요. 나침반님이 부러워요. 그 두껍고 어려운 책들을 쉽게 우걱우걱 드시고. 제 나이를 적게 봤다면 너무 고마운걸요. 사람들이 제 나이보다 한두살 많게 봐서 그런 소리는 거의 못들어봤어요. 뭐 실제로 보시면 또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행복하게 살아요.
메피스토님 / 하핫. 저 혼자 먹을거에요. =333
구두누나 / 요즘 과일을 많이 먹어서 그런가 -_-a

2006-07-13 17: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자림 2006-07-14 2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러 가지 고민이 많으시군요. 우선 학위 따는 데 전력하시고 나중 일은 그 때 생각해 보심이 어떠하온지.. 사실 30대가 되면 거의 '돈'에 관심이 많이 가고 그만큼 재산도 조금씩 구축된답니다.^^
 

* 지난 일요일에 공연을 마쳤기에 더 이상 볼 수 없습니다.
그가 다시 무대에 오를 날이 언제인지는 나도 알 수 없습니다.


   "내 사랑을 말하기엔 하룻밤은 너무 짧습니다."
   "오! 스무살 난 아내는 어쩌면 그렇게도 애절하게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요?" 
  아내를 혼자 버려둔 채 이렇게 당신들 앞에 끌려와야 했던 오늘밤은
  정말이지 내 평생에 지울 수 없는 악몽이 될 것입니다.
  아! 아내가 잠에서 깨어나기 전에 돌아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밤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강신일의 진술> 

 

  대단한 공연이었다. 연극의 묘미는 바로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모노드라마의 매력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좋았다. 참으로 좋았다. 이런 작품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종로, 대학로 길거리에 지나다니다 보면 공연 포스터 참으로 많이 붙어있다. 하지만 어떤 것이 좋은 공연인지 아닌지 구별하기란 까막눈인 나는 모른다. 영화를 많이 보면서 영화에 대한 취향과 나름의 안목이 생겼지만, 연극을 본 것은 내 인생 스물 여덟 해에 있어 딱 네 번. 한번은 대학 2학년즈음이었나. 당시 수강했던 한 교과의 교수님께서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고 오너라 했고, 처음 연극을 접했을 때, 더군다나 그것이 <고도를 기다리며>였다는 것이 내게는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무엇이든 처음이 중요하다. 첫 경험이 어떤가에 따라서 지속적인 관심을 갖게 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결정된다. 그런 점에서 연극의 첫경험은 매우 탁월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연극은 영화보다 비싸다는 이유로, 항상 돈에 쪼들려 살던 나는 언제나 영화를 택했다. 그리고 누군가와 함께 쉽게 선택할 수 있기에는 연극보다는 영화였다. 솔로 시절이 길었던 내가 더군다나 오봇하게 누군가와 함께 연극을 보러가기란 어려웠다. (연극은 연인끼리 봐야한다는 편견을 버려. 그래 맞다. -_- )

  내 생에 경험한 몇 안되는 연극은 모두 감동을 선사해주었다. <강신일의 진술>은 처음 내가 연극을 접했던 <고도를 기다리며>와는 또다른 색다른 감동을 선사해준다. 난 이렇게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작품이 좋다. 책이든, 음악이든, 영화든, 드라마든, 연극이든, 어떤 형태로 전해지든 간에 뭔가를 생각해볼 수 있는 작품은 언제나 환영이다. 하지만 생각거리를 던져준다고 하여 모두 같은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은 불친절하게 툭 던져놓고는 인사도 없이 가버리고, 어떤 것은 친절하게 메세지를 전달해주려 노력한다. 또 어떤 것은 나름의 줄거리를 가지고 진행하지만, 중간중간 대뇌피질에 찌릿찌릿 전기가 흐르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모두 좋다. <강신일의 진술>은 아무 것도 모른 채 봤기 때문에, 그저 이름과 제목과 포스만 알고 봤기에 더욱 좋았지 싶다. 함께 본 이가 내게 작품에 대한 아무런 언질도 하지 않은 것은, 그런 의도였다.

***

  연극은 매우 철학적이다. 또 매우 흥미롭다. 마치 소설을 한편을 읽은 것처럼. 또 스릴 넘친다. 찌릿한 지적 자극과 함께 짜릿한 섬뜩함을 느끼게도 해준다. 딱 내가 좋아하는 그런 작품이다. 적당히 지적이고, 적당히 흥미롭고, 적당히 짜릿한.

  환상과 실제. 철학에서 매우 흥미롭고 흔한 주제이면서 언제나 많은 생각거리를 선해주는 주제이다. 내가 어떻게 세계를 인식하는가, 사물을 인식하는가의 인식론적 문제. 많은 영화와 책에서 써먹히는 주제이면서 다루기 힘든 주제이기도 하다. 영화 <매트릭스>에서는 실제세계와 가상세계를 다루었고, 어떤 것이 실재하는 세계인가, 근본적인 차원에서 실재하는 세계와 상관없이, 우리는 어떤 세계를 실재세계라고 믿는다. 그리고 또 무엇을 원하는가, 를 다루었다.

  믿고 싶은 것과 믿어야 하는 것은 다르다. 믿고 싶은 것은 나의 희망이 가미된 환상이며, 믿어야 하는 것은 불행이 그곳에 있더라도 인정해야만 하는 현실이다. 환상은 무엇이고 실제는 무엇인가. <강신일의 진술>에서 주인공이  '환상과 실제'라는 책을 썼다고 했을 때, 이미 난 눈치챘다. 내 마음 속에서 아! 하는 탄성과 함께 머리 속에서 번개가 쳤다. 사랑하는 여인이 살아있다고 믿고 싶었다, 그녀와 함께 여행을 왔다고 믿고 싶었다, 그녀와 전화통화를 했다고, 처음 그때를 떠올리며 다정한 대화를 나누었다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사랑하는 여인이 죽었다. 그녀와 함께 여행을 오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녀와 전화통화를 하지도 않았다. 다정한 대화는 없었으며, 모든 것은 내가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했다. 믿고 싶었다 하지만 믿어야 했다. 인정해야 했다.

  어쩌면 환상 속에 살며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 더 나은 삶인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매트릭스'에서 리얼세계로 나올 필요도 없고, 그것을 탐구한다는 것 자체도 무의미하다. 현실 속의 불행감보다 환상 속의 행복감이 낫다면, 깨지 않는 것도 삶을 살아가는 하나의 좋은 방법일 터이다. 이건 아니야 어서 인정해 괴롭겠지만 눈을 떠, 라고 말리고 다그치고 윽박지르며 두들겨봐야 소용없다. 그 사람은 이미 행복한걸. 우리의 삶의 궁극적 목표는 행복이 아니던가. 행복하기 위해 돈을 모으고, 행복하기 위해 큰 집을 사고, 행복하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행복하기 위해 책을 보지 않던가. 단지 모두에게 행복에 대한 관심과 관점이 다를 뿐 모두가 행복을 추구하며 산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누구도 불행해지길 원하지 않는다. 만일 나는 불행해지길 원해 라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그 또한 객관적인 불행의 조건을 통해 주관적인 행복을 획득하려는 것이다.  

  존재하는 실제와 존재하지 않는 환상은 결국 삶을 살아가는 주체의 문제이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환상 속에 살며 현실을 사는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거나 객관적인 도덕규칙에 어긋나는 행위를 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행복감과 상관없이 피해자가 발생했다는 차원에서 어떤 제제를 가해야 할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극 속에서 보여지는 '그'의 환상에 때로 가슴저리게 아프고, 욱신욱신 쿡쿡 통증이 오며, 공감하고픈 것이 나의 현실이다. 그의 행각(?)과 별도로 내가 그가 되어 그를 느끼고 싶었다. "오늘 밤 아내 곁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래. 그러고 싶었다. 세상에 없는 아내를 불러내고 싶었다. 두 사람을 만나게 해주고 싶었다. 가슴 아픈 사랑의 이야기이며, 환상과 실제의 이야기이며, 섬뜩 놀래키는 추리물이기도 한 이 연극을 연출하고 열연한 박광정씨와 강신일씨에게 박수를. 두 분 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들이다.

***

하나. 5년만에 무대에 다시 올린 이 연극을 종료 하루 앞두고 본 것은 정말 잘 한 일이었다.
하나. <공공의 적>을 통해 강렬하게 다가왔던 그의 힘이 연극에서 또다른 더 큰 빛을 발했다.
하나. 박광정과 강신일을 다시 주목하게 된 작품이었다.
하나. 연극의 원작이 된 소설을 읽고 싶어졌다.
하나. 나중에 다시 무대에 올린다면 이 연극을 또 한번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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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gos678 2006-07-16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일지의 소설 <진술>을 토대로 만든 연극인가 봐요. 5~6년쯤 전에 정신없이 읽었던 기억이 있어요. 책도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의 진술로만 이루어져 있는 독특한 구성이랍니다. 연극이 끝났다니 아쉽네요.

이잘코군 2006-07-17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맞아요. 소설을 바탕으로 했어요. 소설도 보고 싶어요.